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7화
“그럼 그냥 가만히 있는 겁니까?”
발레린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우리는 반격할 기회나 노리는 게 낫겠어.”
“하지만 지금 배도스 공작이 무슨 일을 꾸밀지 모르지 않습니까?”
“아마 조만간 일을 꾸며서 보여 줄 것 같아. 요즘 그 사람들이 바쁘다고 하니까.”
그로프는 골똘히 생각하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귀족 회의가 열리는 대회의실은 시장 바닥처럼 시끄러웠다.
“지금 왕자가 저희를 죽이는 겁니다!”
루티스 백작이 피를 토하듯 외쳤다. 옆에 있던 겔렌트 남작도 고개를 끄덕이며 거들었다.
“맞습니다. 귀족의 사병을 모두 축소하라니요. 이건 저희의 안전을 위협하는 행위입니다.”
“배도스 공작님, 아무래도 청혼서를 다시 검토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주변에서는 큼큼거리는 기침 소리만 들릴 뿐, 다들 먼저 말을 꺼내지 않았다. 루티스 백작은 배도스 공작을 돌아봤다.
배도스 공작은 입을 꾹 다문 채 서류를 뒤적거리고 있었다. 루티스 백작은 잠시 배도스 공작을 보다가 그에게 자그맣게 속삭였다.
“저주를 받은 공녀이긴 하지만 공녀와의 결혼 서약서를 대신전에 제출하지 않았으니 이건 엄연하게 온 왕국 사람을 모욕하는 행위입니다.”
그 말을 듣고서 배도스 공작이 고개를 들었다.
“그렇긴 하지만 지금 그걸 들고 일어났다간 자칫 내가 왕족의 권위를 무시하고 제멋대로 청혼서를 받았다는 말이 돌 수 있으니 신중하게 하는 게 좋지.”
“하지만 공작님께서 그 왕국의 청혼서를 받으신 이유가 지금 왕자를 몰아내기…….”
“무슨 이야기를 그렇게 속닥이는가?”
난데없는 목소리에 루티스 백작이 깜짝 놀라며 고개를 들었다. 세드릭스 공작이었다. 원로원 귀족 중에서도 세력이 강한 귀족이었다. 그는 배도스 공작을 보며 말했다.
“나는 참고로 왕자님의 말씀이 다 맞는다고 생각하네.”
그 말에 반발하듯 루티스 백작이 외쳤다.
“그럼 모든 귀족들은 지금 가지고 있는 사병을 모두 축소하라는 말씀이 옳다고 생각하십니까?”
“그러네.”
“그렇게 되면 영지를 지키는 병사들도 줄어들어서 변방에 있는 귀족들은 제 안위를 제대로 지킬 수도 없을 겁니다.”
“그래서 왕자님께서 왕실 친위대를 보강한다고 하시지 않는가?”
“왕실 친위대를 보강하면…….”
“그것도 일리가 있는 말씀입니다.”
갑자기 끼어든 말에 루티스 백작은 놀란 눈으로 고개를 돌렸다. 배도스 공작은 천천히 말을 이었다.
“세드릭스 공작님 말씀대로 왕실 친위대를 보강하면 확실히 왕국의 위상이 높아질 수는 있을 겁니다.”
옆에 있는 루티스 백작과 겔렌트 남작이 배도스 공작의 눈치를 보았다. 배도스 공작은 그들을 낮은 시선으로 본 뒤 말했다.
“그럼 이번 귀족 회의는 왕자님이 말씀하신 사병 축소를 받아들이는 쪽으로 결론을 내겠습니다.”
그 말에 루티스 백작과 겔렌트 남작은 눈을 동그랗게 떴고 나머지 원로원 귀족들은 고개를 끄덕이며 일어났다.
“이번에는 생각보다 일찍 결론이 났군.”
원로원 귀족들은 모두 자리에서 일어났다. 주변에 있던 다른 귀족들도 배도스 공작에게 인사를 하고 대회의실을 빠져나갔다.
