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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록빛 저주의 공녀님-86화 (86/130)

86화

발레린은 제르딘을 묘하게 피하면서 문을 살짝 열었다.

“그럼 왕자님, 저는 가 볼게요.”

발레린은 빠르게 인사를 하곤 복도로 걸었다. 어깨 위에서 그로프가 중얼거렸다.

“왕자의 시선이 이전과 다른 것 같습니다.”

“다르다고?”

“네. 주인님을 보는 모습은 묘하게 풀린 것 같기도 하고요.”

“요즘 일이 잘 풀리셔서 그런지도 몰라.”

“정말 그럴까요?”

“아직 완전히 결과가 나오지는 않았지만 그래도 황금 마검에 대한 조사도 시작했고, 왕정 회의에서 꽤 잘 풀렸는지 모르지.”

그로프는 납득한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나저나 주인님, 루티스 백작과 겔렌트 남작은 어떻게 해야 할까요?”

“내 생각에는 둘 사이가 좋은 것 같으니 멀어지게 하면서 고립시키면 될 것 같은데, 우선 지켜보는 게 맞는 것 같아.”

곧바로 움직였다간 제르딘만 위험할 수 있었다. 거기다 발레린도 왕자비이니 조심할 필요가 있었다. 제르딘이 어떤 일을 꾸미는지 모르겠지만 발레린은 그래도 제르딘이 제대로 할 거라고 믿었다.

그는 지금까지 훌륭하게 일을 처리해 왔으니까. 그러니 배도스 공작의 몰락도 뻔한 일이었다.

그렇게 발레린은 상상력을 펼치다가 왕이 된 제르딘을 상상하며 기쁜 얼굴로 침실로 걸어갔다. 중간중간에 하인들이 발레린을 보고는 황급히 고개를 숙였다.

발레린은 미소를 지으며 그들에게 일일이 인사를 해 주었다. 몇몇은 당황한 듯했고 몇몇은 어색하게 웃으며 발레린을 보았다.

침실에 도착하자 발레린은 활짝 핀 얼굴로 들어갔다. 발레린은 곧바로 탁자 앞에 앉았다. 그래도 적을 알아야 앞으로 일어날 일에 대비할 수 있었다.

발레린은 곧바로 루티스 백작과 겔렌트 남작에 대해 적기 시작했다. 하지만 발레린의 손은 얼마 가지 않아 멈췄다. 아는 게 없어서였다. 그로프는 발레린을 물끄러미 보다가 물었다.

“주인님.”

꽤 진지한 목소리에 발레린이 그로프를 보자 그로프가 고개를 기울이며 조심스레 물었다.

“이렇게 해서 배도스 공작이 물러나면 주인님께서는 왕궁을 나가셔야 할 텐데 괜찮습니까?”

발레린은 고개를 끄덕였다.

“이제는 정말 괜찮아. 그동안 왕자님께 내가 피곤한 존재였으니 지금부터는 왕자님께 도움이 되고 싶어. 그리고 이렇게 해서라도 왕자님이 조금은 편해지셨으면 좋겠고.”

발레린은 배도스 공작이 몰락해서 제르딘이 편하게 왕궁에서 살았으면 했다. 더는 왕궁을 지긋지긋하게 여기지 않고 그저 셀렌디 공원에서 본 것처럼 평화로운 나날을 보내며 말이다.

그러다 발레린은 깃펜을 종이에 툭툭 쳤다.

“그런데 두 귀족에 대해선 아는 게 없어서 문제야.”

발레린이 조금밖에 채워지지 않은 종이를 보고 있을 때였다. 순간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울렸다. 발레린은 여전히 종이를 보며 외쳤다.

“들어와.”

문이 열리고 루네스와 함께 여러 하인이 들어왔다. 그들은 발레린의 짐을 정리하기 시작했다. 일이 끝나자 하인들은 고개를 숙인 뒤 방을 나갔다.

마지막으로 루네스가 주변을 둘러본 뒤 발레린에게 물었다.

