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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록빛 저주의 공녀님-84화 (84/130)

84화

“이제 내가 할 일이 그건 것 같아. 어차피 왕자님께서는 처음부터 내게 감정을 줄 수 없다고 했으니 이젠 왕자님께 기대를 하면 안 될 것 같고, 왕자님을 최대한 도와 드려야지.”

“그럼 그때 말씀하신 것처럼 루티스 백작과 겔렌트 남작을 먼저 내치실 겁니까?”

발레린은 고개를 끄덕였다.

“책에서 본 대로 하면 괜찮을 것 같아. 물론 어떻게 될지는 장담하지 못하지만.”

“그래도 잘될 겁니다. 만약 처음에 잘 안 되더라도 주인님이 하시는 일은 늘 끝이 좋지 않았습니까?”

“그렇긴 해도 항상 긴장을 놓치면 안 될 것 같아. 우리가 있는 곳은 궁이니까.”

“그러고 보면 그 사람들 때문에 주인님께서 난처할 뻔하지 않았습니까?”

“나보다는 그로프 네가 많이 다쳤잖아. 다행히 왕자님 덕분에 능력을 내 의지대로 사용할 수 있어서 망정이지, 그때 잘못됐다면…….”

발레린은 차마 말을 더 잇지 못했다. 이제 발레린에게 그로프가 없는 삶은 상상하기도 싫은 암흑이었다.

유일하게 탑 안에서 발레린 곁에 있어 준 생물이었고, 발레린이 힘들 때마다 말 상대가 되어 주었다. 유일하게 발레린의 마음속을 잘 알고 있는 독 개구리이기도 했다.

“주인님, 그래도 저는 지금 멀쩡하지 않습니까?”

발레린은 고개를 끄덕이며 그로프를 보았다.

“그로프, 네가 있어서 다행이야.”

“저도 주인님이 곁에 있어서 다행입니다.”

발레린은 미소를 지으며 그로프와 눈을 맞췄다.

마차는 얼마 지나지 않아 호텔 앞에 도착했다. 마침 발레린이 내리니 여러 사람이 마차 앞에 서 있었다. 그중에는 제르딘도 있었다.

발레린은 마차에서 내리자마자 제르딘에게 다가갔다. 제르딘은 보좌관과 이야기를 나누다가 문득 고개를 돌렸다. 그는 발레린을 보자마자 입꼬리를 올렸다.

발레린은 제르딘의 표정에 잠시 의아해하다가 이내 입을 열었다.

“왕자님, 어디 가시나요?”

“바빠서 먼저 왕궁으로 가려고 합니다.”

“지금 가신다고요?”

“네, 안 그래도 공녀에게 말하고 가고 싶었는데.”

제르딘의 눈빛은 꽤 생생했다. 발레린은 어제부터 그가 묘하게 들떠 보이는 것 같아 신경 쓰였다.

‘설마 내가 먼저 입을 맞춰서 그러는 건가.’

그 생각을 하자마자 발레린의 얼굴이 붉게 물들었다. 제르딘은 발레린의 얼굴을 보다가 가까이 오며 세심히 살폈다.

“공녀, 괜찮습니까?”

갑자기 가까이 들리는 목소리에 발레린은 깜짝 놀라 고개를 들었다. 순간 하늘빛 눈동자와 마주치자 발레린은 주춤 뒤로 물러났다.

제르딘의 얼굴이 살짝 굳었다. 발레린은 당황한 나머지 말이 빠르게 나갔다.

“전 괜찮아요.”

하지만 제르딘은 그 자리에 선 채 발레린에게 시선을 떼지 않았다. 발레린이 인사를 하려고 지나치려 하자 제르딘이 말했다.

“저와 함께 왕궁에 가시겠습니까?”

“지금요?”

제르딘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때 보좌관이 제르딘에게 달려와서 무언가 속삭였다. 제르딘은 얼굴을 단숨에 굳힌 채 날카롭게 말했다.

