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0화
“하긴 동굴에 있을 때 주인님께 툭하면 웃었던 것 같습니다.”
“그러니까. 예전에는 그렇게까지 웃지는 않았거든.”
발레린은 처음 제르딘이 자신을 보던 시선을 똑똑히 기억했다. 무관심하면서도 그저 신기한 듯한 시선이었다. 거기다 어떨 땐 지긋지긋한 권태도 보였다.
발레린이 얼굴을 굳히며 생각을 하는 사이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울렸다. 발레린이 고개를 들자 문이 열렸다.
“왕자비님, 다 드셨나요?”
발레린이 고개를 끄덕이며 넌지시 말했다.
“내가 먹은 음식에 독이 들었어.”
그때 쨍그랑 소리가 울렸다. 루네스는 황급히 발레린에게 다가와 얼굴을 살폈다.
“왕자비님, 괜찮으세요? 제가 곧바로 의사를…….”
“아니야. 그럴 필요 없어. 어차피 난 독을 먹어도 멀쩡해.”
“하지만 독이 든 음식을 먹었잖아요.”
“루네스, 난 오히려 독을 먹으면 더 멀쩡해져. 동굴에 있을 때도 발목을 다쳤는데 독을 먹으니 괜찮아졌고.”
루네스는 놀란 눈으로 쳐다봤다. 발레린은 개의치 않으며 다른 하인을 물러나게 했다. 무엇보다 하인들이 너무나 놀란 듯하여 더 있다간 쓰러질 것 같아서였다.
루네스는 여전히 걱정스러운 얼굴로 바라봤다.
“왕자비님, 정말 괜찮으세요?”
“난 괜찮아. 그나저나 요즘 왕자님은 어떠셔?”
“왕자님이요?”
발레린이 고개를 끄덕이자 루네스는 잠시 생각하는가 싶더니 입을 열었다.
“요즘 왕자님께서는 무척이나 바쁘세요. 여전히 예민하시고 일을 완벽하게 하려고 하시고요.”
“혹시 요즘 자주 웃으셔?”
그 말에 루네스는 놀란 눈빛으로 쳐다봤다.
“왕자님이 자주 웃으신다고요? 전혀요.”
“원래 왕자님이 자주 웃지는 않으셨지?”
“네, 왕자님이 쳐다보지 않으셔야 그나마 좋은 평가가 내려진 거예요. 만약 말을 잘못하면 왕자님께서 엄청 날카롭게 쳐다보시거든요. 저는 왕자님을 모시지 않아서 다행이지만…….”
루네스는 말을 하는 도중 입을 황급히 가렸다.
“죄송해요. 왕자비님, 제가 말실수를 한 것 같아요.”
“괜찮아, 눈감아 줄게.”
발레린이 미소를 짓자 루네스가 조심스레 말했다.
“그러니까 제 말은 왕자님께서 너무 완벽하셔서 왕자님을 따르는 하인들이 꽤 버겁다는…….”
“어쨌든 왕자님은 주변 사람들에겐 꽤 엄격하고 자주 웃지는 않는다는 거지?”
루네스는 잽싸게 말했다.
“네! 제 말이 그거예요. 그러고 보니 그때 왕자님이 호텔을 떠나시기 전에 왕자비님을 진심으로 바라보시는 것 같아서 좋았어요. 새삼 왕자님께서 이제 마음을 많이 놓으실 것 같다는 생각도 들었고요.”
“마음을 놓으신다고?”
“무엇보다 왕자비님께서 잘 견뎌 주고 계시잖아요. 왕자님 주변에 왕자비님같이 오래 견디는 분은 없었거든요.”
발레린은 할 말이 많았지만 입을 꾹 닫았다. 발레린이 가만히 있자 루네스는 주변을 둘러보고는 물었다.
“그럼 왕자비님, 혹시 더 필요한 것은 없으신가요? 정말 괜찮으시고요?”
발레린이 밝은 얼굴로 고개를 끄덕이자 루네스가 차분히 말했다.
