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5화
어느덧 마차는 왕궁에 도착했다. 하인들은 바쁘게 짐을 내렸고 발레린은 곧바로 방으로 올라갔다. 발레린은 방에 들어오자마자 짐 가방을 뒤져서 종이를 꺼냈다. 호텔에서 앞으로 할 일의 목록을 적은 것이었다.
1. 황금 마검 찾기
2. 감히 왕자님을 모욕한 루티스 백작과 겔렌트 남작을 치기
3. 배도스 공작 몰락하게 하기
4. 왕자님의 멋진 왕위 계승식☆☆☆
그중에서 발레린은 황금 마검 찾기에 줄을 벅벅 긁었다.
“우선 황금 마검은 조사관이 찾으니 기다리면 될 거고 이제 할 일은 루티스 백작과 겔렌트 남작을 치는 거네.”
“어떻게 치는 겁니까?”
발레린은 곰곰이 생각하다가 말했다.
“우선 보좌관님께 말해야겠어. 두 사람이 왕궁 뒤에서 왕자님을 모욕했다고.”
발레린은 곧바로 일어났다. 제르딘의 보좌관은 제르딘의 집무실 근처에서 일을 하고 있었다. 그로프가 놀란 눈으로 발레린을 쳐다봤다.
“어디 가시는 겁니까?”
“보좌관님께 가려고.”
발레린이 손을 내밀자 그로프는 냉큼 손 위로 올라왔다. 발레린은 문을 열고 복도를 나섰다. 막 계단을 내려가려던 찰나였다. 마침 보좌관이 발레린이 있는 쪽으로 올라오고 있었다.
“보좌관님!”
발레린이 활기차게 부르자 보좌관이 놀란 얼굴로 고개를 들었다. 발레린은 서둘러 보좌관에게 다가갔다. 보좌관은 당황한 얼굴로 발레린에게 인사를 했다.
“안 그래도 왕자비님께 가던 찰나였습니다.”
“저에게요?”
“네, 왕자님께서 왕자비님이 도착하신 것 같으니 찾아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왕자님이 직접 오시지 않고요?”
“지금 왕정 회의에 들어가셔서요. 그나저나 몸이 불편하지는 않으십니까? 왕자님께 들었는데 발목을 다치셨다고 들었습니다.”
발레린은 밝은 얼굴로 발목을 이리저리 움직였다.
“이제 전혀 안 아파요. 그때 안 사실인데 독을 먹으니까 몸이 스스로 회복을 하더라고요.”
보좌관의 얼굴이 약간은 당황한 듯 보였다. 발레린이 밝은 얼굴로 보자 그는 애써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혹시 필요하신 게 있으면 언제든지 저를 통해 말씀하시거나…….”
“왕자님을 모욕한 사람들에 대해서 말할 게 있는데요.”
“왕자님을 모욕했다고요?”
발레린은 고개를 끄덕였다. 보좌관은 굳은 얼굴로 주변을 둘러보다가 빠르게 말했다.
“그럼 잠깐 왕자님 집무실로 가시겠습니까?”
“왕자님 집무실이요?”
“네, 왕자님 일이기도 하니 집무실로 안내해 드리겠습니다.”
발레린은 거절하지 않고 고개를 끄덕였다. 제르딘의 집무실은 침실이 있는 층보다 위층에 있었다.
오랜만에 방문한 집무실에 발레린은 잠시 주변을 둘러보다가 천천히 탁자 앞에 앉았다.
보좌관은 진지한 눈빛으로 물었다.
“왕자님을 모욕한 이가 누구입니까?”
“루티스 백작과 겔렌트 남작이에요.”
보좌관은 그다지 놀라는 얼굴은 아니었다.
“그분들은 배도스 공작님과 가까우니 그럴 만합니다.”
“그럼 곧바로 왕자님을 모욕한 데 대한 징계를 내려야 하지 않나요?”
“하지만 배도스 공작님이 가까이 있으니 그런 절차도 마땅하지 않습니다.”
