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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록빛 저주의 공녀님-79화 (79/130)

79화

한방에 있을 때는 제르딘이 있는지도 모르고 먼저 자는 날이 많았고 잠에서 깨면 제르딘은 항상 없었다.

하지만 지금은 제르딘이 옆에 있다는 게 실감이 났고 실제로 그가 있었다.

발레린은 슬쩍 제르딘을 쳐다봤다. 아까 제르딘의 검푸른 눈빛이 자꾸만 생각난 탓이었다. 거기다 입술 가까이 닿던 숨결도. 그 생각을 하자 발레린은 얼굴이 벌겋게 달아올랐다.

상상만 실컷 할 땐 언제고 막상 그런 상황이 오니 당황스러웠다.

발레린은 이중적인 자신의 생각에 속으로 한숨을 내쉬며 몸을 돌려 누웠다. 순간 발레린은 그로프와 눈이 마주쳤다. 그로프는 몸을 접착제처럼 바짝 붙이고서 발레린을 바라봤다.

발레린은 작게 속삭였다.

“그로프, 아직 안 잤어?”

“주인님께서 잠에 못 드시는 것 같아서요.”

“내 걱정은 하지 마. 낯선 곳이라 잠이 안 와서 그래.”

그로프가 발레린에게 가까이 다가와 속삭였다.

“그래도 아까 너무 많이 놀란 것 아닙니까?”

발레린은 옆을 슬쩍 돌아봤다. 캄캄해서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고 숨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순간 제르딘이 그곳에 있는가 싶었지만 발레린은 거기에서 생각을 멈추고 다시 그로프를 쳐다보며 속삭였다.

“그래도 왕자님이 원래대로 돌아오셨잖아.”

발레린은 그로프에게 미소를 지었다. 그로프는 발레린을 보며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주인님, 그래도 너무 위험하지 않습니까?”

“뭐가?”

“보름달이 뜨는 날에만 그런 부작용이 있다고 해도 이전에 그런 증상에 대해 주인님께 자세히 말했어야 합니다.”

발레린이 가만히 생각에 잠기자 그로프가 재빨리 말을 이었다.

“그러니까 그런 사람인데도 단순히 주인님을 위한답시고 같은 방을 쓴다고 했다는 건 아무래도…….”

“그로프, 왕자님께서 나를 생각해 주셔서 그런 거잖아. 주변 소문 때문에.”

“그렇긴 하지만 미리 말하지 않고 그저 놀라지 말라고만 한 건 이상합니다.”

“왕자님께서 그런 모습까지 다 말하기는 싫었을지 모르지.”

“그래도 같은 방을 쓴다면 먼저 말해야 하지 않았겠습니까? 언젠가는 주인님께서도 아실 텐데요.”

사실 발레린도 제르딘의 모습에 많이 놀라긴 했었다. 발레린이 말없이 가만히 있자 그로프가 작게 속삭였다.

“예전부터 생각했지만 왕자는 이상한 사람입니다. 당최 어떤 사람인지 짐작할 수도 없고요.”

그로프의 몸이 작게 발광했다. 그로프는 종종 밤마다 이렇게 발광했는데 주로 발레린의 의견에 동조하거나 화를 낼 때 몸에 밝은 빛이 났다.

“거기다 주인님께 선을 그을 때는 언제고 이제는 주인님을 빤히 보지를 않나, 웃지를 않나. 아주 이상한 사람입니다.”

발레린은 뒤를 힐끗 쳐다봤다. 여전히 어둠만 있을 뿐 제르딘은 보이지 않았다.

“어쨌든 주인님, 제가 제르딘을 잘 감시할 테니 주인님은 마음을 놓으십시오.”

발레린은 그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곤 작게 속삭였다.

“고마워, 그로프.”

“저는 주인님밖에 없으니 당연한 일인걸요.”

그로프가 입꼬리를 올렸다. 발레린은 그로프를 잠시 쓰다듬어 주다가 이내 그로프가 눈을 스르륵 감자 천장을 보며 누웠다.

