94화
“왕자님, 대체 그게 무슨…….”
“배도스 공작, 내가 여태껏 자네를 많이 믿어 줬지만 이번만큼은 가만히 있을 수 없네.”
주변에 웅성거리는 소리가 소란스러웠다. 여러 귀족들이 한마디씩 했다.
“그러고 보면 왕자님께서 배도스 공작님을 많이 믿어 주시긴 했지. 헤르틴 하녀장이 독으로 죽었을 때도 배도스 공작을 질책 한번 하신 적 있었나?”
“그렇긴 합니다. 그래도 왕자님께서는 배도스 공작이 친척 관계니 그렇게까지 봐주셨다고 생각합니다.”
“내 말이 그러하네. 왕자님께서 배도스 공작이 하는 일을 많이 눈감아 주셨지.”
웅성거리는 소리가 커지자 배도스 공작 주변에 있던 사람들도 당황하며 배도스 공작을 쳐다봤다. 배도스 공작은 화가 난 듯 굳은 얼굴이었다.
당황한 얼굴로 있던 루티스 백작이 급히 배도스 공작에게 속삭였다.
“공작님, 이건 저희가 한 번도 예상 못 한 일 아닙니까? 왕자가 갑자기 이렇게 나올 줄은…….”
그때 배도스 공작이 고개를 들었다. 웅성거리던 소리가 점차 잦아들었다. 배도스 공작은 잔뜩 굳은 얼굴로 말했다.
“일이 이렇게까지 커졌으니 책임도 제가 져야겠지요.”
제르딘은 입꼬리를 올렸다.
“책임지는 모습이 아주 보기 좋네. 배도스 공작.”
배도스 공작의 얼굴이 한순간에 일그러졌다. 제르딘은 미소를 지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가 일어나자 귀족들이 모두 일어났다. 제르딘이 대회의실을 빠져나가자 일어났던 귀족들도 서서히 대회의실을 빠져나갔다.
제르딘이 대회의실에 나오자마자 보좌관이 빠르게 속삭였다.
“왕자님, 아까 정말 놀랐습니다. 왜 갑자기 그렇게 강경하게 나가시는 겁니까?”
“발레린을 지키기 위해선 이 방법밖에 없어.”
“하지만 갑자기 이러시면 배도스 공작 세력이 가만히 있지 않을 텐데요.”
“배도스 공작은 내가 뭘 하지 않아도 온갖 짓을 벌일 텐데 굳이 가만있을 이유가 있나?”
“하지만 너무 위험했습니다. 아까 하신 말씀도 너무 직접적이었고요.”
제르딘이 피식 웃었다.
“어차피 내가 살아가는 것 자체가 위험하지 않나? 거기다가 내가 그동안 돌려 말해도 알아듣지 못하니 이번에야말로 그렇게 말하는 건데.”
보좌관은 걱정스러운 얼굴로 쳐다봤지만 제르딘은 개의치 않고 말을 이었다.
“그리고 배도스 공작은 하루가 다르게 나를 죽이려고 발악하고 있고.”
“그건…….”
“발레린을 건드는 것만 봐도 그렇지. 감히 발레린을 독살하려 하다니. 덕분에 명분이 생기긴 했지만 어쨌든 이번 일을 계기로 배도스 공작이 나서는 걸 본격적으로 막을 거야.”
“그래도 배도스 공작이 이름도 모를 왕국의 청혼서를 받았다고 하면서 대신전 일까지 말한다면…….”
“난 먼저 배도스 공작이 그 일을 터뜨려 줬으면 하는데.”
“예? 그게 무슨 말씀이신지…….”
“오히려 배도스 공작이 먼저 나서서 터뜨리고 내가 수습하는 게 더 깔끔할 것 같아서. 지금도 그렇고.”
보좌관은 영 이해하지 못하는 얼굴이었다.