“그 일은 미리 끝내라고 했을 텐데.”

“죄송합니다. 저희도 그렇게 될 줄 모르고…….”

“어차피 왕궁으로 돌아가면 해결될 일이니 거기서 해결하면 돼.”

“그나저나 이곳에서 조금만 쉬다 가시면 안 되겠습니까? 어차피 왕정 회의는 내일로 미루면 되는…….”

“내일로 미루면 온갖 일이 다 밀릴 텐데?”

“하지만 왕자님, 지금 왕자님의 몸 상태로는 무리입니다. 잠도 제대로 못 주무셨으니…….”

“마차에서 잠깐 눈 붙이면 돼. 그렇게 호들갑 떨 필요 없다고.”

제르딘이 낮은 목소리로 말하자 보좌관은 황급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때 제르딘이 발레린을 보았다. 안 그래도 제르딘의 얼굴은 조금 피곤해 보였다.

발레린은 잠시 생각하다가 이내 입을 열었다.

“왕자님, 저는 따로 갈게요.”

안 그래도 피곤한 상황에 발레린은 그를 더 귀찮게 하고 싶지 않았다. 제르딘은 발레린을 잠시 보다가 천천히 말했다.

“굳이 저를 배려해 줄 필요는 없는데.”

발레린이 놀란 눈으로 보자 제르딘이 고개를 내저었다.

“아닙니다. 공녀께서 그렇게 생각하시니 제가 따라야죠. 그럼 전 가 보겠습니다.”

제르딘이 마차에 타자마자 마차는 빠르게 출발했다. 주변에 있던 하인들은 재빠르게 고개를 숙였다. 발레린은 달려가는 마차를 잠시 바라봤다. 주변에는 흙먼지가 강하게 일었지만 발레린은 눈을 한 번도 깜빡하지 않았다.

“잠도 제대로 못 주무셨다니.”

발레린은 제르딘 생각뿐이었다. 한참 제르딘을 생각하던 중 별안간 발레린은 눈을 동그랗게 뜬 채 그로프를 쳐다봤다.

“설마, 그로프. 우리가 밤늦게 동굴에서 한 이야기를 왕자님이 다 들은 건 아니겠지?”

“설마요. 모기 소리같이 작게 말하지 않았습니까?”

“그렇긴 한데…….”

발레린이 멍하게 길을 보는 사이 루네스가 눈을 가늘게 뜬 채 다가왔다.

“왕자비님?”

발레린이 고개를 돌리자 루네스가 흙먼지에 눈을 비비며 말했다.

“왕자비님, 혹시 이곳에 며칠 더 계실 예정인가요?”

“나도 곧 떠나려고. 어차피 이곳의 황금 마검은 모두 조사관이 조사하고 왕자님도 왕궁으로 돌아가셨으니까.”

“그럼 짐을 싸서 마차에 실어 놓을까요?”

루네스는 여전히 눈을 가늘게 뜨며 눈을 비볐다. 발레린은 고개를 끄덕이며 루네스를 걱정스레 살폈다.

“그런데 루네스, 눈은 왜 그렇게 비벼? 혹시 어디 아파?”

“아, 흙먼지 때문에요. 왕자비님은 괜찮으세요? 아까 흙먼지가 심했잖아요.”

“난 괜찮아.”

오히려 발레린의 몸에는 독기가 흘러서 흙먼지가 사르륵 녹았다.

루네스는 이렇게 흙먼지가 많이 날리는데도 아무렇지 않은 발레린을 신기한 듯 쳐다봤다. 하지만 발레린은 오히려 루네스가 걱정이 되었다. 심지어 루네스는 눈물까지 찔끔 흘렸다.

발레린이 여전히 얼굴을 빤히 살피자 루네스가 웃으며 말했다.

“왕자비님, 전 괜찮아요. 가끔 흙먼지가 심할 때 이렇거든요.”

발레린이 그나마 납득하며 고개를 끄덕이자 루네스는 발레린을 호텔로 안내했다. 발레린의 걸음은 느릿하고 가벼웠다.

