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3화
하지만 발레린과는 이루어질 수 없었다. 제 피와 섞이면 저와 같은 이상한 인간만 탄생할 뿐이었다. 어릴 때 겪은 부작용이 얼마나 힘들고 견디기 괴로운지 그가 제일 잘 알았다.
물론 지금은 부작용이 나타나지 않지만 그래도 의사 말처럼 지켜봐야 했다. 예전에도 이런 식으로 부작용이 나타나지 않다가 거세게 나타난 적이 있었다.
제르딘의 얼굴이 서서히 굳어 갈 때쯤 의사가 다가왔다. 발레린의 상태가 어떤지 일정 시간마다 보고하라고 명령을 내렸던 참이었다.
의사는 제르딘에게 고개를 숙여 말했다.
“왕자비님의 상태는 좋습니다. 심지어 전보다 더 활발해 보이기도 하고요.”
“활발하다고?”
“네, 오히려 강한 독이 왕자비님께 도움이 되지 않았나 싶을 정도입니다.”
“그러고 보면 발레린은 발목이 안 좋았을 때 독을 먹으니 금방 낫기도 했는데.”
의사는 곧바로 이해하고는 빠르게 말했다.
“종종 그런 사례가 있긴 합니다. 특히 몸속에 지닌 특유의 물질이 많을수록, 그 물질을 다른 곳에서 섭취하면 몸에 회복 작용을 일으킨다고요.”
“그래도 잘 지켜봐. 어쨌든 발레린이 먹은 건 맹독이니까.”
의사는 고개를 끄덕인 뒤 물러났다. 그때 제르딘은 의사를 다시 불렀다. 의사가 돌아보자 그가 말했다.
“늑대 수인의 피를 가진 사람과 저주에 걸린 사람의 피가 섞일 경우 아이는 어떤 부작용을 겪을지 알아 와.”
의사는 고개를 숙이곤 물러났다. 그 모습을 물끄러미 보고 있던 배도스 공작이 입을 열었다.
“왕자님, 이번에 왕자비님의 독살 미수 사건과 관련하여 왕자비님 주변에 있는 사람을 본격적으로 수사해야 합니다. 특히 가까운 전용 하녀부터 시작해서…….”
“그 일은 내가 알아서 할 테니 신경 껐으면 하는데.”
“신경을 끄라니요?”
“왕족의 독살 사건은 내가 알아서 수사를 단독으로 지휘할 테니 관심을 끄라고.”
배도스 공작은 물론 주변에 앉아 있던 귀족들까지 눈을 동그랗게 뜬 채 제르딘을 쳐다봤다. 그중에서 루티스 백작이 말했다.
“왕자님, 아까부터 말씀이 너무 심하신 것 아닙니까?”
“왕자비를 독살하려 한 사건은 엄연히 왕족에 대항하는 사건인데 내가 직접 사건을 지휘하는 게 심하다고?”
오히려 제르딘이 묻자 귀족들은 입을 닫은 채 말을 꺼내지 않았다. 보좌관만이 안절부절못하며 제르딘을 쳐다봤다.
그때 사르티아 공작이 말했다.
“발레린이 헤르틴 하녀장과 같은 독을 먹은 것은 매우 심각한 사건입니다. 감히 왕자비의 음식에 독을 탔으니까요.”
다들 먼저 왕자에게 말하지 못하고 서로 눈치를 보며 웅성거렸다. 그들의 입장에서도 이 사건은 꽤 심각했다.
제르딘은 귀족들을 물끄러미 보다가 말했다.
“그리고 이건 곧 나를 향한 화살일 테지.”
그 말에 귀족들은 모두 고개를 조아렸다.
“왕자님, 그 말씀은 심하십니다. 감히 어떻게 왕자님께…….”
“여태껏 내 주위 사람이 모두 독살로 죽은 건 모르는가? 이번 사건도 별반 다르지 않지. 다행히 발레린의 몸에 독기가 있어서 죽지는 않았지만 만약 다른 사람이었다면…….”
