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4화
발레린은 곧바로 제르딘을 돌아봤다. 하늘빛 눈동자와 바로 마주쳤다. 발레린은 놀랄 틈도 없이 말했다.
“왕자님, 여기에 황금 마검이 있는 것 아닐까요?”
“황금 마검이요?”
“네, 여기 이 주변이 모래로 이루어진 것도 그렇고 갑자기 저희가 모래 아래로 떨어진 것도 그렇고요.”
“동굴에 모래가 있는 게 특이하긴 하지만 그걸로 황금 마검이 있다고 짐작하기에는 무리가 있을 것 같습니다.”
“하지만 뜬금없이 이곳에 모래가 있는 이유가 플린 독을 감추기 위해서라면 그럴듯하지 않나요?”
“플린 독은 왕국에서 제재하지 않는 독입니다. 어차피 독성도 그다지 높지 않아서요.”
“그런데 마력이 담긴 무기를 소독하기 위해서는 플린 독이 필요하지 않나요?”
“그렇다고 해서 이곳에 황금 마검이 숨겨져 있다고는 볼 수 없습니다. 플린 독이 있는 곳에 무조건 황금 마검이 있다는 보장도 없으니까요.”
제르딘은 이럴 때면 무척이나 이성적이었다.
“그래도 이 주변을 제가 찾아보면 안 될까요?”
“공녀, 아직 발목이 낫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그때 제르딘이 일어났다.
“차라리 제가 찾겠습니다.”
“왕자님이요?”
“공녀가 움직이기에는 아직 어려우니까요.”
“하지만 왕자님께선 아까 황금 마검이 이곳에 있다는 증거가 없다고 하지 않으셨나요?”
“그렇다고 공녀를 움직이게 할 수는 없잖습니까?”
발레린은 복잡한 심경이었다. 제르딘을 귀찮게 하려고 한 말은 아니었다.
‘발목만 괜찮았다면…….’
발레린은 발목을 물끄러미 보았다. 제르딘이 고정해 준 부목은 꽤 세심했다. 이렇게까지 신경 써 주고 대신 찾아보겠다니.
발레린은 잠시 머뭇거리다가 말했다.
“왕자님, 괜히 저 때문에 이렇게까지 신경 써 주지 않으셔도 돼요. 지금도 왕자님께서는 충분히 도와주고 계시니까요.”
제르딘은 그저 물끄러미 쳐다봤다. 그 눈빛은 차분하면서도 짙었다. 발레린은 잠시 생각하다가 입을 열었다.
“왕자님께서 일부러 저를 많이 배려해 주시는 건 알아요.”
“…….”
“왕자님은 원래 그런 분이시잖아요.”
발레린은 조심스레 제르딘을 쳐다봤다. 그는 굳은 얼굴이었다. 발레린은 더 쳐다보지 못하고 시선을 피했다.
“전 왕자님이 어떤 분인지 아니까 굳이 그렇게까지 저에게 신경 쓰지 않으셔도 돼요.”
어쨌든 발레린은 제르딘에겐 더 피곤하게 굴고 싶지 않았다.
그때 나직한 목소리가 울렸다.
“제가 공녀에게 그런 사람으로 비칠지는 몰랐습니다.”
발레린이 고개를 들자 제르딘이 잔뜩 가라앉은 시선으로 바라봤다.
“왕궁에선 꽤 나쁜 소문만 떠돌았는데.”
“전 왕자님이 그렇게 나쁜 사람이라고 생각하지 않아요! 저한테 하시는 것만 봐도 왕자님께서는…….”
“전 공녀가 생각하는 것만큼 좋은 사람은 아닙니다.”
발레린이 놀란 눈으로 보자 제르딘이 차분히 말했다.
“왕궁에서 떠돌던 소문 중에는 일부 사실도 있습니다. 제가 여러 하인에게 예민하게 군 적도 있으니.”
“하지만 왕자님께서는…….”
