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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록빛 저주의 공녀님-78화 (78/130)

78화

제르딘이 천천히 고개를 숙였다. 그의 눈이 천천히 감기는가 싶더니 숨결이 점점 가까워졌다. 발레린이 당황하며 숨을 삼킨 순간 제르딘의 입술이 부드럽게 닿았다.

발레린은 눈을 동그랗게 뜬 채 제르딘의 어깨를 잡았다. 그러다 곧바로 손을 놓고는 재빨리 뒤로 물러났다.

“왕자님!”

발레린은 혼란스러운 얼굴로 제르딘을 바라봤다. 아무리 봐도 자신이 알던 왕자님이 아니었다.

옆에 있던 그로프도 외쳤다.

“완전히 맛이 간 것 같습니다.”

그 말에 제르딘은 천천히 고개를 들어 그로프를 보았다. 그때 제르딘이 이마를 짚으며 고개를 숙였다. 발레린은 다급히 제르딘에게 다가갔다.

“왕자님, 괜찮으세요?”

발레린이 걱정스레 살피며 묻자 제르딘이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순간 눈이 마주쳤다. 평소 발레린이 감탄하던 맑은 하늘빛이었다. 발레린은 저도 모르게 안도하며 제르딘에게 물었다.

“왕자님, 머리는 어떠세요?”

“괜찮습니다. 그런데 제가 방금 정신을 잃었던 것 같은데.”

발레린은 제르딘이 방금 일을 기억 못 하는가 싶어서 말했다.

“아까 피를 토해 내고 기침하시면서 잠깐 누워 계셨어요.”

“별일은 없었습니까?”

“별일이요?”

제르딘은 잠시 모래 바닥을 보다가 천천히 내뱉었다.

“간혹 제가 아닌 것처럼 군다든가, 그런 일이요.”

“그러고 보니 이상하긴 했어요. 왕자님 눈동자 빛도 약간 탁했고요.”

제르딘은 잠시 생각하는가 싶더니 침착하게 말했다.

“혹시 제가 공녀에게 실수를 한 겁니까?”

발레린은 당황하긴 했으나 재빨리 말했다.

“아니요.”

사실 발레린은 제르딘이 다가와서 좋긴 했지만 제르딘 입장에서는 난감할 수 있었기에 가만히 있었다. 실제로 아까 전 제르딘은 그가 생각하기에도 납득하지 못할 행동을 보인 것이 맞았으니까.

그때 옆에서 그로프가 쳐다봤다. 발레린은 그로프에게 눈짓하며 고개를 내저었다.

제르딘은 발레린을 물끄러미 보더니 굳은 얼굴로 말했다.

“미리 말해 주지 못해서 미안합니다. 원래 그런 상태가 자주 있지는 않은데.”

“아니에요. 많이 놀라지는 않았어요.”

사실 발레린은 상당히 놀랐지만 제르딘이 너무나 미안해하는 것 같아서 에둘러 거짓말을 했다. 제르딘은 옅은 한숨을 내쉬며 침착하게 말했다.

“가끔 원초적인 본능이 심화될 때 그렇게 됩니다. 완전히 그렇게 바뀌지 않기 위해서 약을 먹는 거고요.”

“그럼 늑대 수인의 피가 반쯤 섞인 부작용이란 것도 결국 그런 상태를 말하나요?”

제르딘은 고개를 끄덕였다.

“제가 완전한 늑대 수인이었다면 이상한 증상은 나타나지 않았을 겁니다.”

제르딘의 목소리는 약간은 공허하면서도 허탈했다.

“괜찮으세요?”

“괜찮습니다.”

그 말을 하면서 제르딘은 이내 시계를 확인하고는 발레린을 쳐다봤다.

“공녀, 이제 늦은 시간이니 잘 곳을 찾아보는 게 맞지 않겠습니까?”