“왜요?”
“두 분을 건드리는 것은 배도스 공작님의 세력에 대한 노골적인 대항으로 볼 수 있어서, 왕자님이 지금 직접적으로 움직이시기는 많이 곤란합니다.”
발레린은 잠시 할 말을 잃었다.
“하지만 왕자님을 모욕하는 말을 제가 직접 들었는데요.”
보좌관은 굳은 얼굴로 있다가 조심스레 말했다.
“왕자비님, 정말 죄송하지만 왕자비님께서도 이 일에 엮이시면 많이 곤란하실 겁니다.”
“제가요?”
“네, 안 그래도 왕자님께 들었습니다. 배도스 공작이 왕자비님까지 건드리면서 침실에 뱀을 풀었다고요.”
“하지만 결과적으로 봤을 땐 무사했어요. 그로프가 놀라긴 했지만.”
발레린은 그로프를 살짝 쳐다봤다. 그로프는 발레린을 보고 눈을 깜빡이며 말했다.
“전 괜찮습니다. 주인님.”
발레린은 그로프를 살짝 만져 주곤 보좌관에게 고개를 돌렸다. 보좌관은 잠시 생각하는가 싶더니 침착하게 말했다.
“그리고 왕자님의 입장도 사실 난처하긴 합니다.”
“왜요?”
“지금 여러 사건이 얽혀 있어서 조심스러운 상황입니다.”
보좌관은 깊은 이야기를 꺼내기는 어려운 듯 더 말하지 않았다. 발레린이 계속 쳐다봤지만 보좌관은 눈을 피하며 고개를 숙였다.
“왕자님이 직접 나서시면 왕자님의 입장이 많이 곤란해진다는 건가요?”
보좌관은 약간은 미안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습니다. 지금 왕자님께서 하시는 일이 있어서 일부러 가만히 계시는 것이기도 합니다.”
“그럼 만약에 그 두 분이 왕자님을 모욕하지 않고 다른 하인들이 모욕한다면 지금과 같지는 않겠죠?”
“루티스 백작과 겔렌트 남작이 아니고 일반 하인이었다면 곧바로 감옥행입니다.”
“그럼 루티스 백작과 겔렌트 남작은 고작 배도스 공작의 측근이라는 이유로 함부로 내치지 못하는 거고요?”
보좌관은 한 박자 쉬었다가 난처한 얼굴로 말했다.
“……그렇습니다.”
발레린은 그 말을 듣고 잠시 어안이 벙벙했다. 어딘가 익숙했다.
‘『천년 왕국사』에서도 이런 일이 있었던 것 같은데.’
그때 그로프가 옆에서 작게 속삭였다.
“주인님, 그래도 이건 너무하지 않습니까?”
발레린은 고개를 끄덕였다. 『천년 왕국사』에서 본 게 어렴풋이 기억이 났다. 고위급 귀족이 죄를 저질러도 함부로 대하지 못해서 영지 사람들이 무척이나 힘들었다고 했었다.
발레린은 아무리 생각해도 이해가 되지 않아 다시 물었다.
“그런데 루티스 백작과 겔렌트 남작은 왕자님을 모욕한 거잖아요. 다른 죄도 아니고 왕족을 모욕한 건데.”
“만약 그것을 증명하려면 증인이 필요한데 왕자비님이 나서게 되면 아무래도 왕자님 입장도 곤란해집니다.”
발레린은 델프스 호텔에서 들은 내용을 생각했다.
“지금 왕자님이 벼르고 계신 일 때문인가요?”
보좌관이 조심스레 고개를 끄덕였다. 발레린은 답답한 상황에 더는 말이 나오지 않았다. 그저 제르딘만 생각하자니 주위가 꽤 더러웠다. 그럼에도 제르딘이 직접 나설 수 없는 상황에 안타까울 뿐이었다.
“왕자님은 이런 상황을 많이 겪으셨겠죠?”