“그럼 우선 제가 보좌관님께 왕자비님의 음식에 독이 있었다고 말할게요.”
“신경 써 줘서 고마워, 루네스.”
“제가 당연히 해야 하는걸요. 그럼 편히 쉬세요. 만약 몸이 안 좋으시면 바로 부르시고요.”
발레린은 밝은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루네스는 나가기 전까지 걱정스러운 얼굴로 보다가 곧 방을 나갔다.
순식간에 주변이 조용해졌다. 그때 문득 그로프가 말했다.
“주인님.”
발레린이 눈을 맞추자 그로프가 얌전히 말을 이었다.
“제 생각에는 왕자가 아무래도 이상한 것 같습니다.”
“뭐가?”
“주인님께 왕자는 예민하게 굴지 않고 오히려 주인님의 의견을 존중해 주지 않았습니까?”
“그렇긴 해.”
“그리고 이상하게 주인님께 자주 웃기도 했고요.”
발레린은 그게 가장 이해가 가지 않았다. 이전에 제르딘은 그렇게까지 웃지 않았다.
“그때 내가 왕자님께 먼저 입을 맞춰서 부작용이 심해진 걸까?”
“설마 그렇겠습니까? 그리고 만약 그게 부작용이라면 부작용이라고 할 것도 없지 않습니까? 오히려 왕자는 자주 웃어서 얼굴이 더 좋아 보이지 않습니까?”
“그렇긴 한데…….”
발레린은 순간 자신을 생각했다. 제르딘을 생각하고 보기만 해도 웃음이 나오던 때가 있었다. 지금은 그를 피곤하게 만들고 싶지 않아서 자제하기는 하지만, 그래도 여전히 제르딘이 잘된 모습을 생각하면 마음이 벅차면서 절로 웃음이 나왔다.
발레린은 눈을 동그랗게 뜬 채 그로프를 쳐다봤다.
“그로프, 설마 왕자님이 나를 좋아하는 걸까?”
그로프는 입을 떡 벌렸다. 발레린은 흥분해서 빠르게 말을 이었다.
“그러고 보면 왕자님은 이전과 다르잖아. 전에는 그렇게까지 웃지도 않았고…….”
발레린은 잠시 말을 멈췄다. 이내 발레린은 어깨를 축 늘어뜨렸다.
“아니야. 왕자님은 나를 ‘피곤하다’고 생각하시는데 좋아할 리가 없지. 거기다가 왕자님은 나 같은 사람이 아니라 평범한 사람과 아이를 낳겠다고 했으니.”
발레린은 다시 마음을 접었다.
“그래도 주인님 같은 사람은 없을 겁니다. 주인님처럼 독기를 제 의지대로 조절하는 사람이 어디 있겠습니까?”
발레린은 냉큼 고개를 끄덕였다.
“그건 그래. 나 같은 사람은 나밖에 없잖아.”
이내 발레린은 벽에 걸린 보랏빛 드레스를 멍하니 바라봤다. 옆에는 그로프가 다가와 조잘조잘 이야기를 건넸다.
“그러니 주인님, 이제는 더 기대를 하지 않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어쨌든 왕자는 제가 보기에는 이상한 사람 같으니까요.”
발레린은 고개를 내려 그로프를 쳐다봤다.
“그로프, 왕자님이 그렇게 이상해?”
“네, 주인님이 왕실 도서관에서 잠들었을 때 우연히 왕자와 이야기를 나눴는데 이상했습니다. 당최 어떤 사람인지 판단할 수도 없었고요.”
“하지만 왕자님은 내겐 최선을 다해서 배려해 준 것 같아. 같이 계약을 나눈 사람으로서 말이야.”
“그렇긴 합니다.”
발레린은 다시 보랏빛 드레스를 보았다. 그렇게 멍하니 기분을 삭이던 중이었다. 별안간 발레린은 크게 하품했다. 분명 아까 낮잠을 잤는데도 피곤했다.