제르딘의 눈은 배도스 공작에게 돌아갔다.
“전과 같이 성대하게 장례식을 치러야 했겠지.”
제르딘은 차갑게 배도스 공작을 쳐다봤다. 배도스 공작은 눈썹을 찌푸리며 묘하게 시선을 피했다. 제르딘은 주변에 있는 귀족들을 차분히 둘러봤다.
“그러니까 이번 일은 내가 직접 지휘하겠다. 관련된 자료도 모두 내가 처리할 거고.”
그때 루티스 백작이 조심스레 말했다.
“하지만 왕자님께서 단독으로 진행하시면 일이 많지 않겠습니까?”
“원래부터 일이 많았는데 새삼스레 걱정해 주는 건가?”
“…….”
“전에는 내가 무슨 일을 하든지 걱정조차 하지 않은 걸로 기억하는데.”
제르딘이 한쪽 입꼬리를 올렸다. 루티스 백작은 당황한 얼굴로 고개를 내렸다.
“그나저나 배도스 공작, 이번에 내가 승인하지도 않은 타국의 서류를 받았다는 말이 있던데.”
그 말에 원로원 귀족들이 배도스 공작을 쳐다봤다. 배도스 공작은 표정 하나 변하지 않고 되물었다.
“무슨 서류를 말입니까?”
“그건 지금 조사 중이지만 잘 알지 않는가?”
“조사 중이라면 아직 확실하지 않으니 말을 아끼겠습니다.”
“확실하지 않은 이야기를 누구보다 잘 믿은 사람은 배도스 공작 아닌가?”
“왕자님, 제가 언제…….”
“왕궁에 나에 대한 소문이 많이 떠도는 건 잘 알 거고, 그런 소문을 누구보다 잘 이용한 사람은 배도스 공작 아닌가?”
배도스 공작의 눈썹이 단숨에 일그러졌다.
“왕자님, 증거도 없이 그런 말씀을 하시는 건…….”
“배도스 공작이 먼저 그런 말을 하지 않았나? 내 심신이 미약해서 결혼을 누구보다 빨리 해야 한다고.”
“그건 2년 전 일 아닙니까? 저도 왕자님을 충분히…….”
“알고는 있지. 모두 날 걱정해서 그런 말을 했다는 걸. 하지만 잘 생각해 보면 배도스 공작은 항상 내게 그런 소문을 직접적으로 전하면서 날 많이 걱정했지.”
“…….”
“신기하게 내가 듣지도 못한 소문을 잘 알고 있기도 했고. 마치 그것만 신경 쓰는 사람처럼.”
그때 루티스 백작이 나섰다.
“왕자님, 그건 워낙 왕자님에 대한 소문이 많아서…….”
“그러고 보면 내 소문은 늘 지지부진하게 끝났어. 잘 없어지지도 않고.”
모두들 말이 없었다. 제르딘은 입꼬리를 올리며 루티스 백작에게 말했다.
“루티스 백작이 이것에 대해 보고해 보겠나?”
“예?”
“루티스 백작 정도면 여러 조사관을 거느린 것으로 아는데.”
“그건…….”
그때 배도스 공작이 침착하게 말했다.
“왕자님, 소문에 대해서 이렇게까지 마음을 쓰실 줄 몰랐습니다. 그건 저희가 알아서…….”
“이제 배도스 공작에게 조사권에 대한 권리를 위임할 수 없겠는데.”
배도스 공작의 얼굴이 한순간에 굳었다.
“그게 무슨 말입니까?”
“말 그대로야. 여태껏 배도스 공작이 내게 보여 준 충성은 의심될 정도로 도움 되는 게 하나도 없어서.”
너무나 직접적인 말에 대회의실에 있는 귀족들의 얼굴이 새하얗게 굳었다. 옆에 있던 보좌관도 마찬가지였다.
