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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록빛 저주의 공녀님-72화 (72/130)

72화

발레린은 더 깊이 생각하지 않고 마음을 겨우 가라앉히고서 차분히 말했다.

“왕자님, 그렇게 말씀 안 하셔도 돼요.”

“그게 무슨 말입니까?”

“왕자님은 정말 좋으신 분이라서 일부러 저에게 그렇게 말씀해 주시는 것 아닌가요?”

“일부러라니요?”

제르딘의 눈썹이 살짝 일그러졌다. 은근히 화가 난 듯한 태도에 발레린은 당황스러웠다.

“왕자님께선…….”

“공녀에게 일부러 그렇게 말하는 것 아닙니다. 진심으로 걱정되어서 그렇게 말하는 겁니다.”

“걱정이요?”

“그러니까 함부로 이상한 독 먹지 마세요. 아무리 공녀가 독에 강하다고 해도 걱정되니까요.”

발레린은 멍하니 제르딘을 바라봤다.

‘걱정?’

머릿속에는 제르딘이 말한 단어가 둥둥 떠다녔다. 거기다 제르딘은 웃는 기색도 없이 진지한 얼굴이었다. 물론 제르딘은 발레린에게 장난을 친 적이 한 번도 없었다. 그만큼 그는 꽤 진중한 사람이었다.

“왕자님, 정말 저를 걱정하셨다고요?”

“공녀를 걱정하는 제가 멍청한지도 모르지만 그래도…….”

“멍청하다니요! 전혀요! 오히려 그렇게 걱정해 주셔서 감사해요.”

발레린은 활짝 웃었다. 제르딘은 발레린은 잠시 보다가 이내 웅덩이로 시선을 돌렸다.

“그나저나 왜 이렇게 웅덩이는 깊이 판 겁니까?”

실제 발레린이 판 웅덩이는 발레린의 팔이 거의 닿을 정도로 깊었다.

“배가 고파서요.”

제르딘은 굳은 얼굴로 발레린을 쳐다봤다. 발레린은 잠시 그로프를 보다가 이내 입을 열었다.

“이전에는 자세히 말씀드리지 않았지만 사실 저는 독을 먹으면 배가 조금은 덜 고프거든요. 예전에는 탑 안에서 애피타이저로 먹기도 했어요. 이렇게 먹어야 그나마 배가 덜 고파서요.”

그로프도 발레린의 옆에서 고개를 끄덕이며 울었다.

“개꿀개꿀.”

“그럼 독을 먹으면 배가 고픈 게 해결된다는 겁니까?”

“다 해결은 되지 않지만 어느 정도는요.”

“그래서 지금은 배가 고프지 않고요?”

“사실 아직 배가 고프긴 해요. 그런데 여긴 먹을 게 없으니까요.”

발레린이 말을 마치자마자 제르딘은 벨트에 있는 작은 가방을 열어서 무언가를 발레린에게 건넸다. 먹음직스럽게 생긴 육포였다.

발레린이 눈을 동그랗게 뜨자 제르딘이 말했다.

“전 밖에 나갈 때마다 이렇게 챙겨서 갑니다. 무슨 일이 생길지 몰라서요.”

“보좌관이 항상 챙기지 않나요?”

“보좌관이 있어도 제가 먹을 건 스스로 챙기는 편입니다.”

제르딘은 여전히 발레린에게 육포를 내밀었다. 발레린은 그를 살짝 쳐다봤다. 그가 육포를 든 자신의 손을 눈짓했다.

“혹시 취향에 맞지 않으십니까?”

“아니요!”

발레린은 다급히 제르딘의 손에 있는 육포를 집었다. 그 탓에 제르딘의 손과 닿았다. 제르딘이 멈칫하며 발레린을 쳐다봤다.

발레린은 너무나 기쁜 나머지 제르딘을 볼 겨를도 없었다. 그저 머릿속에는 제르딘이 준 육포를 받았다는 생각밖에 없었다.

제르딘은 발레린을 물끄러미 보다가 천천히 옆에 앉았다. 발레린은 머릿속이 환해져서 제르딘이 바로 옆에 앉는 것도 눈치채지 못했다.