“공녀는 저와 함께하는 사람이니 그렇게까지 하는 겁니다.”
잠시 침묵이 일었다. 발레린은 할 말이 떠오르지 않았다. 제르딘의 말은 무엇보다 희망을 갖게 하는 말이었다. 혼란스러운 와중에 제르딘은 차분히 말을 이었다.
“이곳에 온 것도 모두 공녀의 의견을 존중하기 위해서이니 제가 주변을 찾아보겠습니다.”
그러곤 제르딘은 몸을 돌렸다. 그 순간 그는 심장 부근을 짚은 채 고개를 숙였다. 갑작스러운 그의 태도에 발레린은 놀라며 물었다.
“괜찮으세요?”
제르딘은 깊이 숨을 내쉬었다. 그때 제르딘이 힘을 잃으며 쓰러졌다. 발레린은 황급히 제르딘에게 다가갔다.
“왕자님!”
제르딘은 심장 부근에 손을 댄 채 숨만 내쉬었다. 그때 그로프가 발레린에게 속삭였다.
“지금 부작용이 온 것 아닐까요?”
“부작용?”
“네, 오늘 마침 보름달이 뜬다고 하지 않았습니까?”
그때 제르딘이 말했다.
“어차피 약을 먹었으니 괜찮습니다.”
“하지만 왕자님.”
제르딘이 천천히 발레린을 돌아봤다.
“제가 공녀에게 말하지 않았습니까?”
“…….”
“예상치 못한 행동을 해도 놀라지 말라고요.”
“하지만 이건 왕자님께서 아프신 거잖아요.”
제르딘은 잠시 눈을 감았다가 숨을 내쉬었다.
“종종 이렇습니다.”
그러다가 제르딘은 천천히 발레린을 바라봤다.
“발목은 괜찮습니까?”
“발목이요?”
제르딘이 고개를 끄덕였다. 발레린은 제 발목을 쳐다봤다. 그러고 보니 발목이 아프지 않았다. 심지어 아까 급하게 제르딘에게 갔는데도 아린 느낌도 없었다.
발레린이 의아하게 쳐다보자 제르딘이 천천히 일어났다. 발레린도 성급히 일어났다. 제르딘의 시선은 발레린의 발목에 있었다. 그는 굳은 눈빛으로 쳐다봤다.
“정말 괜찮으신 겁니까?”
“네, 이상하게 아프지도 않아요. 분명 처음에는 무척 아팠는데.”
발레린은 발목을 천천히 움직여 보았다. 발목에 막대기가 대어 있어서 작게 움직였지만 전혀 아프지 않았다. 발레린은 제 상태를 보며 중얼거렸다.
“독을 먹어서 그런가.”
“독을 먹다니요?”
“저는 독을 먹으면 종종 기분이 좋아지거든요. 상쾌해지기도 하고요.”
그때 발레린의 어깨 위에 있던 그로프가 끼어들었다.
“주인님께서는 저처럼 독으로 회복하시는 것 아닙니까?”
“독으로?”
“네, 제가 주인님의 독기로 살아남은 것처럼 주인님도 독으로 회복하시는 거죠.”
그럴듯한 말이었다.
“책에서 언뜻 본 것 같기도 해. 마력이 있는 사람들은 마력으로 몸을 회복하는 거라고.”
그로프는 커다랗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니 주인님도 아까 먹은 독으로 원기를 회복하신 게 아닌가 합니다.”
“독을 그렇게 많이 먹지도 않았는데.”
“주인님께서는 워낙 독기가 강하시니 조금만 독을 먹어도 몸을 회복하시는 것 아닙니까?”
발레린은 제 발목을 바라봤다. 이제는 정말 멀쩡해서 뛸 수도 있을 것 같았다. 그때 제르딘이 발레린 앞에 앉았다. 발레린이 놀라며 보자 그가 발목에 눈짓하며 말했다.