발레린은 무의식적으로 일어나 침대에 누웠다.
늦은 밤, 제르딘은 여전히 자지도 못하고 서류를 보고 있었다. 배도스 공작이 받아들인 다른 왕국의 청혼서였다.
왕국의 이름부터 들어 보지 못한 허구의 왕국이었다. 거기다 대놓고 왕자의 인장까지 찍혀 있었다. 명백히 조작된 서류였지만 제르딘은 화도 나지 않았다. 오히려 이렇게까지 움직인 배도스 공작이 우스울 뿐이었다.
제르딘은 의자에 등을 기댄 채 달력을 확인했다. 그러고 보면 이젠 부작용도 거의 느껴지지 않았다. 그때 꿈처럼 발레린의 입술이 닿은 후부터 그랬다.
제르딘은 곧바로 의사를 불렀다. 잠시 후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리더니 의사가 들어왔다. 그는 제르딘을 보자마자 고개를 숙였다.
“원래 이맘때쯤이면 간헐적으로 심장이 아팠는데, 이제 아프지 않고 오히려 상쾌해.”
의사가 다가오자 제르딘은 팔을 내밀었다. 의사는 제르딘의 팔을 잠시 살피다가 천천히 놓았다.
“이전에 본 불순한 피 섞임은 느껴지지 않습니다.”
제르딘이 피식 웃었다.
“그럼 그동안 남아 있던 부작용이 다 사라졌다는 말인가?”
“저도 의아하긴 하지만 지금 상태로선 그렇습니다. 혹시 저희가 처방해 드린 약 외에 다른 약을 드신 게 있습니까?”
제르딘은 꿈처럼 느껴졌던 초록빛 입술을 떠올렸다.
“혹시 독성분이 내 몸에 있는 부작용 요소를 없애 줄 수도 있는 건가?”
“저희도 정확히 알지는 못하지만 상성이 맞는 독이 있다면 그것도 아예 불가능한 이야기는 아닙니다. 독으로 다른 병을 치료한 사례도 있으니까요.”
제르딘은 실제로 결혼식 이후에 간혹 나타나던 부작용이 거의 나타나지 않았다. 보름달이 뜰 때 가장 강하게 나타나긴 했지만 그때도 그렇게 심한 증상은 아니었다.
제르딘은 골똘히 생각에 빠지며 중얼거렸다.
“그럼 그때 입맞춤이 나를 완전히 치료한 건가.”
의사는 황급히 물었다.
“입맞춤이요?”
제르딘은 고개를 내저었다.
“아니, 그냥 한 말이야.”
의사가 고개를 갸웃거리자 제르딘이 물었다.
“지금 이런 상태가 계속되면 이젠 부작용을 겪지 않는다는 말인가?”
“아직 확언할 수 없으니 지켜봐야 할 것 같습니다. 일시적으로 나타나는 현상일 수도 있으니까요.”
그때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울렸다.
“들어와.”
곧바로 문이 열리더니 보좌관이 급히 다가왔다.
“왕자님, 왕자비님께서 독을 먹고 지금까지 의식이 없다고 합니다.”
제르딘은 어이가 없어서 말이 나오지 않았다. 배도스 공작이 여태껏 대놓고 왕궁에서 회의를 할 땐 일부러 참아 줬다. 먼저 치는 것보다는 반격하는 게 더 효과적일 것 같아서였다. 어쨌든 배도스 공작이 어떻게 나오든지 곧 마지막이 될 테니까.
그러나 상황을 보면 배도스 공작은 과욕을 부리고 있었다. 조만간 낭떠러지에 떨어질 것을 알아서 그런지.
“감히 발레린을 건들다니.”
제르딘은 속에서 올라오는 화를 겨우 참고 다시 물었다.
“의식이 없다고?”
보좌관이 거의 울듯이 고개를 끄덕이자 제르딘은 곧바로 의자에서 일어났다. 그는 의사에게 눈짓하며 집무실을 나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