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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록빛 저주의 공녀님-92화 (92/130)

92화

제르딘의 얼굴은 꽤 진지했다. 발레린은 괜히 제르딘을 신경 쓰게 만들고 싶지 않아 밝게 말했다.

“이제 제 목적은 그것뿐이에요. 저희는 계약으로 이루어진 사이잖아요.”

제르딘의 눈썹이 살짝 일그러졌다. 발레린은 제 말에 실수한 게 있었나 잠시 생각하다가 그로프를 바라봤다. 그로프는 발레린과 눈이 마주치자 개꿀개꿀 울었다.

제르딘은 여전히 말이 없었다. 발레린은 시계를 힐끗 쳐다봤다. 점심시간이 다 되어 가는 시각이었다. 발레린은 재빨리 제르딘에게 물었다.

“왕자님, 바쁘시지 않나요?”

“일이 있긴 하지만 제대로 할 수 없어서요.”

“전 정말 괜찮은데. 이렇게까지 저를 신경 쓰지 않으셔도 돼요.”

“제가 신경 쓰지 않으면 누가 공녀를 신경 쓰겠습니까?”

“그것도 맞는 말이긴 하지만…….”

발레린은 잠시 머뭇거리다가 입을 열었다.

“왕자님께서 계속 이렇게 나오시면 제가 자꾸 착각하게 돼요.”

“무슨 착각이요?”

“왕자님이 저를 좋아하신다고요.”

“…….”

“왕자님께서는 절 좋아하시지 않을 텐데…….”

제르딘은 굳은 얼굴로 발레린을 쳐다봤다. 발레린은 차마 제르딘을 보지 못한 채 말을 이었다.

“그러니까 굳이 이렇게까지 신경 쓰시지 않아도 돼요. 저는 왕자님이 저에게 그런 감정을 줄 수 없는 걸 아니까요.”

발레린은 그로프를 슬쩍 쳐다봤다. 그로프는 발레린을 보며 개꿀개꿀 울었다.

“제가 공녀를 착각하게 만든 겁니까?”

“저는 그동안 왕자님께서 저를 많이 생각해 주시는 걸 보면서 희망을 가졌거든요. 제가 한순간에 왕자님을 좋아한 것처럼 왕자님도 그렇게 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발레린은 이제야 뼈저리게 느꼈다. 다른 것은 모두 발레린이 하고 싶은 대로 이루어졌지만 사람의 마음은 어쩌지 못했다.

심지어 발레린조차 제르딘에게 빠질 줄 몰랐고, 그에게 던진 마음을 쉽게 거둬들이지 못했다.

발레린은 제르딘을 슬쩍 쳐다봤다. 그는 여전히 굳은 얼굴로 발레린을 보았다. 발레린은 잠시 머리를 굴렸다가 빠르게 말했다.

“물론 왕자님께 부담을 주려고 한 말은 아니었어요! 그냥 저는…….”

“압니다. 공녀가 제게 어떤 마음인지. 그런데 신기한 건 저도 처음입니다.”

“네?”

“다른 사람을 이렇게까지 배려해 주고 신경 쓴 건 처음이라는 겁니다.”

발레린이 차마 말을 꺼내지 못하는 사이 제르딘이 자조적인 미소를 지으며 중얼거렸다.

“심지어 왕정 회의까지 빠지고 이렇게 있는 것도 그렇고.”

제르딘은 잠시 침대보를 쳐다보다가 천천히 발레린을 보았다.

“공녀도 이런 기분이었습니까?”

발레린은 제르딘의 말을 쉽사리 이해할 수 없었다. 그때 거세게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리더니 문이 벌컥 열렸다. 제르딘이 날카롭게 돌아보자 보좌관이 황급히 고개를 숙였다.

“왕자님, 지금 귀족들이 난리입니다. 특히 배도스 공작이…….”

제르딘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는 발레린을 잠시 쳐다봤다. 그의 눈빛에는 이전에 봤던 권태나 지루함은 느껴지지 않았다.