“만약 공녀가 회복했다면 이건 제거하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그러곤 제르딘은 능숙하게 천으로 매어 놓은 부목을 삽시간에 풀었다. 그러니 한결 발목이 가벼워졌다. 발레린이 살짝 발을 움직였다. 정말 멀쩡한 듯 아프지 않았다.
제르딘은 천천히 일어나서 발레린과 눈을 맞췄다.
“정말 다 나은 겁니까?”
발레린은 멍하니 발목을 보며 중얼거렸다.
“전혀 아프지 않아요. 아까는 분명 아파서 제대로 걸을 수도 없었는데…….”
“역시 주인님이십니다. 주인님의 독기가 워낙 뛰어나니 조금만 독을 먹어도 이렇게 회복하시는 것 아니겠습니까?”
발레린은 새삼 이 상황에 적응이 되지 않았다. 물론 이전까지 아프지 않아서 더 그랬다. 그 생각을 하자마자 발레린은 그로프를 쳐다봤다.
“그로프, 그러고 보니까 탑 안에서 내가 전혀 아프지 않았잖아.”
“네.”
“그럼 그때 내가 아프지 않았던 것도 해인저 모녀가 꾸준히 준 독 덕분이었던 걸까?”
“충분히 가능성 있습니다. 어쨌든 그 독 덕분에 주인님께서 여태껏 건강하신 것 아닙니까?”
발레린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고 보면 탑 안에 있을 때 체한 적도 없었고 감기에 걸린 적도 없었다.
“지금 생각해 보니 이상하긴 해. 물론 내가 꾸준히 운동을 했다고 해도 추운 겨울에 감기조차 걸린 적 없었으니까.”
그로프가 어깨 위에서 울었다.
“개꿀개꿀.”
발레린은 다시 발을 움직여 보았다. 여전히 아프지 않고 멀쩡했다.
“정말 독을 먹으면 회복이 되는가 보네.”
새롭게 안 사실에 발레린은 기쁘게 미소를 지었다. 그때 제르딘이 말했다.
“다행입니다. 그래도 독 덕분에 이렇게 빨리 회복하시니.”
“그러게요, 저는 처음 알았어요.”
그때 그로프가 말했다.
“주인님께서는 그만큼 능력이 있으신 분입니다. 어느 누가 독을 조금 먹었다고 해서 이렇게 쉽게 회복하겠습니까?”
발레린은 그저 미소를 지었다. 그로프의 말을 듣고 보니 꽤 기분이 좋았다. 그러다가 이내 제르딘을 살폈다.
“그나저나 왕자님, 괜찮으세요?”
제르딘은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지금은 견딜 만합니다. 이전에는 피를 토하면서 아팠으니까요.”
뜻밖의 말에 발레린이 눈을 동그랗게 뜨자 제르딘이 말을 돌렸다.
“그럼 바로 황금 마검을 찾으러 가도 되겠습니다.”
“그렇긴 하지만 왕자님께서 아프시잖아요.”
“괜찮습니다.”
“아니에요. 어차피 제 발목은 괜찮으니까, 제가 주변에 있는 독 냄새를 맡으면서 찾을게요.”
“독 냄새요?”
“황금 마검은 마력이 담긴 무기잖아요. 그래서 제 생각에는 플린 독과 함께 있을 것 같긴 해요. 예전에 책에서 봤는데 일부러 마력이 담긴 무기를 플린 독에 담아서 보관한다고 하더라고요. 그러면 더 오래간다고 보기도 했고요.”
발레린의 어깨 위에 있던 그로프가 개꿀개꿀 울면서 말했다.
“역시 주인님이십니다.”
발레린은 그로프를 보며 미소를 짓고는 제르딘을 쳐다봤다. 그는 생각에 잠긴 얼굴이었다. 미간을 살짝 찌푸렸는데 그 모습 그대로 진지해 보이기도 했다.
그러나 묘하게도 그의 눈동자가 검푸른 빛을 띠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