천장은 어둠에 휩싸여 자세히 보이지는 않았다. 발레린은 멍하게 어둠을 응시하다가 언제쯤 이곳에 빠져나갈 수 있을지 생각했다.

‘조사관은 언제쯤 오는 걸까.’

제르딘이 있으니 언젠가는 올 텐데 그 사람들이 이곳을 찾을지도 의문이었다. 하지만 발레린은 거기서 생각을 멈추고 눈을 감았다. 어차피 걱정해 봤자 걱정만 늘 뿐이었다.

발레린이 눈을 떴을 땐 등불이 밝혀져 있었다.

“일어났습니까?”

생생한 목소리에 발레린은 벌떡 일어났다. 그 탓에 덮어 놓은 재킷이 단번에 떨어졌다. 발레린은 황급히 제르딘의 재킷을 주워서 곱게 개켰다. 그러곤 다가온 제르딘에게 내밀었다.

“잘 덮었어요.”

“춥지는 않았습니까?”

“덕분에 춥지 않았어요.”

발레린은 활짝 웃었다. 원래 추위를 잘 안 타기도 해서 발레린은 그다지 춥지 않았다. 다만 제르딘의 재킷 덕분에 따뜻하긴 했다.

제르딘은 발레린에게서 재킷을 받고는 짐을 모아 놓은 곳에 두었다. 그는 발레린을 돌아봤다.

“육포 드시겠습니까?”

“아니요, 괜찮아요. 저는 주변에 땅 파서 독 먹을게요.”

제르딘의 얼굴이 살짝 굳었다.

“괜찮으시겠습니까?”

“어제 독을 먹었는데도 지금 멀쩡한걸요. 거기다 발목까지 나았으니까요.”

“그럼 제가 모래를 파 드리겠습니다.”

그 말에 발레린은 벌떡 일어났다.

“아니요. 제가 파서 먹을게요. 괜히 저 때문에 왕자님이 고생하시는 건…….”

“이전에 자주 해 봐서 괜찮습니다.”

“자주 그렇게 해 봤다고요?”

제르딘은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곤 능숙하게 모래를 파내기 시작했다. 발레린이 뒤늦게 모래를 파내려 했지만 이미 모래는 꽤 깊이 파여 있었다.

발레린이 멍하게 보자 제르딘이 옆에서 말했다.

“안 그래도 공녀가 독을 먹고 싶어 할 것 같아서 미리 파 놓았습니다.”

새삼 발레린은 제르딘의 배려에 마음이 벅차올라 활짝 웃으며 말했다.

“고맙습니다. 왕자님. 역시 왕자님이세요.”

그러곤 발레린은 망설이지 않고 독을 퍼먹었다. 옆에선 그로프도 발레린이 퍼 준 독을 야금야금 먹었다.

제르딘은 주머니에서 탐지기를 꺼내서 살폈다. 발레린은 독을 어느 정도 먹고서 제르딘을 쳐다봤다. 그는 꽤 여유로워 보였다. 이곳이 제집처럼 자연스러워 보이기도 했다. 반면 발레린은 이 동굴이 그다지 마음에 들지 않았다.

탑 안처럼 아담한 느낌이라도 있으면 모를까 이곳은 너무나 넓어서 포근하지도 않았다. 발레린은 제르딘에게 조심스레 물었다.

“언제쯤 사람들이 저희를 찾으러 올까요?”

“왕실 친위대와 조사관이 조만간 도착할 겁니다.”

조만간이라는 말에 발레린은 마음이 다소 안정되는 듯했다. 문득 발레린은 제르딘이 어떻게 그들과 연락이 닿았는지 궁금했다.

어제 그의 주머니를 뒤졌을 땐 다른 것은 발견되지 않았었다. 발레린이 물끄러미 쳐다보자 제르딘이 눈을 맞추며 입꼬리를 올렸다.

“더 궁금한 게 있습니까?”

“왕실 친위대와 어떻게 연락이 닿았는지 궁금해서요.”

