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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록빛 저주의 공녀님-73화 (73/130)

73화

“처음에 해인저 모녀가 독을 준 것을 똑똑히 기억해요. 그땐 웬일인지 수프에 새콤한 향이 강하더라고요. 맛도 과일 맛이 나기도 하고요. 처음에는 왜 이런 맛이 나나 궁금했는데 문득 수프를 먹다가 바닥에 떨어뜨리니 연기가 나면서 돌이 살짝 녹더라고요.”

그로프는 그 말을 듣자마자 개꿀개꿀 울면서 말했다.

“맞습니다. 저도 기억합니다. 그래서 주인님께서 많이 놀라지 않았습니까?”

발레린은 고개를 끄덕였다.

“처음에는 그게 독인 줄도 몰랐어요. 그땐 책도 제대로 읽지 못했고 그냥 나쁜 거라고만 알았는데…… 이상하게 맛은 있더라고요.”

“개꿀개꿀.”

발레린은 미소를 지으며 신나게 말을 이었다.

“그곳에 버려진 여러 책을 읽고 제가 독에 강하다는 것을 안 이후부턴 그동안 먹었던 게 독이란 걸 알게 됐어요. 그 후부턴 제가 먹었던 맛과 함께 책에 나오는 독을 유추하면서 독의 종류에 대해서 알게 됐죠.”

“책에는 독의 맛에 대한 설명이 없을 텐데 어떻게 알았습니까?”

“대체로 과일과 비슷한 맛이 나는데 신기하게 독 색깔과 과일 색이 비슷해요. 그래서 그걸로 추측하다 보니까 독의 종류가 얼추 맞더라고요.”

제르딘은 그저 고개를 끄덕였다. 발레린은 문득 그를 쳐다봤다. 눈이 마주치자 제르딘의 눈빛에 은근한 생기가 돌았다. 발레린은 괜히 제르딘이 그렇게 쳐다보는가 싶어서 중얼거렸다.

“혹시 지루하시면 말씀해 주세요. 제가 말하다 보니까 신나서 이것저것 말한 것 같아요. 그래서…….”

“전혀 지루하지 않습니다.”

단호한 목소리에 발레린은 슬쩍 제르딘을 쳐다봤다.

“지루하지 않으니 더 말씀하세요. 공녀가 어떻게 살았는지 궁금하니까.”

발레린은 저도 모르게 미소가 나왔다. 제르딘이 이렇게까지 관심을 가져 주니 기쁠 따름이었다. 발레린은 빠르게 말을 이었다.

“그래서 그날 이후로 여러 책을 보면서 그로프와 함께 독 맛을 유추했어요. 나름대로 재미있기도 했고 어떤 날은 정말 맛있게 독을 조합해서 기쁘기도 했고요.”

옆에서 그로프가 개꿀개꿀 울었다. 발레린은 그로프를 보며 싱긋 웃으며 신나게 말했다.

“그렇게 살다 보니까 탑에 사는 게 답답하지는 않았어요. 세상이 궁금하면 책을 읽었고 그 책에서 본 대로 주변을 조금씩 바꿨거든요.”

“바꿨다고요?”

발레린은 빠르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 탓에 그녀의 기다란 곱슬머리가 위아래로 흔들렸다. 제르딘은 발레린의 머리카락을 잠시 보다가 얼굴을 바라봤다. 발레린은 미소를 지으며 활기차게 말했다.

“다행히 아버지가 탑에 버린 책은 종류가 다양했어요. 가구를 만드는 과정부터 식물을 키우는 법까지. 심지어 예법에 대한 책이 있어서 그 책을 보면서 예법을 연습하기도 했고요.”

“전 사르티아 공작이 공녀에게 예법 교육을 시킨 줄 알았는데 책으로 터득했다고요?”

발레린은 고개를 끄덕였다.

“아버지는 저를 탑 안에 가두기만 했는걸요. 저에게 딱히 잘해 준 것도 없어요. 탑에 갇히기 전에는 어머니가 저를 키우셨고요.”

