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5화
발레린이 저도 모르게 유심히 쳐다보자 제르딘이 시선을 들었다. 눈이 마주치자 발레린은 곧바로 시선을 내렸다.
“이곳에 어떤 생물이 있을지 모릅니다. 물론 제가 아까 둘러본 바로는 아무것도 없긴 했지만 그래도 이제 날이 어두워졌으니 아까와는 다를 겁니다.”
“정말 왕자님은 괜찮으세요?”
“괜찮습니다.”
제르딘은 꽤 단호해 보였다. 그러고 보면 제르딘에게 괜찮으냐고 몇 번이나 물어봤는데 제르딘은 화도 내지 않고 그저 괜찮다고만 말했다.
발레린은 이쯤 해서 제르딘에게 더 말을 꺼내지 않았다. 발레린이 가만히 있자 제르딘은 등을 들었다.
“가시죠.”
제르딘이 앞을 보며 눈짓했다. 발레린은 고개를 끄덕이며 천천히 걸었다. 동굴 안은 지금이 밤인지 낮인지 분간이 안 될 정도로 어두웠다. 애초에 이곳에 떨어졌을 때부터 빛이 보이지 않아서 더 그랬다.
제르딘은 등을 든 채 말이 없었다. 발레린은 힐끔거리며 제르딘을 쳐다봤다. 괜히 저 때문에 제르딘이 더 고생하는 것 같아 마음이 쓰였다. 그렇게 발레린이 보고 있을 때 제르딘이 고개를 돌렸다.
발레린은 빠르게 시선을 돌렸으나 제르딘은 여전히 발레린을 보며 말했다.
“그래도 지금 제 상태가 다른 때보다 좋은 걸 아십니까?”
그 말에 발레린이 돌아보자 제르딘의 얼굴이 묘하게 풀어졌다.
“그러고 보면 공녀가 이 왕궁에 오고 나서부터 제 상태가 조금씩 나아진 것 같습니다.”
“나아졌다고요?”
제르딘이 고개를 끄덕였다.
“이전에는 보름달이 뜨지 않더라도 한 번씩 심장이 아팠습니다.”
“그럼 지금은 괜찮으신가요?”
“아까 이후로 그다지 아프진 않습니다. 그러고 보면 공녀와 한방을 쓴 이후로 잠이 잘 오기도 했고요.”
발레린은 문득 제르딘의 향주머니를 떠올렸다. 그는 무척이나 예민하게 받아들여서 발레린이 직접 냄새를 맡으며 약초를 골라내기도 했었다.
“그나마 다행이네요. 제가 도움이 되었다니.”
“처음부터 공녀는 제게 많은 도움이 되고 있습니다. 어쨌든 지긋지긋한 왕궁에서 공녀가 있어서 지낼 만하니까요.”
발레린은 새삼 좋게 말해 주는 제르딘이 고맙다가도 과한 친절이 아닐까 생각했다. 어쨌든 제르딘은 좋은 사람이었기에 발레린은 그의 친절한 말이 괜히 제르딘을 더 피곤하게 만드는 건 아닌지 신경 쓰였다.
좋은 말을 생각하고 말해 주는 것도 당사자에겐 피곤한 일일 수도 있었다.
“왕자님, 그렇게까지 말씀해 주지 않으셔도 돼요. 어쨌든 제가 도움이 되었다는 말만으로도 감사해요.”
그때 제르딘이 멈춰 섰다. 발레린이 쳐다보자 그가 가라앉은 시선으로 보았다.
“아까부터 왜 그런 말을 자꾸 하십니까?”
발레린이 당황하며 쳐다보자 제르딘이 말했다.
“제가 한 말은 다 진심인데.”
꽤 단호한 목소리였다. 거기다 쳐다보는 시선은 무척이나 짙었다. 발레린은 쉽사리 말이 나가지 않았다.
“그러고 보면 공녀는 누구보다도 절 잘 모르는 것 같습니다.”
그 소리에 발레린은 더욱 당황스러웠다.
“제가 왕자님을 모른다고요?”