그때 그로프가 개꿀개꿀 울었다. 발레린이 놀라며 고개를 돌리다 제르딘과 눈이 마주쳤다. 그는 발레린 손에 있는 육포를 눈짓하며 말했다.

“소금 간을 거의 하지 않아서 맛이 없을 수도 있습니다.”

“아니요! 오히려 전 좋아요.”

“좋다고요?”

“네.”

“맛이 정말 없을 텐데.”

발레린은 고개를 내저으며 육포를 한 입 먹었다. 정말로 간을 전혀 안 했는지 여러 겹으로 쌓인 종이를 씹는 느낌이었다. 발레린의 얼굴이 서서히 굳어지자 제르딘이 피식 웃었다.

“제가 원래 먹던 육포라서 그렇습니다. 전 간이 밴 음식을 잘 못 먹어서요.”

“왜요?”

제르딘은 발레린을 잠시 보다가 천천히 말했다.

“속이 역하거든요.”

순간 발레린은 제르딘이 어떤 사람인지 떠올렸다. 늑대 수인과 반쯤 섞인 사람이었다. 발레린이 놀란 눈으로 보자 제르딘은 한쪽 입꼬리를 올렸다.

“공녀를 놀라게 할 생각은 없었습니다. 어차피 저에 대해선 알고 있으니 짐작할 줄 알았는데.”

“전 왕자님이 그런 음식을 주로 드시는 줄 몰랐어요. 책에서도 늑대 수인에 대해선 정보가 별로 없었거든요. 그저 늑대 수인이 얼마나 악독하고 늑대 수인의 피가 섞이면 얼마나 큰 부작용이 있는지에 대한 내용만 많아서 다른 정보는 얻기 힘들었어요.”

“그럴 만합니다. 왕국에서도 늑대 수인에 대한 정보는 거의 없앴으니까요.”

“늑대 수인과 예전에 왕궁의 터에 대해서 다퉜던 문제 때문이죠?”

제르딘이 고개를 끄덕였다.

“따지고 보면 왕족이 먼저 늑대 수인이 살던 곳에 쳐들어온 건 맞으니까요.”

발레린은 눈을 동그랗게 뜨며 제르딘을 쳐다봤다.

“왕자님이 그렇게 말씀하실 줄은 몰랐어요.”

제르딘이 천천히 발레린에게 시선을 돌렸다. 그는 한쪽 입꼬리를 올렸다.

“제게 온전한 왕족의 피가 흐르지 않아서 그런지도 모르죠.”

“그래도 왕자님은…….”

“오늘 보름달이 뜰 겁니다.”

“보름달이요?”

발레린이 묻자 오히려 제르딘이 진지하게 물었다.

“저에 대한 소문 못 들으셨습니까?”

“들었긴 하지만 저는 그게 다 사실이라고 생각하지 않아서요.”

발레린의 어깨 위에 있던 그로프도 개꿀개꿀 울었다. 제르딘은 무감한 목소리로 말했다.

“소문은 사실입니다.”

“…….”

“제가 피를 토하며 숨을 헐떡이는 것도 하인들이 모두 사라진 것도.”

“하지만 왕자님께서 사람을 잔인하게 없애는 분은 아니시잖아요.”

“잔인하게 없애지는 않았지만 저 때문에 사람들이 왕궁을 떠나긴 했죠.”

제르딘의 목소리는 너무나 공허했다. 발레린은 괜히 신경이 쓰여 제르딘을 살폈다. 그때 눈이 마주쳤다. 제르딘은 미소를 지으며 발레린이 든 육포를 가리켰다.

“다 먹기에는 맛이 없기는 하죠?”

발레린은 재빠르게 고개를 내저으며 육포를 한 입 뜯었다. 발레린이 육포를 먹으며 제르딘을 슬쩍 쳐다봤다. 그는 은근히 입꼬리를 올리며 발레린과 시선을 맞췄다. 그 시선은 아무래도 낯설었다.

