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1화
발레린은 천천히 눈을 떴다. 하지만 평소 보던 천장과는 달랐다. 거기다 주변은 온통 흰빛이었다. 발레린은 놀라며 주변을 둘러봤다. 그때 누군가 눈이 마주쳤다.
“왕자님?”
발레린은 마치 꿈을 꾸듯 머릿속이 몽롱했다. 제르딘은 곧바로 발레린의 손을 잡고서 말했다.
“이제 정신이 드십니까?”
“네, 그런데 제가 어디 아팠나요?”
제르딘의 눈썹이 살짝 일그러졌다. 그때 옆에 있던 의사가 조심스레 말했다.
“왕자님, 잠시 검진 좀 하겠습니다.”
제르딘은 천천히 물러났다. 제르딘이 물러나자마자 의사들은 모여서 발레린의 손목을 만지거나 이마에 손을 대 보거나 눈에 이리저리 빛을 비춰 보았다. 발레린은 새삼 그들이 신기해서 눈을 감지도 않고 관찰했다.
의사는 놀란 눈빛으로 발레린을 쳐다봤다.
“괜찮으십니까?”
“네, 머리가 약간 몽롱한 것 빼고는 괜찮아요.”
그 말에 의사는 말없이 눈을 동그랗게 뜬 채 바라봤다. 급기야 제르딘이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어떤 상태인지 보고나 해.”
의사는 황급히 고개를 숙이며 빠르게 말했다.
“지금 상태는 괜찮습니다. 어쨌든 의식을 찾으셨으니 더 걱정하실 일은 없을 겁니다.”
“나가 봐.”
제르딘이 말하자 모두들 고개를 숙이곤 방을 나갔다. 제르딘은 발레린 옆에 앉았다. 발레린은 이 상황이 아무래도 이상해서 물었다.
“제가 혹시 쓰러졌나요?”
“공녀가 먹었던 음식에서 독이 나왔습니다.”
“독이 나올 줄은 알고 있었는데 혹시 제가 그것 때문에 이렇게 된 건가요?”
제르딘이 굳은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전 독을 먹으면 멀쩡한데 무슨 독을 먹었길래…….”
“헤르틴 하녀장이 먹었던 독과 같은 독입니다. 평소 공녀의 독보다 더 강력한 독이라서 그런 듯합니다.”
“그래서 제가 지금 산 건 맞죠?”
제르딘이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의 얼굴은 그 어느 때보다 굳어 있었다. 그는 잠시 발레린을 보다가 나직이 말했다.
“죄송합니다. 괜히 저 때문에 공녀가…….”
“아니에요! 저도 알고서 독을 먹은걸요. 그리고 잘못을 했다면 배도스 공작이겠죠.”
발레린은 머릿속이 몽롱하긴 해도 어쩐지 기분이 좋았다. 맹독성을 지닌 독을 먹어서 강한 각성이라도 한 것 같았다.
하지만 제르딘의 얼굴은 풀릴 줄을 몰랐다. 심지어 그는 발레린의 손을 잡고 있었다. 그것도 꽤 세게 말이다. 발레린은 두근거리는 심장을 무시하고 손을 살짝 빼냈다. 그제야 제르딘이 놀란 얼굴로 손을 뺐다.
“그나저나 그로프는요?”
“옆에서 자꾸 울어서 잠시 다른 곳에 두었습니다.”
“그로프가 보고 싶은데 데려올 수 있나요?”
“금방 데려오게 하겠습니다.”
제르딘은 일어나서 문을 열고 나가려 했다. 그때 문이 활짝 열리더니 커다란 외침이 울렸다.
“발레린 공녀!”
갑자기 들린 목소리에 발레린이 놀라며 고개를 들었다. 헬릭스는 제르딘에게 인사를 하는 둥 마는 둥 발레린에게 걸어왔다.
“헬릭스 님이 어떻게…….”
