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초록빛 저주의 공녀님-71화 (71/130)

71화

발레린은 고개를 끄덕이곤 그로프를 쳐다봤다. 괜히 제르딘과 더 시선을 마주하고 있어 봤자 그를 더 피곤하게 할 것 같아서였다.

그때 그로프가 고개를 갸웃거리며 물었다.

“그나저나 왜 갑자기 동굴이 무너진 걸까요?”

“모르겠어. 독사가 조심하라고 했는데 원래 지반이 약한 것 아닐까? 아니면 이곳에서 무언가를 했을 수도 있고.”

발레린은 주변을 둘러봤다. 이상하게 이곳은 모래가 무척이나 많았다.

“그러고 보면 이상해. 원래 동굴은 석회 물질이나 용암 물질로 만들어진다고 봤는데, 모래로 만들어진 동굴은 한 번도 들어 보지 못했어.”

“이곳에서 이상한 실험을 한 것 아닐까요? 그래서 지반이 약해졌을 수도 있고요.”

그로프의 말에 발레린은 다시 주변을 둘러봤다. 이곳은 넓은 모래가 뒤덮인 곳이었다. 발레린이 의아해하는 사이 제르딘이 일어났다.

“제가 주변을 둘러보고 오겠습니다.”

“왕자님 혼자요?”

제르딘은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혼자는 위험하지 않을까요?”

“어차피 화살과 칼은 어릴 때부터 배웠고 그 외에도 다양한 무술을 익혀서 문제없습니다. 일반적인 피도 아니니.”

발레린은 그 말을 들어도 걱정이 되었다.

“그래도 혹시 이상한 생물 같은 것이 튀어나올 수 있지 않을까요? 아까 뱀에게 듣기론 이곳에 독 있는 생물이 많대요. 물론 저한테는 괜찮은데 왕자님께는 위험할 수 있으니까…….”

“공녀를 위해서도 멀리 가지는 않겠습니다. 금방 돌아올게요.”

발레린은 이 상황이 참으로 안타까웠다. 발목이라도 괜찮았다면 제르딘과 함께 주변을 탐색했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으로서는 걷는 것도 무리였다.

“죄송해요. 왕자님, 같이 가지도 못하고…….”

“아닙니다. 어차피 잠깐 주변만 살피고 오는 것이라서 그렇게 깊이 생각하지 않아도 됩니다.”

그러곤 제르딘은 무릎을 굽혀 앉아 발레린 옆에 작은 칼을 놓았다. 발레린이 의아하게 보자 제르딘이 설명해 주었다.

“혹시 모르니까요. 제가 금방 돌아오긴 하겠지만.”

발레린은 책에서 칼을 자주 봤다. 하지만 이렇게 눈앞에서 보니 기분이 이상했다. 제르딘은 발레린의 얼굴을 살피며 물었다.

“혹시 칼을 사용할 줄 모르면…….”

“아니에요. 이렇게 잡는 것 맞죠?”

발레린이 능숙하게 칼을 잡자 제르딘은 조금 놀란 얼굴이었다.

“어떻게 잘 아십니까?”

“예전에 칼에 관한 책을 읽었거든요. 그리고 혹시라도 남이 반격하면 이렇게 찌르는 거고요?”

발레린이 능숙하게 칼을 휘두르자 제르딘은 꽤 집중하며 바라봤다.

“50년 전에 유행하긴 했지만 확실히 정확한 방법인데 이것도 책에서 배운 겁니까?”

“네, 이전에 살인 사건에 대한 책을 봤는데 상대방이 이렇게 칼을 휘둘렀다고 하더라고요. 그게 무척 인상 깊었는데 아직도 기억이 나네요.”

발레린은 칼을 신기해하며 바라봤다. 제르딘은 잠시 물끄러미 보다가 천천히 일어났다.

“역시 공녀는 제 상상 이상입니다. 어쨌든 금방 다녀오겠습니다.”

제르딘은 반대편으로 걸어갔다. 발레린은 아까 제르딘이 한 말을 생각하며 그의 뒷모습을 멍하니 보았다.

‘발목만 아니었다면 왕자님과 같이 갔을 텐데.’

발레린은 무척이나 아쉬웠다. 그러다 곧 제르딘이 한 말이 발레린의 머릿속을 찔렀다.

‘……요즘 발레린 때문에 피곤한 일도 생기고 있지만.’

피곤. 그것도 자신 때문에 생기는 피곤한 일. 발레린은 고개를 푹 숙였다. 다른 것은 생각하지 않고 그저 멍하게만 있었다.

그때 콧속에 달콤하고 새콤한 냄새가 들어왔다. 아까는 나지 않던 냄새였다.

발레린은 곧바로 고개를 들어 주변을 살폈다.

“주인님, 왜 그러십니까?”

그로프가 급히 묻자 발레린이 코를 킁킁거리며 말했다.

“그로프, 냄새나지 않아?”

“냄새요?”

발레린이 힘차게 고개를 끄덕였다.

“달콤하고 새콤한 냄새가 나. 분명 아까는 못 맡아 본 냄새인데.”

발레린은 주변을 둘러봤다. 하지만 아까와 마찬가지로 모래만 가득 있을 뿐 특별히 눈에 띄는 것도 없었다.

발레린은 다시 고개를 숙여 코를 킁킁거렸다. 이제는 냄새만 생각했다. 그때 묘하게 강한 냄새가 코끝을 스쳤다.

발레린은 눈앞에 있는 모래를 자세히 바라봤다. 그러다가 손으로 모래를 파기 시작했다.

“주인님, 뭐 하는 겁니까?”

“여기에서 냄새가 나는데 혹시 몰라서.”