“왕자비님, 필요하신 건 없나요?”

발레린은 마침 궁금한 것이 있었기에 루네스에게 물었다.

“루네스, 루티스 백작과 겔렌트 남작이 어떤 사람인지 말해 줄 수 있어?”

“두 분은 왜요?”

“아무래도 두 사람은 배도스 공작의 측근이니 잘 알아둘 필요가 있을 것 같아서.”

그 말에 루네스는 눈을 동그랗게 뜬 채 발레린을 쳐다봤다.

“역시 왕자비님이세요!”

“두 사람이 친한 건 아는데 서로에게 어떤 관계인지 알아?”

루네스는 잠시 생각하는가 싶더니 입을 열었다.

“루티스 백작님이 겔렌트 남작님을 꽤 많이 아끼시는 것으로 알아요. 그리고 겔렌트 남작님은 다른 귀족들에겐 친절히 대하면서 하인들에겐 생각하지 않고 내뱉는 경향이 있어요.”

“그럼 겔렌트 남작에 대해 안 좋은 소문이 꽤 있을 것 같은데.”

“겔렌트 남작님은 하인들 사이에 꽤 유명해요. 그저 바빠서 인사를 빨리 하고 갔는데 그와 관련된 하인을 불러서 제대로 인사하라고 말하곤 징계를 내렸다니까요.”

“왕족도 아닌데 그렇게까지 했다고? 심지어 겔렌트 남작은 하인들을 관리하는 사람도 아니잖아.”

“그렇긴 해요. 그런데 겔렌트 남작님 뒤에는 배도스 공작님이 있으니 다들 입을 닫고 있는 거죠.”

발레린은 그 소리를 듣자 더 화가 났다. 실상 왕궁에 있는 하인들은 모두 왕족이 부리는 사람이었고, 그들에게 함부로 징계를 내리는 것은 월권이었다.

발레린의 표정이 풀어지지 않자 루네스가 나직이 말했다.

“그런데 이런 이야기가 새어 나가면 곧바로 불려가니까 숨기는 거예요. 하인들끼리는 어떤 걸 보고 들었는지 아니까요.”

“그럼 하인들 사이에도 배도스 공작과 관련된 사람이 꽤 있겠네.”

“맞아요. 그것 때문에 서로 힘들어도 말을 제대로 하지 못해요. 저도 사실 겔렌트 남작님과 배도스 공작님의 관계는 최근에 안 거예요. 이전에는 그저 까다로운 귀족인 줄 알았거든요.”

발레린이 고개를 끄덕이자 루네스는 덧붙이듯 말했다.

“확실히 배도스 공작님이 모든 일의 원흉이에요. 왕자비님 아니었으면 저는 이런 사실까지는 몰랐을 거예요. 그나마 왕자비님께서 제 눈을 뜨게 하신 거죠.”

루네스는 발레린을 보며 눈을 빛냈다. 발레린은 곰곰이 생각하다가 물었다.

“혹시 최근에도 겔렌트 남작이 까다롭게 군 적 있어?”

“요즘에는 꽤 조용해요. 너무 바빠서 그런 것 같기도 하고.”

“바쁘다고?”

“그러고 보면 대회의실에 불이 꺼지지 않는다는 말을 듣긴 들었는데…….”

“대회의실이면 귀족들이 회의하는 곳 아니야?”

“맞아요. 왕정 회의도 열리긴 하지만 요즘은 귀족 회의가 툭하면 열린다고 하더라고요.”

“무슨 일을 꾸미고 있는 건가.”

그러고 보면 제르딘은 지금 무척이나 바빴다. 호텔에서 언뜻 들은 내용으로는 배도스 공작에 대한 일을 하는 것처럼 보이기도 했다. 그렇다면 배도스 공작이 모를 리가 없었다.

발레린이 가만히 생각하는 사이 루네스가 조심스레 물었다.

“왕자비님, 제가 할 일은 없을까요?”

