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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록빛 저주의 공녀님-89화 (89/130)

89화

헬릭스는 주변을 스윽 둘러보다가 이내 심드렁한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그럼 전 가 볼게요. 여긴 영 분위기가 안 좋네요.”

“공자님!”

막 문을 나서려던 헬릭스가 고개를 돌렸다. 루티스 백작은 급히 다가오며 빠르게 말했다.

“그럼 배도스 공작님께서 연을 끊는다고 하셔도 발레린 공녀를 좋아하실 겁니까?”

“못 할 게 뭡니까? 어차피 제 영혼은 이미 발레린에게 향했는데.”

“공자님, 정말 안 될 일입니다. 아니, 배도스 공작님께서 그렇게 나오시면 공자님은 편히 사실 것 같습니까? 지금 공자님이 누리는 모든 것은 배도스 공작님이 힘쓰신 겁니다. 그 덕분에 편하게 사시는 겁니다.”

“어차피 아버지가 물려준 삶은 재미없었습니다. 차라리 저는 발레린을 좋아하면서 사는 지금이 훨씬 행복하고요.”

“그게 오래가지는 못할 겁니다. 공자님께서는 전에도 이런 적이 있지 않습니까?”

“그때는 그때고 지금은 지금입니다. 그리고 지금은 그때와 다르고요. 제가 이렇게까지 책을 볼 줄 누가 알았겠습니까?”

헬릭스는 실실 웃으며 책을 펼쳤다. 루티스 백작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말했다.

“만약 공자님이 배도스 공작님이 물려주신 것을 모두 포기하고 발레린 공녀에게 간다면 공녀가 좋아할까요?”

“그게 무슨 말입니까?”

“그저 좋아하는 마음 가지고는 사람의 마음을 얻을 수 없습니다. 어쨌든 발레린 공녀도 이익과 실을 모두 따지는 사람일 테니까요.”

“제가 본 발레린은 달랐습니다.”

“아니요. 탑 안에 오래 갇혀 있었긴 해도 발레린 공녀는 보통 사람이 아닙니다.”

“그걸 어떻게 아십니까?”

“왕정 회의 때 발레린 공녀를 내쫓기 위해서 불렀는데, 오히려 발레린 공녀는 원로원 귀족들에게도 좋은 인상을 심어 주며 왕자비다운 면모를 보여 줬습니다.”

“그럼 더 좋은 것 아닙니까?”

“아니요. 그만큼 발레린 공녀는 보통이 아니라는 겁니다.”

“백작님, 제가 본 발레린은 순수하고 밝은 사람이었습니다.”

“물론 겉으로는 그렇게 보이겠지요. 하지만 사람을 단편적으로 보면 나중에 뒤통수를 맞을 수 있습니다. 그리고 무엇보다 발레린 공녀는 배도스 공작님이 가장 내치고 싶어 하는 사람이고요.”

헬릭스의 얼굴이 단숨에 일그러졌다.

“제게 이렇게 충격적인 사실을 말해 주는 이유가 뭡니까? 아까도 엿들으면서 마음이 안 좋았는데.”

“배도스 공작님을 누구보다 잘 아시지 않습니까?”

“그래서요?”

“그러니 제발 발레린 공녀와 결혼하겠다는 이상한 말씀을 배도스 공작님께 하지 않았으면 합니다.”

“그건…….”

“아무리 공자님이셔도 이번만은 배도스 공작님도 가만히 있지 않으실 겁니다.”

루티스 백작은 고개를 숙이곤 먼저 방을 나갔다. 헬릭스는 심드렁한 얼굴로 닫힌 문을 바라보았다.

15. 살벌한 독기

햇빛이 스멀스멀 잦아들고 해가 져 갈 때쯤, 발레린은 그동안 편히 자지 못한 잠을 자다가 일어났다. 창문에는 소소한 바람이 살랑살랑 불어왔다. 그때 배가 꼬르륵 울렸다. 그러고 보니 음식을 제대로 먹지 못했다.