제르딘의 얼굴이 묘하게 굳었다.

“혹시 결혼 후에 사르티아 공작이 공녀에게 방문한 적 있습니까?”

“아니요.”

“공녀의 유일한 아버지인데 방문도 하지 않았다고요?”

“전 그다지 신경 쓰지 않아요. 아버지도 바쁘겠죠.”

발레린은 아버지에게 별 감정은 없었다. 다만 어렸을 때부터 자신을 싫어했는지 궁금했다.

늘 어머니와 있을 때도 발레린은 아버지를 보지 못했다. 그래서 자신을 싫어해서 아버지가 어머니까지 보지 않는지 걱정이 되기도 했었다.

그때 제르딘이 나직이 말했다.

“생각보다 사르티아 공작은 냉정한 사람이군요. 제 자식도 보지 않다니.”

“아버지는 냉정하기보다는 겁이 많은 사람 같아요. 제 독기가 무서워서 방독면도 던지듯 주던 사람이니까요.”

발레린은 과거를 생각하다가 문득 추억에 갇혔다.

“그런데 지금 생각해 보면 아버지가 탑 안에 가둔 것도 제겐 나름대로 좋은 기회였던 것 같아요. 여러 책을 많이 읽었으니까요.”

발레린은 새삼 책을 많이 읽은 것이 행복했다. 지금도 그때 책을 읽은 기억으로 살아갔다.

제르딘은 발레린을 물끄러미 보다가 물었다.

“공녀는 옛날부터 책 읽는 걸 좋아했습니까?”

“네, 그러고 보면 늘 어렸을 때부터 책을 들고 다녔던 것 같아요. 궁금한 게 많았는데 책을 보면 그 궁금증이 해결되기도 해서요.”

“누구와 아주 반대네요.”

“누구라면…….”

“헬릭스 말입니다.”

헬릭스 이름이 나오자 발레린은 환하게 웃었다. 그 모습을 보며 제르딘의 얼굴이 살짝 굳었다.

“하긴 헬릭스 님은 머릿속이 많이 순수하신 것 같아요.”

그때 그로프가 끼어들었다.

“맞습니다. 그렇게 무식한 인간은 처음 봤습니다.”

제르딘이 웃었다. 그 웃음은 무척이나 청량했다. 자연스럽게 휘어지는 눈꼬리와 함께 절로 눈이 가는 매력적인 입꼬리에, 여태껏 처음 보는 모습에 발레린은 멍하니 제르딘을 보다가 고개를 돌렸다.

그때 제르딘이 말했다.

“예전부터 헬릭스는 글을 보는 것 자체를 혐오하는 인간이었습니다. 글보다는 여자를 꾀어내는 데 더 관심이 있었죠.”

“왕자님은 어렸을 때 헬릭스 님과 많이 친하셨나요?”

“친하지는 않고 배도스 공작과 함께 많이 봤습니다. 그런데 그마저도 헬릭스는 왕궁 출입이 지루하다며 아프다는 핑계를 대고 자주 오지 않았죠.”

발레린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때 제르딘이 집요하게 보며 말했다.

“헬릭스가 친하게 다가오면 무조건 멀리하세요.”

발레린은 문득 헬릭스가 저를 좋아한다고 말한 게 떠올랐다. 여태껏 제르딘의 말을 들어 보면 헬릭스는 여자에게 쉽게 다가가면서 가볍게 만나는 사람 같았다. 그래도 발레린은 궁금해서 제르딘에게 물었다.

“왕자님, 헬릭스 님은 원래 좋아한다는 말을 자주 하나요?”

“헬릭스가 그런 말을 했습니까?”

물어보는 목소리는 꽤 낮았다. 발레린이 놀라며 쳐다보자 그의 눈빛이 한층 가라앉아 깊은 호수를 보는 듯했다.

“헬릭스와 만났을 때 헬릭스가 그런 말을 한 겁니까?”