루네스는 발레린의 걸음을 따라가며 아까 있었던 일을 떠올렸다.

“요즘 왕자님이 예전에 보지 못한 행동을 많이 하시는 것 같아요.”

왕자라는 말에 발레린의 얼굴은 대번에 루네스에게 돌아갔다.

“무슨 행동?”

“예전 같으면 왕자님께서는 절대로 먼저 마차에 같이 타자고 하지 않으셨어요. 그런데 오늘은 왕자비님께 먼저 말씀하시고.”

그러고 보면 제르딘은 원래 혼자 마차를 타는 사람이었다. 처음에 발레린이 탑을 벗어날 때 제르딘이 양보해 준 사항이기도 했다.

발레린이 말을 하기도 전에 루네스가 감탄하며 말했다.

“역시 왕자비님이시니 왕자님께서 많이 생각해 주시는 것 같아요.”

“그런데 원래 왕자님은 남을 잘 생각해 주시는 분 아니야? 꼭 내가 왕자비가 아니더라도 말이야.”

“아니에요! 왕자님께서 얼마나 예민하시고 차가우신데요. 특히 보름달 뜨는 날쯤 되면 왕자님의 궁에 있는 사람들은 알아서 몸을 사려야 할 정도로 성격이 무척 예민해지세요. 그리고 이전에는 지금만큼 웃지도 않으셨어요.”

“…….”

“저는 왕자님께서 왕자비님을 보실 때 미소를 지으셔서 얼마나 놀랐는지 몰라요. 어쨌든 왕자님께서도 왕자비님을 제대로 아시는 거죠.”

“뭘?”

“왕자비님이 누구보다 뛰어나고 좋은 분이란 걸요.”

그 말에 발레린은 절로 미소가 나왔다. 어깨 위에 있는 그로프도 개꿀개꿀 울면서 말했다.

“맞습니다. 주인님만 한 사람은 이곳에 없을 겁니다.”

계속되는 추앙에 발레린은 기분이 좋아져 절로 걸음이 빨라졌다. 루네스가 약간 뒤처지고 나서야 발레린은 멈춰 서서 루네스를 기다려 주었다.

루네스가 거의 도착하자 발레린이 밝게 말했다.

“루네스, 이제 이렇게 올라오는 것도 오늘이 끝이야.”

“그러게요. 그나마 왕궁은 층수가 별로 없어서 다행이에요.”

루네스는 진심으로 말하는 듯 진지한 어투였다.

발레린이 호텔을 출발한 시간은 정확히 정오였다. 점심은 간단한 샌드위치를 먹었고 그로프도 나름대로 만족스러운 식사를 마친 뒤였다.

돌아가는 마차 안에서 발레린은 아쉬운 듯 풍경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특히 셀렌디 공원에는 지나가는 남녀가 무척이나 많았다. 문득 발레린은 제르딘을 떠올렸다.

제르딘이 바쁘지만 않았다면 공원을 같이 산책했을 수도 있었다. 하지만 다르게 생각하면 그것 자체가 그에겐 피곤하고 귀찮은 일일 수도 있었다. 그 생각을 하자 발레린은 고개를 돌려 그로프를 쳐다봤다.

그로프는 멀뚱멀뚱 밖을 쳐다보고 있었다. 그러다 천천히 발레린을 바라봤다. 발레린은 의지를 다지듯 말했다.

“그로프, 왕궁으로 돌아가면 배도스 공작의 몰락에만 신경 쓰자.”

“전 주인님께서 하시는 모든 일에 그저 따르겠습니다.”

“어쨌든 왕자님껜 그게 가장 중요한 일이니까.”

“맞습니다.”

발레린은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인 뒤 다시 마차 창밖을 바라봤다. 아까와 다르게 발레린의 머릿속에는 앞으로 배도스 공작을 몰락시키기 위한 모든 방법이 둥둥 떠다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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