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8화
헬릭스는 한숨을 내쉰 뒤 심드렁한 눈빛으로 배도스 공작을 쳐다봤다.
“발레린 공녀와 결혼하고 싶다고요.”
“이놈이! 발레린 공녀야말로 우리 앞길을 막는 사람이야!”
“아니요. 발레린 공녀만큼 열심히 사는 사람이 없을 거예요. 하인들 이야기를 들어 보면 며칠 쉬지도 않고 곧바로 왕궁에 오기도 했고…….”
“제정신이냐?”
“아버지, 제가 술을 아무리 먹어도 늘 머리는 멀쩡합니다. 머릿속에 들어간 건 별로 없지만.”
헬릭스는 제 말에 피식 웃었다. 배도스 공작의 얼굴이 더 붉어지려던 찰나 루티스 백작이 잽싸게 말했다.
“공자님, 잠시 나가 있는 게 나을 것 같습니다.”
헬릭스는 배도스 공작을 스윽 보고는 책을 챙기고 나갔다. 그의 걸음은 귀찮은 구석이라도 있는지 느릿했다.
헬릭스가 나가자마자 루티스 백작이 몸을 돌렸다. 그는 여전히 화를 참지 못하는 배도스 공작에게 조심스레 말했다.
“지금 공자님이 잠에서 덜 깨신 것 같습니다. 안경을 쓰고 책을 가져오는 걸 보면 말입니다.”
“멍청한 놈. 그래도 할 말이 있지. 결혼?”
주변에 있던 귀족들이 배도스 공작의 눈치를 보았다. 루티스 백작이 조심스레 쳐다보자 배도스 공작은 의자에 앉으며 주위를 둘러봤다. 그는 굳은 얼굴로 목을 가다듬더니 입을 열었다.
“우선 가장 중요한 것은 발레린 공녀를 없애는 겁니다.”
모두들 고개를 끄덕이며 가만히 들었다. 배도스 공작은 고개를 빳빳이 든 채 말을 이었다.
“안 그래도 이번에 왕자가 단단히 벼르고 있는 것 같으니 우선 발레린 공녀를 없애고 사병 문제를 다시 가져오는 게 맞을 듯싶습니다.”
그 말이 끝나자마자 겔렌트 남작이 감탄하듯 내뱉었다.
“맞습니다. 역시 배도스 공작님의 의견은 깔끔하고 빈틈이 없습니다.”
주변에 있던 귀족들은 모두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때 루티스 백작이 조심스레 물었다.
“그런데 발레린 공녀를 어떻게 없애실 겁니까? 독이란 독은 안 통할 듯싶은데.”
“맞습니다. 발레린 공녀와 함께 있는 독 개구리도 그 공녀가 살려서 같이 데리고 다닌다고 하지 않았습니까?”
“그러니까요. 아주 지독합니다. 어떻게 그런 저주를 받았는지. 생각만 해도 불쾌합니다.”
“그래도 방법이 아주 없지는 않습니다.”
배도스 공작의 말에 주변에 있던 귀족들이 귀를 쫑긋 세웠다. 배도스 공작은 주변을 차분히 둘러본 뒤 침착하게 입을 열었다.
“발레린 공녀는 독이 온몸에 퍼지는 저주를 받았습니다. 이런 저주를 받은 사람은 대체로 몸에 있는 독보다 강한 독을 주입당하면 죽게 되지요.”
“하지만 발레린 공녀의 독은 웬만한 독보다 강하다고 들었는데요.”
“그 하녀장이 죽었을 때 기억하십니까?”
“헤르틴 하녀장 말씀하시는 겁니까?”
“그렇습니다. 헤르틴 하녀장을 죽인 독은 발레린 공녀가 지니고 있는 독보다 더 강력합니다.”
“그렇다면 그 독으로 발레린을 죽일 수 있다는 겁니까?”