반은 여전히 자리에 앉아 있었는데 배도스 공작과 관련된 귀족들뿐이었다.
원로원 귀족과 여러 귀족들이 나가자마자 루티스 백작이 당황한 목소리로 말했다.
“배도스 공작님, 사병을 축소하는 건 저희를 죽이는 일입니다. 그런데 이렇게 간단하게 하시면…….”
“원로원 귀족이 저렇게 나오는 마당이니 대충 들어주는 척하면서 빨리 끝내는 게 맞아.”
“하지만 공작님께서 왕자님의 의견을 받아들인다고 했으니 뒤집으면 곤란해지는 것 아닙니까?”
배도스 공작은 비열하게 입꼬리를 올렸다.
“그건 나중에 알아서 우리 뜻대로 고치면 되는 거지.”
“고치다니요?”
“어차피 지금은 원로원 귀족들에게 별말 없이 조용히 지내야 해. 안 그래도 지금 왕자가 사르티아 공작은 물론 세드릭스 공작까지 포섭해 함께 일을 꾸미고 있는 것 같은데 괜히 나서 봤자 반감만 사겠지.”
“그런데 대체 세드릭스 공작은 왜 그렇게 생각이 바뀐 겁니까?”
“세드릭스 부인이 발레린 공녀를 만나 한참 동안 설득된 것 같더군. 그래서 세드릭스 공작도 부인의 말대로 그렇게 들어주는 거고.”
“아니, 탑 안에 15년 동안 갇혔던 공녀가 뭐가 대단하다고 그렇게 감싸 주는 겁니까?”
“그 공녀가 힘들게 살아온 이야기를 열심히 했나 보더군. 그래서 세드릭스 부인까지 그렇게 나서 주는 거고.”
루티스 백작은 어이없는 듯 웃었다. 배도스 공작은 탁자를 툭툭 치며 날카로운 목소리로 말했다.
“가만 보면 발레린 공녀가 심상치 않아.”
그때 겔렌트 남작이 끼어들었다.
“그렇긴 합니다. 내쫓으려고 왕정 회의에까지 불러왔는데 오히려 원로원의 다른 귀족들에게 좋게 보이지 않았습니까?”
“그러니까 더 문제라는 거야. 계속 놔두다간 우리가 할 일을 다 그르칠 판이야.”
“탑 안에 갇혀 있어서 멍청할 줄 알았는데 의외로 제 살길을 찾는 것 같았습니다. 웬만한 독살에도 죽지 않으니까요.”
그때 문이 벌컥 열렸다. 배도스 공작의 눈길이 날카롭게 나갔다. 그는 들어온 사람을 보자마자 소리쳤다.
“어딜 갔다가 또 이제 오는 것이냐!”
헬릭스는 안경을 살짝 올린 채 탁자 앞에 앉았다. 그는 가져온 책을 탁자에 둔 채 배도스 공작을 쳐다봤다.
“책에 빠져서 잠시 잊고 있었습니다.”
배도스 공작은 어이없는 얼굴로 헬릭스를 쳐다봤다. 헬릭스는 두꺼운 책을 펼치고는 글을 읽어 내려갔다. 배도스 공작은 할 말을 잃은 채 헬릭스를 쳐다봤다.
옆에 있던 루티스 백작이 급히 물었다.
“공자님, 이제 공부하기로 마음먹으신 겁니까?”
“공부라기보다는 누군가를 닮고 싶어서요.”
“누구요?”
“있습니다. 제 마음속의 그분.”
헬릭스는 비죽 웃고는 책 종이를 이리저리 훑었다. 배도스 공작의 얼굴이 점점 일그러졌다.
“너는 하라고 할 땐 안 하더니 이제야 책을 읽는 것이냐?”
헬릭스는 옅은 한숨을 내쉰 뒤 고개를 들었다.
“아버지, 사람이 모두 해야 할 때가 있는 겁니다. 저는 이제야 책에 눈을 붙이고 있는 거고요.”