순간 발레린은 제르딘을 떠올렸다. 그러고 보니 제르딘과 같이 식사한 지도 꽤 오래 지났다. 호텔에서도 그와 함께 먹지 못하고 방을 나와야 했고, 동굴에서도 제대로 된 식사는 아니었다.

그러나 생각해 보면 제르딘과 같이 식사하는 것은 발레린의 욕심이었다. 어차피 그가 먹는 것은 정해져 있었고 발레린이 먹는 음식도 그가 좋아하는 음식이 아니었으니까.

그동안 발레린과 같이 식사한 것만 해도 제르딘은 엄청나게 배려한 것이나 다름없었다. 실제로 늑대 수인은 일반적인 음식 냄새를 맡으면 구역질이 난다고 했다.

그때 또다시 배에서 꾸르륵 소리가 울렸다. 옆에서 쳐다보던 그로프도 개꿀개꿀 울었다.

“그로프, 너도 배고프니?”

“네, 오랜만에 왕궁에서 주는 귀뚜라미를 먹고 싶습니다.”

발레린은 설렁줄을 당기려고 침대에서 일어났다. 그때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울렸다. 발레린은 활기차게 외쳤다.

“들어와.”

그 말이 끝나자마자 문이 열렸다. 루네스와 눈이 마주치자 발레린은 가볍게 말했다.

“루네스, 저녁 좀 준비해 줄래?”

“지금이요?”

“배가 고파서.”

옆에 있던 그로프도 개꿀개꿀 울었다. 루네스는 잠시 멈칫하며 그로프를 쳐다보다가 발레린을 보았다.

“다른 거 필요하신 건 없나요?”

발레린이 고개를 내젓자 루네스가 고개를 끄덕이며 활기차게 말했다.

“그럼 곧바로 저녁을 준비해서 올게요.”

몇 분 후 루네스가 다시 방으로 들어왔다. 꽤 푸짐한 음식이었다. 루네스가 귀뚜라미가 담긴 상자를 탁자에 두었다. 귀뚜라미에겐 밀가루 같은 분말이 뿌려져 있었다.

발레린이 호기심 있게 보자 루네스가 말했다.

“보충제예요. 동굴에 갇혀 있기도 했고, 가끔 이런 걸 섭취해 줘야 개구리가 더 튼튼해질 수 있다고 하더라고요.”

“고마워, 루네스. 난 이런 걸 한 번도 생각하지 못했는데.”

“아니에요! 제가 오히려 미리 챙겨야 했는걸요.”

발레린은 그로프를 보았다. 그로프는 입꼬리를 올리며 발레린을 바라봤다.

“주인님, 저는 사실 저런 보충제를 먹지 않아도 괜찮습니다.”

“정말?”

“네, 어차피 주인님의 독기로 살기 때문에 특별하게 섭취하지 않아도 튼튼합니다.”

“그래도 내가 챙겨 주지 못해서 미안해.”

“아닙니다. 어차피 전 튼튼한걸요.”

그 말을 들어도 발레린은 그로프를 많이 생각해 주지 않은 것이 걸렸다. 그동안 그로프가 먹는 보충제가 있는지도 모르고 살았다.

발레린이 마음을 쓰며 그로프를 보는 사이 루네스가 조심스레 말했다.

“왕자비님, 음식 다 식겠어요.”

그제야 발레린은 포크를 들었다. 루네스는 발레린을 잠시 지켜보다가 말했다.

“왕자비님, 더 필요한 게 있으시면 부르세요.”

발레린이 고개를 끄덕이자 루네스는 인사를 하곤 방을 나갔다. 마침 음식에는 상큼한 냄새가 스쳤다. 바나나 향과 복숭아 향이 뒤섞인 향이었다.

발레린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그로프, 여기에 독이 든 것 같은데.”

“그럼 곧바로 하인에게 알려야 하지 않습니까?”

발레린은 고개를 내저었다.