“맹독을 먹었다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그래서 깨지도 못하고 있다가 이제야 깨셨다는 소식을 듣고 왔습니다.”
“다행히 저는 괜찮아요.”
그때 제르딘이 다가왔다.
“헬릭스, 나가지?”
꽤 낮은 목소리였다.
“그저 병문안입니다. 그리고 아버지도 정식으로 저에게 병문안을 하라고 말씀하셨고요.”
“배도스 공작가의 병문안은 받고 싶지 않은데.”
“그럼 친척으로서…….”
“우리가 그렇게 가까운 친척이던가?”
“왕자님.”
“난 어릴 때 자네와 즐거웠던 기억은 없어서.”
“아니, 어떻게 이러실 수 있습니까? 그래도 제가 공녀께…….”
“공녀라는 말도 집어치워.”
발레린은 말도 꺼내지 못하고 제르딘을 보았다. 제르딘이 이렇게 차갑게 사람을 보는 것은 처음이었다. 거기다 제르딘의 화난 모습은 자주 보지 않아서 발레린은 온통 넋이 나가 있었다.
‘저렇게 화를 내는 모습도 멋있다니.’
발레린은 두근거리는 심장을 겨우 부여잡으며 침을 삼켰다. 그때 개꿀개꿀 우는 소리가 들리며 보좌관이 들어섰다.
발레린은 보좌관이 든 상자를 보며 기쁘게 외쳤다.
“그로프!”
얼음장처럼 차가웠던 주변 분위기는 금세 일그러졌다. 발레린은 그로프를 보자마자 손으로 올라오게 한 뒤 활짝 웃었다.
“그로프, 넌 괜찮아? 그동안 어디 있었어?”
“제가 계속 주인님 곁에서 울어서 저를 안정시킨답시고 어두운 곳에 두었습니다. 그리고 저는 멀쩡하고요.”
발레린은 제르딘을 슬쩍 쳐다봤다. 제르딘은 발레린과 눈이 마주치자마자 말했다.
“의사 말로는 주변이 너무 시끄러우면 공녀가 깨기 힘들다고 했습니다. 그래서 제가 할 수 없이 그로프를 그곳에 두었던 거고요.”
그때 헬릭스가 나섰다.
“그나저나 독성이 꽤 강하다고 하던데 정말 괜찮습니까?”
“네, 괜찮아요.”
발레린은 미소를 지었다. 그때 제르딘이 발레린 앞을 막으며 헬릭스를 쳐다봤다.
“발레린이 멀쩡하다는 걸 봤으니 이제 가야지?”
“왕자님, 저는 아버지의 명령으로…….”
“그깟 병문안 필요 없으니까 나가.”
헬릭스의 얼굴이 눈에 띄게 일그러졌다. 발레린도 놀란 눈빛으로 제르딘을 쳐다봤다. 제르딘은 멍하게 서 있는 헬릭스를 보며 말했다.
“아무리 배도스 공작의 명령이라도 내 말을 따르지 않으면 결과가 어떻게 될지 뻔할 텐데?”
헬릭스는 새하얗게 질린 얼굴로 제르딘을 보다가 이내 몸을 돌려 방을 나갔다. 문이 완전히 닫히고 나서야 제르딘이 몸을 돌렸다.
“죄송합니다. 괜히 주변이 시끄러웠네요.”
제르딘은 옅은 미소를 지었다. 발레린은 잠시 닫힌 문을 보다가 차분히 말했다.
“왕자님, 저렇게까지 하실 필요가 있었나요? 그래도 헬릭스 님은 제가 걱정되어서 온 것 같은데.”
“헬릭스는 어떻게 보나 배도스 공작의 아들입니다.”
“그렇긴 하지만 아무래도 말이 나올 것 같아서요.”
“헬릭스가 여기까지 온 이상 말이 나오는 건 이미 정해진 수순입니다. 그리고 배도스 공작도 일부러 말이 나오게끔 보냈을 거고요.”