발레린은 고개를 끄덕이며 옆에 있던 그로프를 어깨 위에 올렸다. 제르딘도 곧 몸을 일으켰다. 그의 옷에는 핏자국이 선명히 떨어져 있었다. 발레린의 시선을 느꼈는지 제르딘이 대수롭지 않은 목소리로 말했다.

“어차피 보름달이 뜨는 날마다 자주 있는 일입니다. 이 일로 인해서 제 건강이 나빠지지도 않고요.”

“그래도 힘들지 않으세요? 아까 너무 많이 피를 토하셔서요.”

“힘들긴 해도 피하지 못하는 증상이니까요.”

발레린은 그저 고개를 끄덕였다.

“원래 이런 상태는 밤새 계속되는데 생각보다 일찍 깨서 놀랐습니다.”

“그런 상태가 밤새 간다고요?”

제르딘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넌지시 물었다.

“혹시 제게 뭘 먹인 겁니까?”

그 말에 발레린은 아까 제르딘과 입을 맞추던 것이 생각났다. 그땐 그저 제르딘이 살았으면 하는 마음뿐이었다. 불순한 마음도 없었고.

하지만 이제야 발레린은 얼굴이 벌겋게 달아올랐다.

“공녀?”

제르딘이 발레린의 얼굴을 유심히 바라봤다. 발레린은 황급히 고개를 돌리며 말했다.

“아무 일도 없었어요.”

“아무 일도 없었다고요?”

“그냥 왕자님께서 그렇게 변하셨다가 정신을 차리신 거예요.”

제르딘은 발레린을 물끄러미 바라봤다. 발레린은 애써 다른 곳을 보는 척 시선을 돌렸다. 그때 어깨 위에 있던 그로프가 개꿀개꿀 울었다.

제르딘이 쳐다보자 그로프가 말했다.

“원래 그렇게 아플 땐 그냥 견디는 겁니까?”

제르딘은 고개를 끄덕였다.

“부작용은 보름달이 뜨는 날마다 심해지는데 그 전에 약을 먹고 증상이 가라앉을 때까지 기다리는 거지.”

발레린은 그 말을 듣자마자 자신이 과한 짓을 한 것이 아닌가 생각했지만 그래도 제르딘이 일찍 깨어나서 다행이었다. 심지어 아까도 제르딘이 먼저 입을 맞추지 않았던가?

‘그러고 보면 정말 입맞춤이 정답인 건가.’

발레린이 멍하니 생각하는 사이 그로프가 말했다.

“그래도 주인님께서 많이 신경 써 주신 덕분에 일찍 깨어날 수 있었던 겁니다.”

제르딘은 발레린을 돌아봤다.

“공녀, 다시 한번 고맙습니다. 많이 놀랐을 텐데.”

“아니에요. 제가 당연히 왕자님을 신경 쓸 수밖에 없죠.”

발레린은 미소를 지으며 앞으로 빠르게 걸었다. 제르딘은 단숨에 발레린을 따라오며 꾸준히 시선을 놓치지 않았다. 발레린은 제르딘의 시선이 신경 쓰이면서도 내심 원래의 제르딘으로 돌아와서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만약 그 상태에서 영원히 돌아오지 않는다면…….’

발레린은 굳은 얼굴로 머릿속의 생각을 지웠다. 그때 제르딘이 물었다.

“무슨 생각을 하는 겁니까?”

꽤 호기심이 묻어 있는 말투였다. 발레린이 돌아보자 제르딘이 미소를 짓고 있었다. 아까 그와는 묘하게 다른 모습이었다.

발레린은 새삼 지금의 제르딘이 그동안 마음속에 담아 둔 사람이라는 게 실감이 났다. 무엇보다 하늘빛 눈동자는 여느 때보다 맑고 아름다웠다.

발레린은 속으로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밝은 목소리로 말했다.

“별생각은 안 했어요.”

제르딘은 그 말에도 발레린에게 시선을 떼지 않았다. 발레린은 괜히 민망해서 고개를 돌렸다. 이상하게 아까 일이 발레린의 머릿속을 맴돌았다.