배도스 공작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주변에 있던 귀족들은 서로 눈치를 보며 입을 닫았다. 배도스 공작은 입꼬리를 살짝 올리며 차분히 말했다.
“발레린 공녀는 저주를 받은 사람일 뿐입니다. 거기다 왕자 곁에서 자꾸만 일을 그르치고 우릴 거슬리게 만들고 있죠.”
“그러고 보니 발레린 공녀가 온 이후로 왕자가 많이 달라진 것 같지 않습니까?”
“맞습니다. 확실히 사르티아 공작과 원로원 귀족이 뜻을 실어 주니 저희 쪽도 꽤 난감하고요.”
배도스 공작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그러니 이제나마 완벽하게 다시 힘을 돌려세워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때 어느 귀족이 말했다.
“그렇긴 합니다만 제가 요즘 발레린 공녀에 대한 이상한 소리를 들었습니다.”
배도스 공작은 눈썹을 살짝 올리며 말했다.
“이상한 소리요?”
“발레린 공녀가 이제는 독기를 의지대로 조절할 수 있어서 방독면을 벗고 다닌다고 들었습니다.”
그 말에 주변에 있던 귀족들이 고개를 끄덕이며 동조했다. 가만히 지켜보던 배도스 공작은 큰 소리로 외쳤다.
“그러니까 발레린 공녀가 이 왕국을 다 삼키기 전에 저희가 더 나서야 하는 겁니다. 언제까지나 왕자 뒤에 있을 수는 없지 않겠습니까?”
“그럼 발레린 공녀를 없앤 뒤에는 왕자를…….”
배도스 공작이 입꼬리를 비열하게 올렸다.
“왕자는 굳이 제 손으로 죽일 필요는 없습니다. 어차피 발레린 공녀와 주변 세력을 치면 왕자도 별수 없을 겁니다.”
“하지만 왕자는 만만한 대상이 아닙니다. 저희가 아무리 주변 세력을 제거해도 꿋꿋하게 권력을 가지고 있지 않습니까?”
“그렇긴 합니다만 황금 마검도 찾지 못하고 피 검사도 받지 못하니 왕이 될 자격이나 있겠습니까?”
“…….”
“거기다가 아직 서약서를 대신전에 제출하지 않아 백성들에게 결혼으로 사기까지 쳤는데 왕자가 그 자리에 가만히 있겠습니까?”
그때 루티스 백작이 환한 얼굴로 끼어들었다.
“그럼 마지막에는 그 왕국에서 온 청혼서로 왕자를 치실 겁니까?”
배도스 공작이 미소를 지은 채 고개를 끄덕였다. 루티스 백작은 감탄하듯 내뱉었다.
“역시 배도스 공작님은 나설 때를 정말 잘 아시는 분입니다. 확실히 발레린 공녀를 제거한 뒤에 왕자를 치는 게 순서가 맞는 것 같습니다.”
배도스 공작은 고개를 끄덕인 뒤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럼 이만 일어나는 게 좋겠습니다. 회의를 오랫동안 했으니까요.”
그 말에 주변에 있던 귀족들은 서둘러 일어났다. 배도스 공작은 먼저 대회의실을 나섰다. 그가 나가니 문 옆에 헬릭스가 서 있었다.
배도스 공작은 헬릭스를 휙 지나치고서 복도를 걸어갔다. 루티스 백작은 배도스 공작을 잠시 보다가 겔렌트 남작에게 말했다.
“자네가 대신 배도스 공작님께 가 보게. 나는 헬릭스 공자님과 이야기 좀 하고 갈 테니.”
겔렌트 남작은 고개를 끄덕인 뒤 먼저 나섰다. 헬릭스는 루티스 백작을 힐끗 보더니 고개를 살짝 기울였다.
“저에게 할 이야기가 있으시다고요?”
루티스 백작은 고개를 끄덕인 뒤 근처에 있는 작은 회의실로 헬릭스를 데려왔다. 문이 닫히자마자 루티스 백작이 물었다.