“이런 일이 아예 없지는 않았습니다. 예전부터 배도스 공작이 왕자님을 많이 위협했으니까요.”
그 말을 듣자 발레린은 더 신경 쓰였다.
‘왕자님은 이걸 어떻게 견딘 걸까.’
지독한 한숨이 나올 무렵 보좌관이 말했다.
“그분들이 그렇게 말한 걸 어디서 들으셨습니까?”
“왕자님의 궁 뒤쪽이요. 그곳은 하인들이 잘 다니지 않아서 잡초도 꽤 있더라고요.”
“그럼 앞으로 그쪽을 조금 더 청소하라고 지시하겠습니다. 기사들에게도 주변 통제를 잘하라고 시키고요.”
“그런다 해도 그 사람들은 서로 몰래 만날 거예요.”
“그렇긴 합니다. 그래도 앞으로 그럴 여지를 주지 않는 게 중요하니까요.”
발레린은 답답하긴 했지만 고개를 끄덕였다. 지금은 제르딘을 위해서 움직이는 게 맞았다.
발레린은 속에서 나오는 한숨을 겨우 삼키고 시계를 확인했다. 시간이 꽤 많이 지났다. 더 오래 있다간 보좌관에게도 미안해질 것 같아 발레린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저는 이만 가 볼게요.”
그 말에 보좌관이 단번에 몸을 일으켰다.
“왕자비님, 죄송합니다. 제가 이런 말씀밖에 해 드릴 수 없어서요.”
“아니에요. 왕자님이 위험하신데 신중하게 행동해야죠.”
발레린은 빙긋 웃었다. 보좌관은 발레린을 살피다가 조심스레 물었다.
“괜찮으시죠?”
“뭐가요?”
“아무래도 왕자비님께서 가장 마음이 안 좋으실 것 같아서요. 왕자님을 향한 모욕을 들으셨으니.”
“그런데 왕자님이 나서시면 위험하다고 하니 할 수 없죠. 차라리 저한테 그런 말을 하면 그냥 넘길 수 있었을 텐데.”
발레린이 작게 중얼거리자 보좌관은 난처한 듯 발레린의 눈치를 보았다. 발레린은 그나마 보좌관이 최선을 다해서 말해 준 것 같아 활기차게 말했다.
“그래도 제게 자세히 말씀해 주셔서 감사해요. 비록 왕자님이 정확히 무슨 일을 하고 계시는지는 알 수 없지만.”
“죄송합니다. 저희도 어쩔 수 없어서…….”
“아니에요. 괜히 제가 알아서 난처할 일이면 말을 안 하는 게 맞는 거죠. 그럼 전 이만 가 볼게요.”
발레린은 예법에 맞춰 인사를 하곤 문 쪽으로 걸어갔다. 막 문을 열려던 찰나였다. 벌컥 문이 열리더니 익숙한 얼굴이 보였다.
“왕자님?”
제르딘은 발레린을 보자마자 단숨에 표정을 풀었다.
“공녀가 여기에 웬일입니까?”
발레린은 순간 뒤를 힐끗 돌아봤다. 보좌관은 난처한 듯 고개를 숙였다. 괜히 제르딘이 알아봤자 그의 신경만 거스를 것 같아 발레린은 곧바로 다른 말을 내뱉었다.
“그냥 인사하러 왔어요. 여기 도착했다고요.”
“제가 보좌관을 보냈는데 공녀께서 여기까지 오셨다고요?”
제르딘은 부드럽게 말했지만 은근히 집요한 구석이 있었다. 발레린은 잠시 머리를 굴리다가 황급히 대답했다.
“궁에 대해서 물어볼 게 있어서요. 생각보다 궁이 넓고 좋더라고요.”
발레린이 밝게 웃으며 아무 말이나 하자 제르딘은 대답은 하지 않고 발레린을 물끄러미 바라봤다. 제르딘의 표정은 전과 다르게 살짝 풀리긴 해서 그의 눈빛이 이제는 차갑게 느껴지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