오히려 온갖 감정을 느껴서 지쳐 보이기도 했다. 발레린이 제가 맞게 봤나 싶어서 의아하게 보자 제르딘이 말했다.

“전 이만 가 보겠습니다.”

제르딘은 보좌관과 함께 방을 나갔다. 발레린은 닫힌 문을 물끄러미 쳐다봤다. 아까는 꿈처럼 지나간 듯 아득했다.

그때 발레린의 곁에 있던 그로프가 개꿀개꿀 울었다. 발레린은 멍하게 중얼거렸다.

“그로프, 아무래도 이상해.”

“무엇이 말입니까?”

발레린은 잽싸게 그로프를 돌아보며 말을 이었다.

“왕자님이 하신 말씀 말이야. 나도 이런 기분이었냐고 물었는데. 그게 혹시…….”

“왕자는 어쨌든 주인님과 계약을 맺은 사이이니 주인님을 생각하는 것이 당연합니다. 그렇게 신경 쓰다 보니까 주인님처럼 느꼈다는 것 아닙니까?”

“그럼 나를 좋아한다는 말인가?”

“좋아한다기보다는 그저 계약상 동지 아닙니까?”

“그렇겠지? 내가 성급하게 기대하면 안 되겠지?”

“왕자는 이상한 사람이니 굳이 그런 식으로 기대를 하면 안 될 것 같습니다.”

발레린은 고개를 끄덕였다. 발레린도 제르딘이 정확히 어떤 사람인지 가늠이 서지 않았다. 그는 가까운 듯하면서 먼 사람이었다.

제르딘은 발레린의 병실을 나와서도 머릿속이 멍했다. 그는 여태껏 발레린이 배도스 공작의 세력에 더는 휘말리지 않도록 애썼다. 그가 해야만 하는 일이고 했어야만 했던 일이었다.

발레린을 이 궁으로 끌어온 자는 자신이었으니까.

그리고 발레린은 궁에서 보던 사람과 다르게 무척이나 특이했다. 탑 안에 오래 갇혀 있었지만 늘 얼굴에는 웃음이 있었고 성격도 꽤 활발했다. 거기다가 순수함까지 존재하니 그가 느끼는 감정은 그저 호기심 그 자체였다.

그래서 계속 눈길이 갔고 발레린이 어떤 사람인지 궁금했다. 이런 적은 처음이니 낯설었지만 호기심이라고만 치부했다. 어차피 제르딘은 마음속에 감정을 일으킬 만한 어떤 것도 없다고 생각했다. 그건 어머니가 돌아가시고 난 후 사라졌으니까.

심지어 그는 어머니가 돌아가신 이후로 한동안 웃지도 울지도 않았다. 몇 년 동안 제르딘은 그저 허공에 떠도는 유령과 같았다.

매일 똑같은 일상, 똑같은 사람, 그리고 변함없이 저를 괴롭히는 귀족들. 그러니 발레린처럼 특이한 사람에게 눈길이 갈 수밖에 없었다. 그렇게 발레린을 보면서 제르딘은 저도 모를 행동을 했다.

아침 산책 후에 발레린이 생각나 한번 보려고 난데없이 방으로 찾아갔었다. 그리고 델프스에 가서는 선을 긋는 발레린에게 반감이 느껴져 제게 더 다가오라고 했다. 그리고 꿈속에서 발레린이 나온 뒤로는 제 감정을 제어하지 못해 부작용이 그대로 튀어나왔었다.

제르딘은 그때 어렴풋이 짐작했다. 발레린의 입술이 제 입술과 닿았을 거라고. 그렇지 않았다면 그렇게까지 빨리 깨어날 수도 없었다. 거기다 머릿속도 결혼식 때처럼 맑았으니까.

그리고 발레린의 반응을 보고서 확신했다. 꿈이 아니라 현실이었다고. 사소하게 반응하는 발레린이 재미있었다. 그렇게 왕궁으로 돌아온 이후로 너무 바빠서 신경을 못 쓰는 사이 발레린이 독을 먹고 의식이 없다는 소식을 듣고는 바쁜 일도 제쳐 두고 병실로 왔다. 할 일이 많지만, 어차피 제대로 안 될 게 뻔하니까.