“그나저나 왜 여기서 기다리고 계셨던 겁니까?”
“무슨 이야기를 하나 궁금해서요.”
“들으셨습니까?”
헬릭스가 피식 웃었다.
“다 들리던데요.”
“그럼 배도스 공작님께서 어떤 계획으로 움직이실지 잘 아시겠군요.”
“그런데 너무하지 않습니까? 아무리 왕 자리가 탐난다고 해도 발레린 공녀까지 없앤다는 건 말이 되지 않습니다.”
“말이 안 되는 건 없습니다. 지금 누구보다 배도스 공작님께 해가 되는 쪽은 발레린 공녀니까요.”
“발레린 공녀가 아버지께 무슨 해를 입혔다는 말씀입니까?”
“여태껏 배도스 공작님이 어떻게 이 왕궁에서 버티셨는지 모르십니까?”
헬릭스는 지루한 표정으로 고개를 돌렸다.
“아버지야 왕족이면서 왕좌에서 밀려나신 분 아닙니까?”
“그러니까 이제라도 배도스 공작님이 그 자리를 찾으려고 하시는 겁니다.”
“솔직히 저는 관심 없습니다. 왕이니 뭐니, 머리만 아프고.”
헬릭스는 귀를 휘적거리며 눈썹을 찌푸렸다. 그러다 그는 뭔가 마음에 안 드는지 냅다 소리쳤다.
“아버지는 욕심이 너무 많으십니다. 이미 밀려났으면서 그 나이에 다시 차지하려고 하니까 자식 된 입장에서 너무 과하다고요.”
루티스 백작은 답답한 마음을 겨우 참고서 말했다.
“공자님, 그래도 배도스 공작님의 하나뿐인 아들이 아니십니까?”
“그렇긴 하지만 저는 아버지만큼 머리가 굴러가지 않아서요. 이 책도 겨우 읽고 있거든요.”
헬릭스는 제 손에 든 책을 보여 주었다. 책의 제목은 『꽃을 피우는 법』이었다. 루티스 백작은 제목을 보고는 고개를 내저었다.
“이런 책은 왜 읽는 겁니까?”
“꽃이 어떻게 피는지도 몰랐으니 이제야 배우는 겁니다.”
“지금은 이런 책보다는…….”
“그나저나 제게 할 이야기가 뭡니까? 저한테 어떤 책을 읽어야 할지 말하려고 여기까지 저를 가둔 건 아닌 것 같은데.”
그 말에 루티스 백작이 당황하며 외쳤다.
“가두다니요?”
“그럼 대체 저를 왜 이곳까지 데려온 겁니까? 저는 그냥 대충 엿듣고 가려고 했는데.”
루티스 백작은 한숨을 내쉬었다. 그러고는 천천히 입을 열었다.
“발레린 공녀와 결혼하고 싶다는 건 농담이시죠?”
“농담 아닌데요.”
“예?”
“농담 아니라고요.”
“하지만 공자님, 발레린 공녀는 이미 왕자와 결혼식까지 치르고……”
“아는데, 사람 마음이 쉽게 접어지지는 않으니까요.”
헬릭스는 오히려 입꼬리를 올렸다. 그는 피식거리며 책을 움켜쥐었다.
“공자님.”
“…….”
“공자님!”
갑자기 크게 울린 소리에 헬릭스가 어깨를 움찔거리자 루티스 백작이 빠르게 말했다.
“그건 절대 안 될 일입니다! 지금 배도스 공작님께서 얼마나 애를 쓰고 계시는데 발레린 공녀와 결혼이라니요?”
“그럼 그 마음을 접으라는 말입니까?”
“네, 당연히 접어야 합니다.”
“싫은데요.”
“네?”
“아무리 아버지가 반대하셔도 저는 발레린을 좋아할 건데요.”
헬릭스는 웃으며 루티스 백작을 쳐다봤다. 루티스 백작은 눈을 동그랗게 뜬 채 바라보기만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