“왕자님은 괜찮으세요? 저보다 왕자님에 대한 말이 많이 나올 것 같은데.”
제르딘이 피식 웃었다.
“저를 걱정해 주시는 겁니까?”
“아무래도 저 때문에 격해지신 것 같아서요. 저는 헬릭스 님이 온 것은 상관이 없긴 해요.”
“상관이 없다니요?”
제르딘의 목소리는 아까와 다르게 낮았다. 그의 눈빛도 꽤 가라앉아 있었다. 발레린은 순간 동굴에서 본 제르딘이 생각났다. 지금 그의 눈동자 색은 하늘빛이었지만 이상하게 그 모습이 낯설게 느껴지지는 않았다.
발레린은 머릿속으로 하던 생각을 그대로 말했다.
“사실 사람이 오면 여러 말을 나누는 게 재미있어요. 그래서 결혼 전에 여러 사람을 많이 만나기도 했고요. 탑 안에서 살 때는 사람과 대화를 나눌 기회도 없었거든요. 제가 보는 것이라곤 책밖에 없었으니까요.”
“하지만 헬릭스는 위험합니다.”
“그래도 헬릭스 님은 배도스 공작이 어떤 일을 꾸미는지 저에게 말을 해 주긴 했어요. 어떤 의도가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좋은 의도는 아니었을 겁니다.”
“하지만 그땐 나름대로 저를 도와주려고 했어요. 그리고 그게 맞았고요.”
그때 그로프가 발레린의 귀에 속삭였다.
“헬릭스가 주인님을 좋아해서 그렇게 다 말한 것 아닙니까?”
“그렇긴 하지만…….”
“그러니까 헬릭스와 멀어져야 한다는 겁니다.”
순간 발레린은 놀란 눈으로 제르딘을 쳐다봤다.
“일부러 들으려고 한 건 아닌데 제가 보통 사람보다 귀가 좋아서요.”
발레린은 차마 말이 나가지 않았다. 제르딘의 얼굴에는 표정이 거의 드러나지 않았지만 그의 눈빛만은 꽤 날카로웠다.
“동굴에서 그런 말을 들었을 때 화가 났는데 지금도 여전히 그러네요.”
발레린은 놀란 눈으로 제르딘을 쳐다봤다. 그는 어딘가 심기가 불편해 보였다.
“왕자님, 정말 별것 아니에요! 그리고 헬릭스 님은 원래 여러 여자를 그런 식으로 좋아한다고 하지 않았나요?”
“그래도 공녀에게 노골적으로 감정을 드러냈으니 제겐 아주 큰일입니다.”
“그런 일이라면 걱정하지 마세요. 어차피 저는 헬릭스 님을 좋아하지 않으니까요. 그리고 왕자님께서 그렇게까지 신경 쓰지 않으셔도…….”
“여태껏 공녀에게 신경 쓰지 않은 일이 없었습니다.”
“죄송해요, 왕자님. 괜히 저 때문에…….”
“제가 호텔에서 했던 말 때문에 자꾸 이러시는 겁니까?”
발레린이 고개를 들자 제르딘이 뚫어지게 바라봤다. 발레린은 선뜻 말이 나가지 않았다.
“지금 그 일을 해결하고 있습니다. 조만간…….”
“왕자님, 그렇게까지 말씀해 주시지 않아도 돼요. 어차피 왕자님을 돕는 건 변함없으니까요.”
“…….”
“배도스 공작을 몰아내고 꼭 왕자님께서 이 왕국의 왕이 되셨으면 좋겠어요!”
발레린은 활짝 웃었다. 제르딘이 그땐 제 옆에 없을 거라고 생각하니 마음이 안 좋았지만 그래도 발레린은 제르딘이 꼭 왕이 되었으면 했다.
“공녀의 목적은 그것뿐입니까?”
“네?”
“제가 왕이 되는 거요.”
발레린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정말 그것뿐입니까?”
두 번이나 같은 것을 묻는 말에 발레린은 의아한 마음마저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