“이놈이 달린 입이라고 함부로 지껄이지? 허구한 날 술이나 먹고 네 방에서 자지도 않으니 그렇게 된 것 아니냐!”
배도스 공작이 일어나려고 하자 루티스 백작이 겨우 배도스 공작의 팔을 잡았다. 배도스 공작은 여전히 헬릭스를 날카롭게 쳐다봤다.
“그런데 아버지는 아셨습니까?”
“뭘 말이냐!”
“노란 장미를 피우기 위해선 노란 물을 주는 게 아니라 그냥 물을 주는 거요.”
“그걸 여태껏 모르고 있었더냐?”
“저는 몰랐습니다. 아예 관심도 없어서요.”
배도스 공작의 손이 부들부들 떨렸다. 루티스 백작은 놀란 얼굴로 겨우 말했다.
“공작님, 고정하십시오. 원체 헬릭스 공자님께서 상상력이 풍부하시지 않습니까?”
루티스 백작이 말려도 배도스 공작의 눈빛은 부드러워지지 않았다. 오히려 그의 얼굴은 더욱 붉게 변했다.
“헬릭스, 네가 진정 헛것으로 공부를 했던 모양이구나. 그런 기본적인 상식조차 모르고 있으니. 대체 내가 여태껏 보낸 가정 교사는 뭘 했는지.”
헬릭스는 눈썹을 찌푸린 채 말했다.
“아버지가 보내 주신 가정 교사는 형편없었습니다. 공부하고자 하는 의지에 불을 붙여 주지 못했으니까요.”
“이놈이……!”
배도스 공작이 당장이라도 헬릭스에게 가려고 하자 루티스 백작이 앞을 가로막으며 우는소리를 냈다.
“공작님, 이제 공자님께서는 하나, 하나 알아 가는 단계이지 않습니까?”
“알아 가는 단계? 지금 나이가 몇 살인데, 어린애도 아니고!”
배도스 공작이 버럭 소리를 지르자 헬릭스는 귀를 무심하게 파고는 안경을 추켜세웠다. 루티스 백작은 뒤늦게 배도스 공작을 보며 말했다.
“그렇더라도 이제야 공자님께서 정신을 차리시고 책을 보는데 좋은 말씀이라도 해 주셔야 하지 않겠습니까?”
배도스 공작은 이글거리는 눈빛으로 헬릭스를 보다가 이내 자리에 주저앉았다. 그는 굳은 얼굴로 숨을 내쉬다가 나직하게 말했다.
“헬릭스, 내가 그동안 너를 많이 봐준 건 알고 있겠지?”
헬릭스는 대답하지 않고 책만 보았다. 배도스 공작은 신경 쓰지 않고 말을 이었다.
“그때 말한 것처럼 이젠 너도 우리 가문을 위해서 움직여야 할 거다.”
“제가요?”
“그럼 네가 움직여야지 누가 움직일 테냐!”
“다른 분도 있지 않나요? 여기 계신 분들도 있고.”
배도스 공작의 입술이 옅게 일그러졌다.
“다른 사람들도 움직이는데 너도 그만큼 움직여야 한다는 거다.”
“하지만 아버지, 저는 아직 그럴 만큼 머리가 돌아가지 않으니 멀었습니다.”
“멀기는, 넌 이미 결혼을 해야 할 나이다.”
“결혼이요?”
“여하튼 그렇다는 소리다. 그러니 내가 시키는 대로 하거라.”
“발레린 공녀를 없애라는 소리만 아니면 시키는 대로 하겠습니다.”
“뭐?”
“발레린 공녀와 결혼하고 싶으니까요.”
배도스 공작의 얼굴이 눈에 띄게 붉어졌다. 옆에 있던 루티스 백작은 화들짝 놀라며 배도스 공작에게 말했다.
“공작님, 공자님께서 단단히 착각을 하시고…….”
“너, 다시 말해 보거라. 뭐가 어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