“그때도 말씀드렸지만 너무 위험하지 않습니까? 물론 저는 왕자님이 하시는 모든 일에 따르겠지만, 그래도 제가 걱정이 워낙 많은지라…….”
“어차피 일이 이렇게 진행되리라고 예전부터 생각하고 있었어. 언젠가 내 세력이 생기면 이렇게 움직일 거라고.”
“그럼 예전부터 계획하셨던 겁니까?”
“헤르틴 하녀장 일로 배도스 공작을 징계하지 않은 것도 그 이유야. 자잘하게 하는 것보다 한 번에 싹을 자르는 게 더 눈에 띄는 법이니까.”
그때 사르티아 공작이 제르딘에게 인사를 하고 지나갔다.
“사르티아 공작.”
제르딘의 말에 사르티아 공작이 돌아봤다. 제르딘이 가만히 서 있자 그는 잽싸게 제르딘에게 다가왔다. 제르딘은 그를 물끄러미 보면서 물었다.
“발레린은 만나 본 건가?”
“아, 아니요. 제가 요즘 워낙 바빠서요.”
“그러고 보면 결혼 후에도 발레린을 따로 만나지 않았던 것 같은데.”
사르티아 공작은 묘하게 눈을 피했다.
“지금 발레린은 독기가 나오지 않아서 안전할 뿐 아니라 방독면을 쓰지 않아도 멀쩡한데.”
“저도 소식은 들었습니다. 발레린의 독기가 이젠 사람들에게 영향을 끼치지 않는다고 하더라고요.”
“그런데 왜 발레린을 한 번도 만나지 않았지?”
“예?”
“발레린의 유일한 친족 아닌가?”
“그렇긴 하지만…….”
“내겐 부모가 떠나고 없지만 발레린에겐 그래도 아버지가 존재하니 한 번이라도 만나 주면 좋겠는데.”
사르티아 공작은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눈이 마주치자 제르딘이 천천히 내뱉었다
“이건 명령이네.”
한편 대다수의 귀족들이 대회의실을 빠져나가고 배도스 공작 옆에 있던 귀족들만이 대회의실 자리를 지켰다. 멍하니 서 있던 루티스 백작은 곧장 배도스 공작에게 말했다.
“공작님! 이건 왕자가 저희를 완전히 깔아뭉개는 일 아닙니까?”
옆에 있던 겔렌트 남작이 거들었다.
“맞습니다. 어떻게 감히 배도스 공작님을 건드릴 수 있습니까?”
배도스 공작은 비열하게 입꼬리를 올렸다.
“곁에 사람 하나 없다가 이제야 여러 사람이 붙으니 제 앞길도 모르고 나대는 것뿐이야.”
“하지만 전과는 다릅니다. 여태껏 왕자가 배도스 공작님께 직접 반기를 든 적은 없잖습니까?”
“…….”
“거기다가 원로원 귀족과 사르티아 공작이 여론을 만드니까 다른 귀족들도 모두 그들의 말에 따르는 게…….”
“그러니 우스울 따름이지. 왕자를 따르는 사람이 없을 땐 나에게 붙어 있다가 이젠 원로원 귀족과 사르티아 공작이 한마디씩 하니 모두 붙는 꼴이라니.”
배도스 공작은 차분히 의자에 앉았다. 일어서 있던 주변 귀족들은 서로 눈치를 보다가 차츰 앉았다.
그때 겔렌트 남작이 조심스레 말을 꺼냈다.
“그런데 지금 돌아가는 상황이 묘합니다. 발레린 공녀를 건드렸는데도 왕자는 몸을 사리기보다 오히려 저희를 몰아가지 않았습니까?”
“맞습니다! 그리고 그만한 독에 죽지 않은 게 말이 됩니까? 헤르틴 하녀장도 죽었는데 어떻게 발레린은 살 수 있습니까?”
“제 말이 그 말입니다. 의사 말을 들어 보니 오히려 회복된 뒤에는 더 활발하다고 합니다. 무슨 독에 절여진 사람도 아니고.”