제르딘은 재킷을 들고 와서 황금빛 브로치를 보여 주었다.

“여기에 위치를 추적하는 마력이 깃들어 있습니다.”

발레린은 놀란 얼굴로 황금빛 브로치를 쳐다봤다. 창과 방패가 엇갈리는 모양으로 왕실을 상징하는 브로치였다.

“브로치에 그런 마력까지 깃들어 있는 줄은 몰랐어요.”

“왕실 일원만 극비로 알고 있는 사항입니다.”

“그런 걸 제게 알려 주셔도 되나요?”

“공녀는 왕자비 아닙니까?”

“하지만 전…….”

“그리고 공녀께도 조만간 이런 브로치가 주어질 겁니다.”

“제게도요?”

제르딘이 고개를 끄덕였다.

“원래 왕족이 외출할 땐 항상 이런 브로치를 지니고 다녀야 합니다. 그게 왕실 일원이라는 증명이니까요.”

“하지만 저는 한시적 관계잖아요.”

“배도스 공작이 몰락할 때까지는 유효합니다.”

제르딘의 목소리는 꽤 단호했다. 발레린은 더 말하지 않았다.

그때 웅성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왕자님!”

꽤 큰 목소리에 발레린은 서둘러 주변을 둘러봤다. 멀리서 사람들이 몰려오고 있었다. 발레린은 만세를 하며 이리저리 팔을 흔들었다.

“여기요!”

그제야 사람들이 발레린을 보고서 빠르게 달려왔다. 맨 먼저 보좌관이 제르딘 앞에 섰다. 그는 급하게 뛰어왔는지 잠시 고개를 숙이며 숨을 골랐다.

“왕자님, 죄송합니다. 저희가 이곳까지 오는 데 많이 헤매는 바람에 늦었습니다.”

“어차피 우리가 들어온 동굴 입구는 한 곳 아닌가?”

“이쪽으로 통하는 길은 커다란 돌로 막혀 있는 바람에…….”

보좌관은 무척이나 눈치를 보았다. 하지만 제르딘이 별말 하지 않자 꽤 놀란 얼굴이었다. 그러다 보좌관은 발레린을 보며 걱정스레 물었다.

“왕자비님, 몸은 괜찮으십니까?”

“괜찮아요.”

발레린이 밝게 미소를 짓자 보좌관도 입꼬리를 올렸다. 그때 제르딘이 보좌관에게 한마디 했다.

“이곳 주변을 조사해. 플린 독이 나와서 황금 마검을 소독한 곳일지도 모르니까.”

보좌관은 재빠르게 고개를 끄덕이고는 같이 온 조사관에게 지시했다. 그때 제르딘이 발레린에게 다가왔다.

“저희는 이만 돌아가는 게 좋겠습니다.”

발레린은 고개를 끄덕이며 제르딘을 따라나섰다. 그의 주변으로 왕실 친위대가 다가왔다. 그중에서 꽤 화려한 휘장을 단 사람이 제르딘 앞에 고개를 숙였다.

“별일은?”

제르딘이 가볍게 묻자 그 사람은 나직이 말했다.

“별일은 없었습니다. 다만 배도스 공작 쪽에서 일반 사병을 늘리려는 조짐이 보이고 있습니다.”

“그건 예전부터 하고 있었던 일이긴 한데……. 나머지는?”

“다른 건 딱히 보이지 않습니다.”

“배도스 공작 쪽 잘 주시해. 사병을 늘리는 걸 보면 다른 곳에 이미 숨겨 놓고 있을지 모르니까.”

그 사람은 고개를 끄덕이곤 물러났다. 그때 보좌관이 급히 제르딘에게 다가왔다.

“왕자님, 그럼 이 주변을 조사하면 되는 겁니까?”

“내가 이곳 좌표를 알려 줬을 텐데.”

꽤 날카로운 목소리에 보좌관은 옆에 있는 조사관의 팔을 툭 쳤다. 조사관은 재빠르게 탐지기를 꺼내서 확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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