하지만 발레린은 계속 선을 그었다. 제르딘은 델프스에서 겪었던 감정을 그대로 다시 겪었다. 마음속은 격랑처럼 솟구쳤다. 그러고 보면 이상했다.

‘왜 하필 발레린에게만 내가 그렇게 행동했을까.’

처음이었다. 다른 사람을 그렇게까지 생각하고 배려하고 신경 쓴 것도. 거기다 할 일도 내팽개치고 왔다. 그렇게 일이 많았는데도.

제르딘은 문득 멈춰 섰다. 바쁘게 가던 보좌관이 어리둥절한 얼굴로 돌아봤다.

“왕자님?”

“발레린도 이런 기분이었겠지.”

“예?”

제르딘의 눈빛이 차츰 어두워졌다.

“이제야 알겠다고. 어떤 기분인지.”

보좌관은 여전히 어리둥절한 눈빛이었다. 제르딘은 신경 쓰지 않고 물었다.

“루티스 백작과 겔렌트 남작에 대한 건 어떻게 됐어?”

“알아보니까 두 사람은 꽤 친하긴 한데 겔렌트 남작 쪽에서 은근히 불만을 가지고 있는 것 같습니다.”

“왜?”

“루티스 백작의 명령을 받고 일하는 게 마음에 들지 않는 듯합니다. 어쨌든 겔렌트 남작도 권력욕이 있어서 루티스 백작의 명령을 받기보다는 배도스 공작에게 직접 명령을 받으려고 하는 것 같기도 하고요.”

“그럼 루티스 백작을 도발하면 되겠군.”

“하지만 왕자님, 루티스 백작이 걸려들까요?”

“루티스 백작은 배도스 공작을 많이 따랐으니 충성심이 대단해. 그걸 이용하면 돼.”

보좌관이 멈칫하며 고개를 기울였지만 제르딘은 보좌관을 지나쳐 먼저 걸어갔다. 뒤늦게 보좌관이 제르딘을 뒤따랐다.

제르딘이 도착한 곳은 대회의실이었다. 배도스 공작은 물론 원로원 귀족까지 모두 모여 있었다. 그가 상석에 앉자마자 귀족들이 하나둘씩 의자에 앉았다.

그때 배도스 공작이 큼큼 기침하면서 제르딘을 쳐다봤다.

“왕자님, 오늘도 늦으셨습니다. 대체 왜 자꾸 늦으시는 건지.”

“발레린의 병문안을 하고 왔네.”

그 말에 주변에 있던 귀족이 배도스 공작의 눈치를 보았다. 배도스 공작의 얼굴이 대번에 굳었다. 제르딘은 그 모습을 여유롭게 보다가 말했다.

“헬릭스를 병문안 보냈던데, 앞으로는 직접 왔으면 좋겠군.”

제르딘의 단호한 말에 귀족들은 서로 눈만 깜박이며 눈치를 보았다. 배도스 공작의 표정이 눈에 띄게 일그러졌다. 제르딘은 그를 보면서 입꼬리를 올렸다.

“자네가 직접 오지 않아 서운해서.”

배도스 공작은 어이없는 듯 입술을 짓씹다가 이내 고개를 숙였다.

“서운하시다니, 왕자님께 심려를 끼쳐 드려 죄송합니다.”

제르딘은 배도스 공작의 인사를 무시하고 보좌관에게 눈짓했다. 보좌관은 곧바로 왕정 회의 주제를 가져와 서류를 돌렸다. 배도스 공작만이 고개를 숙인 채 눈썹을 찌푸렸다. 자존심에 생채기라도 난 듯 얼굴이 벌겋게 달아올랐다.

제르딘은 귀족들의 말이 오고 가는 것을 지루한 듯 바라봤다. 그의 머릿속에는 어느덧 발레린이 가득 차 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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