발레린은 곰곰이 생각하다가 루네스를 쳐다봤다.

“루네스, 혹시 네가 소문을 흘리면 바로 위험해지겠지?”

“아마도 작정하고 찾으면 그럴걸요? 겔렌트 남작이 그런 소문에 무척이나 예민하게 반응하시는 분이에요. 그분에 대한 안 좋은 소문이 있으면 곧바로 조사에 착수할 만큼이요.”

“그래서 그런 소문은 없어진 거야?”

“거의 들어갔어요. 그리고 그런 분들 때문에 하인들도 함부로 소문을 입에 담지 않고요.”

발레린은 여전히 왕궁에 떠도는 제르딘에 대한 소문을 생각했다. 배도스 공작의 측근에게 흠이 될 소문이 조금이라도 퍼지면 그렇게 빨리 조사하는데, 제르딘의 소문은 여전히 존재하고 계속 퍼지고 있었다.

“왕자님에 대한 안 좋은 소문은 조사하지 않는 거야? 여전히 나쁜 소문이 많잖아.”

“그것도 조사하긴 하지만 왕자님에 대한 소문은 항상 빠르게 퍼져서요. 왕자님도 이젠 그다지 신경을 쓰시지 않는 것 같기도 하고요.”

“…….”

“그러고 보면 최근에 왕자님이 소문을 신경 쓰신 적 있는데 왕자비님에 대한 소문이었어요. 두 분 사이가 안 좋다는 소문인데 말도 안 되는 소리죠.”

그 말에 발레린은 더 마음이 쓰였다. 제르딘은 온갖 나쁜 소문에 시달리면서도 발레린에 대한 소문은 신경 써 주었다.

발레린은 속에서 올라오는 화를 꾹 누르고 말했다.

“그럼 결과적으로 왕자님의 소문보다는 배도스 공작 측근의 소문이 빠르게 없어지고 퍼지지도 않는다는 거네.”

“맞아요.”

“그 소문을 누구보다 관리하는 사람은 겔렌트 남작이고?”

“그럴 거예요. 유난히 겔렌트 남작님이 소문에 민감하시더라고요. 게다가 소문에 관련된 사람을 무척이나 잘 잡아서 다들 입도 열지 않고요.”

“그리고 왕궁에는 여전히 배도스 공작을 뒤에 둔 하인들이 있고?”

루네스는 고개를 끄덕였다. 발레린은 책에서 보던 상황이 눈앞에 있으니 얼떨떨하면서도 흥미로웠다.

『천년 왕국사』에서도 지지 기반을 제대로 형성하지 못한 왕족은 여러 귀족에게 계속 공격을 받으며 나중에는 권력이 빼앗겨서 허수아비 왕이 된다고 했었다.

그리고 대체로 그런 왕국의 역사는 결말이 좋지 못했다. 온갖 비리의 온상지로 권력을 탐하려는 사람만 모여들어서 왕궁이 시장 바닥과 다름없게 변했다.

만약 제르딘의 권력이 배도스 공작에게 모두 넘어간다면 왕국의 운명은 더 힘들어질 것이다. 그동안 『천년 왕국사』에서 숱하게 봐 온 것이기에 발레린은 생각이 많아졌다.

발레린이 곰곰이 생각에 잠겨 있는 사이 루네스가 주변을 둘러봤다.

“그나저나 왕자비님, 더 필요한 것은 없으신가요?”

발레린은 고개를 끄덕였다. 루네스는 잠시 눈치를 보다가 방을 나갔다. 문이 닫히는 소리가 울리고 주변이 삽시간에 조용해졌다.

그때 그로프가 말했다.

“주인님, 어떻게 하실 생각이십니까?”

“지금은 보좌관님 말대로 가만히 있는 게 낫겠어.”

“왜요?”

“뭘 해도 배도스 공작의 표적이 되니까 지금 나서면 위험할 것 같아. 내가 잘못 나섰다간 왕자님도 곤란해질 수 있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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