제르딘은 묘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제가 아무에게나 친절하고 착한 존재는 아니라는 겁니다.”
제르딘의 하늘빛 눈동자가 짙게 번뜩였다. 아까 묘하게 검푸른 빛을 띠던 것은 언제 사라졌는지 보이지 않았다. 발레린은 제르딘이 조금은 낯설게 느껴졌다. 쳐다보는 눈빛도 은근히 화가 난 듯 말하는 어투도.
모두 제르딘에게 자주 보지 못한 모습이었다.
“그리고 이렇게까지 사람을 챙겨 본 적 없습니다.”
발레린은 그 말을 듣고 누군가 생각났다. 제르딘이 예전에 결혼할 뻔했던 사람이었다. 그는 한 번도 먼저 말을 꺼낸 적 없지만 발레린은 은근히 그 사람이 신경 쓰였다.
물론 세드릭스 부인이 그 사람과 제르딘 사이 관계에 대해서 이야기해 주긴 했지만 그래도 당사자가 직접 말하지 않는 이상 모르는 일이었다.
하지만 발레린은 차마 입을 열지 못했다. 어차피 제르딘은 저와 온전히 결혼 관계를 지속할 수 없었다. 어쨌든 발레린은 대외적으로 저주에 걸린 사람이었고 제르딘은 그런 피를 가진 사람과 아이를 낳을 생각이 없다고 했으니까.
그때 제르딘이 나직하게 말했다.
“그나저나 공녀에게 제 어린 시절을 말하지 않았던 것 같은데.”
발레린은 재빨리 대답했다.
“괜찮아요. 굳이 말씀해 주지 않으셔도.”
제르딘이 물끄러미 쳐다봤다. 발레린은 일부러 제르딘과 시선을 맞추지 않았다. 그와 마주 보면 얼굴이 벌겋게 변해 저도 모르게 이것저것 물을 것 같아서였다.
‘이제 와서 왕자님에 대해서 알아서 뭐 하겠어. 어차피 왕자님은 다른 분과 결혼하실 텐데.’
발레린은 이제 기대라는 것을 내려놓기로 했다. 제르딘은 사랑이라는 감정을 주지 못한다고 처음부터 말했었다. 거기다 이제는 짝사랑이 제르딘에게 방해만 되니 발레린은 최대한 제 사랑을 감추고 싶었다.
그때 제르딘이 발레린 앞에 섰다. 발레린이 살짝 고개를 들자 제르딘이 말했다.
“정말 궁금하지 않습니까?”
그는 진지한 얼굴이었다. 대답을 바라는 듯, 잔뜩 기대를 하는 것 같기도 했다. 무엇보다 그의 눈빛이 꽤 짙었다.
하지만 발레린은 애써 미소를 지었다. 그동안 스스로 제르딘의 얼굴을 보며 많은 기대와 판단을 했지만 모두 틀렸다. 사람의 감정은 발레린이 바라는 대로 되는 게 아니었다.
사실 제르딘의 과거가 궁금하긴 했지만 이젠 제르딘을 더 귀찮게 하고 싶지 않았다. 발레린은 애써 대답했다.
“그다지 궁금하지 않아요.”
주위가 찬물을 끼얹은 듯 차가워졌다. 발레린은 당황스러워 괜히 주변을 둘러보다가 등불을 보았다. 등불은 아까보다 약하게 빛이 났다.
발레린은 괜히 밝은 얼굴로 말했다.
“그나저나 이제 등불도 꺼져 가는데 황금 마검을 찾으러 가야 하지 않을까요?”
제르딘은 발레린을 잠시 보다가 이내 옆으로 물러났다.
발레린은 어색하긴 했지만 이게 최선이라고 생각했다. 그러곤 이젠 냄새에 집중했다. 얼른 황금 마검을 찾아야 제르딘이 왕이 될 수 있었다. 발레린은 왕이 되는 제르딘을 상상하며 코를 킁킁거렸다.
어깨 위에 있던 그로프도 개꿀개꿀 울면서 고개를 이리저리 돌렸다.
“그로프, 혹시 냄새 느껴져?”