대회의실에서 표정이 여유로운 사람은 제르딘밖에 없었다. 그는 무심한 얼굴로 주변에 있는 귀족을 바라봤다.
가장 먼저 침묵을 깬 사람은 사르티아 공작이었다.
“배도스 공작은 여태껏 왕자님께 보여 준 게 없긴 했습니다. 왕자님에 대한 소문도 왕자님이 지시하시면 없어지는 듯하다가 조금 지나면 또 다른 소문이 생겼으니까요.”
배도스 공작 주변에 있던 귀족들은 날카로운 눈빛으로 사르티아 공작을 쳐다봤다. 제르딘은 미소를 지으며 사르티아 공작을 응시했다.
“서쪽 변방 지역의 광맥은 잘 조사되었는가?”
“예, 광맥을 잘 찾았습니다. 생각보다 꽤 많이 분포되어 있었습니다.”
사르티아 공작의 얼굴은 여느 때보다 행복해 보였다. 원로원 귀족인 세드릭스 공작도 마침 입을 열었다.
“귀족 회의에서 사병을 축소하고 왕실 친위대를 늘린다는 것에 모두 동의했습니다. 이참에 쓸데없이 많은 귀족의 사병과 권한을 줄이는 것도 나쁘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주변 눈치를 보던 귀족들은 하나둘씩 입을 열었다.
“맞습니다. 그동안 배도스 공작님이 꽤 많은 권한을 가지고 있긴 했습니다.”
그 말을 시작으로 배도스 공작에 대한 비판이 이어졌다.
배도스 공작 주변에 있던 귀족들은 그들을 빤히 응시했다. 하지만 원로원 귀족과 사르티아 공작은 그 시선을 무시하고 주변 의견에 동조했다.
제르딘은 그들을 차분히 관찰하다가 입을 열었다.
“그대들의 의견이 이토록 명확하니 배도스 공작의 수사권을 없애는 것으로 결론을 내리고, 이번 회의는 여기서 마치는 걸로 하지.”
배도스 공작 주변에 있던 귀족들은 하나둘씩 일어나 외쳤다. 그중에서 루티스 백작의 목소리가 가장 컸다.
“이렇게 급작스럽게 내리는 결론이라니요! 배도스 공작님은 여태껏 깨끗하게 일을 처리하시는 걸로 유명하셨는데 어떻게…….”
“이미 왕자비의 독살 미수 사건이 일어났는데 배도스 공작이 굳이 그 자리에 있어야 하는 건가?”
“그건 배도스 공작님과 하등 상관없는 일이지 않습니까?”
“상관없다니. 배도스 공작은 지금 하녀를 관리하는 인사권과 조사관을 주관하는 권리도 가지고 있는데, 여태껏 일어난 일에 책임을 전혀 지지 않았지.”
“책임을 지지 않았다니요! 배도스 공작님께서는 누구보다 왕궁의 일을 많이 신경 쓰신 분입니다.”
제르딘이 피식 웃었다.
“헤르틴 하녀장이 독을 숨긴 것부터 시작해서 하인들을 제대로 일하게 하지 못했고 발레린 주변에 있던 사람을 미리 파악하고 조사하지 못했으니 그 결과는 모두 배도스 공작이 짊어지는 게 맞지. 안 그런가, 배도스 공작?”
배도스 공작은 가까스로 감정을 다스리는 듯 보였으나 그의 눈썹은 기괴하게 움찔거렸다. 제르딘이 계속 쳐다보자 배도스 공작은 천천히 시선을 들었다. 그는 입꼬리를 실룩거리며 입을 열었다.
“제가 한 일은 모두 왕자님을 위해서였습니다. 만약 제가 왕자님을 제대로 보필하지 않았다면…….”
“보필은 무슨, 내 곁에 있던 사람들이 모두 죽은 건 자네가 관리를 제대로 하지 못해서 그런 것 아닌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