눈빛이 탁한 제르딘. 발레린은 문득 궁금증이 일어 물었다.

“만약 왕자님께서 부작용인 상태에서 돌아오지 못할 수도 있나요?”

“그건 저도 장담하지 못합니다. 그래도 그 상태로 하루를 넘기지 않았고 제가 잘 조절하고 있으니 굳이 걱정하지는 않으셔도 될 겁니다.”

발레린은 그나마 마음이 안정되었다. 그러다가 새삼 제르딘이 무척이나 고생하고 있다는 게 실감이 났다. 아무에게도 말하면 안 되고 그 일이 다른 곳에 퍼지면 안 되니 더 답답할 것 같았다.

발레린은 힐끗 제르딘을 쳐다봤다. 그는 아까 피를 토하며 쓰러진 상태와 다르게 약간은 생기 있어 보였다. 그때 제르딘이 돌아봤다. 발레린은 재빨리 시선을 피했다.

그때 피식 웃는 소리가 들렸다.

발레린이 돌아보자 제르딘과 눈이 마주쳤다. 발레린은 곧바로 고개를 돌려 정면을 바라봤다.

“왜 그렇게 제 눈을 피하십니까?”

“네?”

“저와 마주치기를 꺼리시는 것 같아서요.”

그 말에 발레린은 손을 내저었다.

“아니에요! 꺼리다니요. 제가 감히 왕자님을 어떻게…….”

“그럼 왜 그렇게 제 시선을 피하는 겁니까?”

“왕자님께서 불편해하시는 것 같아서요.”

“전혀 불편하지 않은데요.”

낮게 떨어지는 목소리였다. 발레린은 천천히 제르딘을 돌아봤다. 그는 이제 웃고 있지 않았다. 발레린은 조심스레 물었다.

“정말 불편하지 않으세요?”

“전혀 불편하지 않습니다.”

“…….”

“제가 두 번이나 말을 반복해도 기분 나쁘지 않을 만큼이요.”

그 말을 듣고서 발레린은 잠시 어리둥절했다. 그러고 보면 제르딘은 말을 반복하는 것을 싫어했다. 처음에 제르딘은 발레린에게 주의를 주기도 했었다.

발레린이 멍하니 바라보자 제르딘은 주변을 둘러보며 말했다.

“그나저나 여기서 쉬는 게 낫겠습니다. 이제 시간도 늦었으니까요.”

발레린은 고개를 끄덕이며 그 자리에 앉았다. 그때 제르딘이 재킷을 벗어서 발레린의 어깨에 둘러 주었다. 발레린은 놀라며 시선을 들었다.

“전 괜찮은데요!”

“아까보다 온도가 많이 낮아졌습니다. 아무리 동굴 안이라도 이곳은 햇빛 한 줌 들지 않는 곳이니까요.”

“왕자님은요? 춥지 않으세요?”

“저는 추위에는 강해서 괜찮습니다.”

제르딘은 그 말을 하면서 발레린과 조금 떨어진 곳에 가져온 것을 놓았다. 그러면서 그는 가죽 벨트를 풀기 시작했다.

발레린은 황급히 고개를 돌렸다. 그러곤 그대로 누우며 제르딘이 준 재킷을 덮었다. 그로프가 폴짝 뛰어올라 발레린의 머리맡에 앉았다.

“주인님, 안녕히 주무십시오.”

발레린은 그로프에게 미소를 지었다.

“그로프, 잘 자.”

그때 제르딘이 말했다.

“공녀, 불 끄겠습니다.”

“네, 끄셔도 돼요.”

제르딘은 등불을 완전히 껐다. 주변은 한순간에 어두워졌다. 발레린은 어둠이 그다지 무섭지는 않았다. 탑에서 그로프와 함께 있으면서 익숙해진 지 오래였다. 다만 몸 위에 있는 제르딘의 재킷과 옆 어딘가에 있는 제르딘의 존재가 낯설었다.

분명 방에서도 같이 있었는데 지금은 은근히 느낌이 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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