“딱히 특이한 냄새는 느껴지지 않습니다. 아까 사과 향도 없고요.”
발레린은 문득 뒤를 돌아봤다. 그러고 보면 아까 있던 자리에서 사과 향이 강하게 나긴 했다. 발레린은 곰곰이 생각하다가 문득 제르딘을 돌아봤다. 제르딘은 아까부터 봐 왔던지 발레린과 그대로 시선이 마주쳤다.
발레린은 살짝 당황하긴 했으나 개의치 않고 물었다.
“왕자님, 아까 왔던 자리를 다시 파 보면 어떨까요?”
“아까 공녀가 땅을 많이 팠지 않습니까?”
“그렇긴 하지만 지금은 독 냄새가 많이 나지 않아서요.”
그 말에 제르딘은 주머니에서 무언가를 꺼냈다. 나침반같이 생긴 데다 황금빛을 띤, 꽤 고급스러운 기구였다. 발레린은 처음 보는 물건에 흥미를 가지며 눈을 반짝였다.
“이게 뭔가요?”
“마력 탐지기입니다.”
“마력 탐지기는 처음 들어요.”
탑 안에서 오래된 책만 읽다 보니 새로운 물건은 발레린에겐 무척이나 신기한 존재였다. 발레린이 눈을 빛내며 관심을 드러내자 제르딘이 침착하게 말했다.
“주로 마력이 있는 물건을 탐지하는 기구입니다. 황금 마검은 워낙 오래된 물건이라 이 탐지기로 탐지가 될지 모르겠지만 어쨌든 조금은 도움이 될 겁니다.”
“그럼 이 기구는 어느 쪽을 가리키고 있는 건가요?”
제르딘은 탐지기를 물끄러미 보더니 반대편을 가리켰다.
“우선 지금 탐지되는 마력은 저기에 있습니다.”
발레린이 아까 맡았던 곳과 반대 방향이었다.
“그럼 탐지된 방향으로 가요.”
발레린이 먼저 앞서자 제르딘이 뒤따라왔다. 발레린은 그사이 계속 킁킁 냄새를 맡았다. 그래도 은은히 사과 향이 났다.
발레린은 그로프를 살짝 쳐다봤다.
“그로프, 넌 정말 냄새 안 나?”
“그다지 느껴지지 않습니다. 제 독기보다 주인님의 독기가 강해서 주인님께만 느껴지는 것 아닙니까?”
전에도 그로프는 잘 느끼지 못했었다. 발레린은 아직도 은은히 나는 사과 향을 느끼며 제르딘을 따라갔다. 제르딘은 가만히 발레린의 보폭을 맞춰 주었다. 그러다가 가끔 너무 빠르게 걷는다 싶으면 한 번씩 멈춰 섰다.
발레린은 제르딘의 배려에 고맙다가도 더 깊이 생각하지 않았다. 그렇게 말없이 한참 걷던 중 제르딘이 문득 멈췄다.
발레린이 쳐다보자 제르딘이 돌아봤다.
“이곳에 마력이 가장 많이 느껴집니다.”
발레린은 곧바로 주변에 냄새를 맡았다. 하지만 아직도 은은한 사과 향만 날 뿐 딱히 강한 향은 느껴지지 않았다.
“아까와 비슷한 향이 나긴 나는데 주목할 만한 향은 느껴지지 않아요.”
제르딘은 모래 바닥을 잠시 보다가 이내 칼을 빼 들었다.
“뭘 하시려고요?”
“어차피 모래 바닥이니 칼로 밑을 찔러 보려고 합니다. 만약 이곳에 묻혀 있다면 칼에 닿겠죠.”
제르딘은 망설임 없이 칼을 들어 모래 바닥을 찔렀다. 거의 손잡이까지 푹 내려가자 제르딘은 다시 칼을 빼 들었다. 너무나 빠르고 명쾌한 몸짓이었다.
발레린은 뚫어지게 보는 것도 인지하지 못하고 멍하니 제르딘을 쳐다봤다.
그때 제르딘과 눈이 마주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