특히 웃음기를 띤 제르딘의 얼굴은 난생처음 볼 정도였다. 발레린은 마음속에서 무언가 벅차오를 찰나 시선을 앞으로 돌렸다. 그러곤 육포를 우적우적 씹었다. 질 좋은 고기인지 씹는 동안 고기 특유의 구수한 맛이 입안에 배어들었다.

발레린은 여전히 제르딘의 시선을 느끼며 문득 궁금한 것을 물어보았다.

“그런데 왕자님은 밖에 자주 다니셨나요?”

발레린이 슬쩍 쳐다보자 제르딘이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어렸을 때 자주 밖을 돌아다녔습니다. 왕궁에 계속 있으니 답답해서요.”

발레린은 제르딘의 어린 시절이 궁금했다. 물론 세드릭스 부인에게 들은 이야기가 있긴 하지만 너무나 단편적이었다.

발레린은 제르딘의 삶 모든 것을 알고 싶었다. 그가 그동안 어떻게 살아왔는지도 궁금했고 어떤 생각으로 왕궁에 있었는지도 궁금했다. 그러나 하나하나 물어보면 제르딘이 피곤해할까 싶어서 차마 더 물을 수 없었다.

발레린이 그저 고개를 끄덕이며 가만히 있자 제르딘이 문득 말했다

“안 궁금합니까?”

뜻밖의 말에 발레린이 고개를 들자 제르딘이 차분히 말했다.

“난 공녀가 탑에서 어떻게 지냈는지 궁금한데 공녀도 내가 어렸을 때 어땠을지 궁금할 것 같아서요.”

“왕자님도 제가 어떻게 지냈는지 궁금하다고요?”

발레린이 눈을 동그랗게 뜨자 제르딘은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전 공녀가 탑에서 어떻게 지냈는지 궁금합니다. 저 못지않게 무척 답답했을 것 같은데.”

발레린은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정말 답답했어요. 제가 어머니를 죽인 사람으로 낙인까지 찍히니까 정말 슬프기도 했고요. 심지어 제가 말하는 건 모두 미친 사람이 하는 소리로 인식되니까 더 답답하기도 했어요.”

제르딘은 고개를 끄덕이며 발레린의 말에 집중했다. 오랜만에 세심히 들어 주는 사람이 있어 발레린은 기쁘게 입을 열었다.

“그리고 아버지가 해인저 부인과 결혼하는 것을 보니까 정말 슬펐어요. 분명히 해인저 부인이 어머니를 그렇게 만들었는데 아버지는 아무것도 모르고 결혼까지 했으니까요.”

발레린은 그때를 생각하자 마음속이 불같이 타오르는 듯했다. 하지만 이젠 지나간 일이었고 사건도 해결됐으니 발레린은 차분히 마음을 가라앉히고 말을 이었다.

“그렇게 억울해해도 아무도 제 말을 들어 주지 않고 심지어 아버지까지 저를 아예 잊고 있어서 저는 정말로 답답했어요. 그나마 버틸 수 있었던 건 어머니가 해 주신 말씀 덕분이었어요.”

“어머니가 해 주신 말씀이요?”

발레린은 고개를 끄덕였다.

“울어 봤자 내 편은 없을 테지만 웃으면 온 세상이 저를 밝게 볼 거라는 말이에요.”

“…….”

“어머니의 말씀은 맞는 말이었어요. 제가 탑 안에서 해인저 부인의 결혼식을 보면서 울어 봤자 아무도 제게 관심을 가져 주지 않았어요. 그나마 그로프만 제 옆에서 저를 위로해 줬을 뿐이죠.”

발레린은 그로프를 쳐다봤다. 그로프는 발레린과 눈이 마주치자 시원스럽게 개꿀개꿀 울었다. 발레린은 미소를 짓고는 제르딘에게 말했다.

“그래서 그 이후부터 저는 굳이 울지 않고 제가 해야 할 일을 했어요. 아무도 제게 관심을 두지 않고 음식도 제대로 주지 않으니 제가 할 수 있는 것이라곤 탑에 버려진 물건을 고치고 버려진 책을 보면서 사는 것뿐이었어요.”

“그사이에 해인저 모녀가 공녀에게 독을 주었고요?”

발레린은 고개를 끄덕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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