“어차피 난 독을 먹어도 괜찮잖아. 안 그래도 요즘 독이 먹고 싶기도 했고.”

“하지만 주인님은 왕자비님 아니십니까? 이 음식에 독을 넣었다면 명백히 주인님을 해하려는 무리의 움직임 같습니다.”

발레린은 곧바로 배도스 공작을 떠올렸다. 하지만 지금 상황에 독이라니.

“아무리 생각해도 이상해.”

“뭐가 말입니까?”

“내가 독에 강한 건 누구보다 잘 알 텐데 왜 하수 같은 짓을 하는 거지?”

“헬릭스가 멍청하니 배도스 공작도 멍청한 것 아닙니까?”

발레린은 잠시 생각하다가 음식을 보았다. 유독 발레린이 좋아하는 향이 강하게 났다. 발레린은 절로 웃음이 나왔다.

“이렇게 맛있게 향을 배합해서 줬으니 먹어 줘야겠지.”

어차피 독을 먹어도 멀쩡하니 발레린은 거리낌 없었다. 거기다 독 냄새가 나니 맛도 꿀맛이었다. 그래서 그런지 먹는 속도가 무척 빨랐다.

그렇게 한참 발레린이 음식을 먹는 사이 별안간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울렸다.

“들어와.”

곧 문이 열렸다. 발레린이 고개를 들자 뜻밖의 사람이 서 있었다.

“보좌관님?”

“피곤하지는 않으십니까?”

“네, 아까 낮잠도 자서요.”

“다행입니다. 그나저나…….”

주변을 보던 보좌관이 순간 멈칫했다. 그는 탁자 위에 있는 음식을 보고는 표정이 살짝 굳었다. 그의 태도에 발레린은 의아해서 물었다.

“혹시 무슨 일 있나요?”

“무슨 일은 아니고 벌써 저녁을 드시고 계실 줄은 몰랐습니다.”

“배가 너무 고파서요. 낮잠 잔다고 점심도 제대로 못 먹었거든요.”

보좌관은 난처한 듯 고개를 끄덕였다. 발레린은 아까부터 보좌관의 태도가 신경 쓰여 물었다.

“무슨 일로 오셨나요?”

보좌관은 잠시 망설이는 듯하다가 말했다.

“사실 왕자님께서 같이 저녁을 들자고 하셔서…….”

발레린은 포크를 놓았다.

“저 얼마 먹지 않았는데…….”

그러나 발레린의 그릇은 거의 다 비워져 있었다. 보좌관은 어색하게 미소를 지었다.

“이미 거의 다 드신 것 같은데 너무 그렇게 배려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미리 말씀해 주시면 좋았을 텐데…….”

“저희도 갑자기 시간이 나서요.”

“그럼 전에는 왕자님께서 음식을 드실 시간도 없었나요?”

“최근에 꽤 바빠져서 왕자님께서 제대로 식사하실 시간이 없긴 했습니다.”

발레린은 그 말을 듣고 마음이 더 쓰였다. 발레린이 시무룩한 얼굴로 있는 사이 보좌관이 급히 말했다.

“그럼 저는 가 보겠습니다.”

발레린이 미처 말하기도 전에 보좌관은 문을 닫고 나갔다. 발레린이 닫힌 문을 보고 있는 사이 그로프가 말했다.

“주인님, 너무 마음 쓰지 마십시오. 어차피 왕자는 주인님과 같이 있는 것을 피곤해하는 사람 아니었습니까?”

발레린은 포크를 완전히 놓았다.

“그렇긴 하지만 왕자님께서 나를 꽤 많이 배려해 주는 것 같아서.”

“…….”

“나는 그게 더 미안해. 괜히 그렇게 생각해 주지 않으셔도 되는데.”

“하지만 왕자는 그다지 불편하지 않다고 말하지 않았습니까?”

발레린은 골똘히 생각에 잠겼다.

“그러고 보면 왕자님 태도가 묘하게 변한 것 같은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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