순간 주변 분위기가 가라앉았다. 루티스 백작이 잠시 머뭇거리다가 말했다.
“그런데 원래 발레린 공녀는 독에 절여진 사람 아닙니까? 그래서 탑 안에 갇혔고 사람들도 발레린 공녀를 두려워했고요.”
“그래도 그렇게 독한 독을 먹었는데 몇 시간 뒤에 멀쩡하게 깨는 게 정상이라고 보십니까?”
루티스 백작은 입을 닫았고 겔렌트 남작은 눈에 힘을 주며 말했다.
“제 생각에는 발레린 공녀가 독살 계획을 미리 알았을 것 같습니다.”
“알았다니요?”
“그렇지 않았다면 이렇게까지 멀쩡하지는 않을 겁니다. 이게 대체 말이 되는 상황입니까?”
“하긴 탑 안에 갇혀서 멍청할 줄 알았는데, 왕정 회의에서 책에 나오는 내용을 들먹이던 것을 보면 마냥 멍청한 사람은 아닌 것 같았습니다.”
겔렌트 남작은 진지한 얼굴로 말했다.
“의외로 발레린 공녀는 저희를 이용하고 있는지도 모릅니다.”
“이용하다니요?”
“저희가 계획하는 일마다 어그러지고 있지 않습니까? 거기다 왕자도 이렇게 나오는 마당에…….”
그때 루티스 백작이 말을 자르며 말했다.
“공작님, 독은 발레린 공녀에게 안 통하니 새로운 방법을 찾아야 합니다.”
겔렌트 남작은 이해가 안 간다는 듯 눈썹을 찌푸렸다.
“지금은 독이 통하지 않을 수도 있지만 더한 맹독성 물질을 첨가하면 될 겁니다.”
“그러면 오히려 위험할 수 있어. 지금도 왕자가 빌미를 잡은 것처럼 날뛰는데.”
겔렌트 남작의 얼굴이 눈에 띄게 일그러졌다.
“루티스 백작님, 지금 제가 말하는 방법이 잘못되었다는 겁니까?”
“굳이 실패한 방법을 다시 해 봤자 소용없을 것 같아서 그러네.”
겔렌트 남작은 날카롭게 루티스 백작을 쳐다봤다. 그 시선에 루티스 백작은 어이없는 듯 쳐다보고는 시선을 돌렸다. 그때 다른 귀족이 말을 꺼냈다.
“얼른 발레린 공녀를 없애야 합니다. 독살로 왕자비 주변에 있는 사람을 모두 처치하려고 했는데 그것도 지금 왕자가 막고 있지 않습니까?”
겔렌트 남작은 일부러 루티스 백작을 보면서 말을 이었다.
“맞습니다. 발레린 공녀가 있으니 없던 세력까지 생기고 위험합니다. 그러니 공녀만 깔끔히 없애면 사르티아 공작도 어떻게 하지 못할 겁니다. 원로원 귀족도 굳이 말을 덧붙이지 않을 거고요.”
겔렌트 남작은 지금 무엇보다 발레린이 거슬렸다. 안 그래도 배도스 공작 주변에 있던 사람들이 점점 사르티아 공작 쪽으로 붙고 있었다. 그러니 아예 왕궁에서 발레린을 완전히 내보내는 게 지금으로선 최선이었다.
배도스 공작은 고개를 끄덕이며 동조만 할 뿐 말은 꺼내지 않았다. 겔렌트 남작은 신이 나서 말을 덧붙였다.
“발레린 공녀를 없앤 뒤에는 배도스 공작님께서 갖고 계신 청혼서를 가지고 타국 사람과 왕자를 결혼시킬 수도 있고요. 그렇게 된다면 왕궁이 잠잠해지지 않겠습니까?”
배도스 공작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지금보다 한결 편안하겠지.”
겔렌트 남작은 기분 좋게 입꼬리를 올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