“네, 헬릭스 님이 배도스 공작에 대해서 말해 줬어요. 배도스 공작이 왕정 회의에 저를 참석시키려 한다면서, 절대 참석하지 말라고 말렸고요.”

“말렸다고요?”

제르딘의 목소리는 어딘가 날카로웠다. 발레린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그러고 보면 저한테 그걸 말하려고 거기서 기다렸던 것 같기도 해요.”

“헬릭스가 직접 기다리기까지 했다고요?”

“네, 혹시 잘못된 거라도 있나요?”

제르딘의 얼굴은 무척이나 차가워 보였다.

“만약 그때 공녀가 말해 줬다면 당장 헬릭스의 궁정 출입을 막았을 겁니다.”

“하지만 헬릭스 님과 가끔 만나도 괜찮을 것 같아요.”

“무슨 말입니까?”

제르딘의 목소리는 무척이나 낮았지만 발레린은 개의치 않고 말을 이었다.

“헬릭스 님은 배도스 공작의 아들이잖아요. 그리고 그때 저에게 말씀한 것도 조금은 도움 되는 이야기였고요. 그러니 굳이 배척하지 말고 배도스 공작이 뭘 꾸미는지 알아내도 괜찮을 것 같아요.”

“하지만 헬릭스는 배도스 공작의 아들입니다. 어쨌든 그 피는 못 속이니까요.”

“그래도 너무 배척하기만 하면…….”

“헬릭스는 공녀를 좋아한다고 말하기까지 하지 않았습니까?”

“그렇긴 해요.”

“그럼 더더욱 벽을 쌓고 멀리해야 합니다.”

“하지만 헬릭스 님은 원래 그런 사람이지 않나요? 그저 여자만 보면 좋아한다고 하시는 분 같던데.”

“그래서 더 위험한 겁니다.”

발레린은 처음으로 제르딘과의 대화에서 벽이 느껴지는 기분이었다. 무엇보다 제르딘의 표정은 너무나 차갑고 날카로웠다. 아까 그가 짓던 웃음은 어디로 간 건지 보이지 않았다.

발레린은 입을 닫고 그로프를 쳐다봤다. 그로프는 눈을 감고 하품을 하며 나직이 말했다.

“헬릭스 같은 인간은 무식하긴 하지만 그래도 옆에 있으면 재미있을 것 같긴 합니다. 어느 누가 노란 물을 주면 노란 장미가 피어난다고 말하겠습니까?”

발레린은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긴 해. 정말 몰라서 그런 말을 한 것 같기도 하고.”

“공녀는 멍청한 사람을 좋아하는 겁니까?”

너무나 직설적인 말에 발레린은 놀라며 제르딘을 쳐다봤다. 그는 꽤 진지한 얼굴이었다. 발레린은 곰곰이 생각하다가 고개를 내저었다.

“딱히 그런 사람을 좋아한다고 생각하지 않았는데, 그래도 저는…….”

발레린은 말을 하다가 말았다. 머릿속에는 제르딘밖에 없었지만 그는 이제 이런 사랑이 피곤하다고 하니 더 말을 할 수 없었다.

잠시 침묵이 일었다. 앞에 있는 등만 번쩍이며 불을 밝힐 뿐이었다. 발레린은 일렁이는 불을 멍하니 바라봤다. 불이 일렁임에 따라 그로프의 그림자가 이리저리 흔들렸다. 그사이 달콤한 사과 향이 무척이나 강하게 코끝을 스쳤다.

발레린은 파 놓은 웅덩이를 보며 곰곰이 머리를 굴렸다. 그때 그로프가 발레린을 보며 말했다.

“주인님, 그런데 플린 독이 이곳에 있다니 이상하지 않습니까?”

“그렇긴 해.”

그 말을 하면서 발레린은 다시 플린 독의 쓰임을 떠올렸다. 플린 독은 마력을 가진 물건을 소독할 때 사용했다.

그 생각을 하자마자 발레린의 눈은 동그랗게 커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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