발레린이 대뜸 모래를 파내기 시작하자 주변에는 모래가 점점 쌓여 갔다. 그로프는 도와줄 수 없어 발레린을 지켜보기만 했다. 그때 발레린이 손을 멈췄다. 거의 발레린의 상체가 들어갈 만큼 모래가 파인 지점이었다.

발레린은 곧바로 고개를 들었다.

“그로프, 여기 뭔가 있어.”

그로프는 눈을 동그랗게 뜬 채 발레린을 쳐다봤다.

“뭐가 있는 겁니까? 혹시…….”

“독이 있는 것 같은데?”

“독이요?”

발레린이 고개를 끄덕였다. 곧 손을 들어 그로프 앞에 보여 주었다. 발레린의 새하얀 손에 묻은 것은 초록빛 액체였다.

“플린 독이야. 사과 맛이 나는 독 말이야.”

발레린이 활짝 미소를 지었다. 그러곤 곧바로 손가락에 묻은 독을 맛보았다. 발레린의 얼굴이 더 밝아졌다.

“역시 사과 맛이 나는데?”

“주인님, 저도 한번 먹어 보고 싶습니다!”

그로프의 성화에 발레린은 땅을 더 파 보았다. 곧 초록빛 물이 스멀스멀 모래 알 속에 스며들었다. 발레린은 모래알을 떼고서 그로프에게 손가락을 대었다. 그로프는 혀를 내어 손가락에 있는 독을 맛보았다.

빠른 혀가 몇 번 발레린의 손에 닿은 후 그로프의 입꼬리가 대번에 올라갔다.

“주인님, 이렇게 순수한 사과 맛은 처음 먹어 봅니다.”

“그렇지? 어떻게 여기에 독이 있을까? 아까는 분명 이렇게 강한 향이 나지 않았거든.”

“시간이 지나면서 땅속에 있던 독이 스며든 것 아닐까요?”

발레린은 모래를 더 파 보았다. 그러자 초록빛 물이 더 스며들기 시작했다.

“여기에 대체 왜 이렇게 많은 독물이 있는 걸까?”

“이곳에서 독으로 실험을 하고 남은 독을 모두 묻은 것 아닙니까?”

“그러고 보면 동굴인데도 모래가 있는 게 이상하긴 했어. 그럼 이곳에 독을 다 버리고 난 뒤 모래를 덮은 건가?”

“왠지 그럴 것 같습니다.”

그때 꼬르륵 소리가 들렸다. 발레린은 자신의 배를 쳐다봤다. 점심을 맛있게 먹었긴 하지만 밖에서 활동하고 시간이 지나다 보니 배가 금방 꺼졌다.

발레린은 주린 배를 움켜쥐고서 독을 찍어 먹었다. 확실히 상큼한 사과 맛이 맛있긴 했다. 발레린은 모래를 더 파 보았다. 그러자 주변에 있던 플린 독이 서서히 위로 차오르기 시작했다. 그로프도 배가 고픈지 플린 독이 차오르는 웅덩이를 내려다봤다.

발레린은 그로프에게 손을 내밀었다. 그로프는 눈치 빠르게 발레린의 손으로 올라왔다. 발레린은 그로프를 웅덩이 아래로 살짝 내린 뒤 독을 퍼먹기 시작했다. 그로프도 혀를 내어 빠르게 독을 핥아먹었다.

그렇게 발레린이 독으로 배를 채우던 때였다.

“공녀?”

익숙한 목소리에 발레린은 고개를 들었다. 제르딘이 서 있었다. 아까와 같이 멀끔한 모습에 발레린은 환하게 웃으며 외쳤다.

“왕자님! 주변은 어떠셨어요? 혹시 이상한 생물은 없었나요?”

제르딘은 차분히 발레린에게 다가오며 말했다.

“그런 생물은 없었습니다. 그나저나 뭐 하시는 겁니까?”

마침내 제르딘은 발레린이 파 놓은 웅덩이를 보았다. 그의 표정이 대번에 일그러졌다.

“공녀, 이건…….”

“플린 독이에요. 상큼한 사과 향이 나는 독인데, 순수한 맛이라서 오랜만에 먹으니 무척 맛있네요.”

제르딘은 약간은 넋이 나간 얼굴이었다. 발레린은 미소를 짓고는 초록빛이 나는 독을 퍼먹었다. 그로프도 옆에서 같이 먹으면서 개꿀개꿀 울었다.

“괜찮으십니까?”

나직이 울리는 말에 발레린이 고개를 들어 제르딘을 보았다. 눈이 마주치자 그가 웅덩이에 눈짓했다.

“이곳에 있는 독은 아무래도 위험할 것 같은데.”

“어차피 독일 뿐인데요. 거기다 플린 독은 그렇게까지 위험한 독은 아니에요.”

“위험한 독이 아니라고요?”

“네, 다른 독보다는 그래도 독성이 낮아요. 대체로 잡초를 없앨 때나 마력이 있는 물건을 소독할 때 사용하는 건데…….”

그때 발레린은 말을 멈추고서 그로프를 쳐다봤다. 그로프도 눈을 동그랗게 뜨고서 발레린을 바라봤다.

“설마 여기에…….”

발레린은 말을 다 끝내지 못했지만 재빨리 웅덩이를 더 파기 시작했다. 그때 제르딘이 나서며 발레린의 어깨를 살짝 잡았다.

“공녀, 대체 무슨 일입니까?”

그 말에 발레린은 손을 멈추고서 제르딘을 올려다봤다. 걱정을 잔뜩 하는 듯 제르딘의 눈썹이 일그러졌다.

“발목도 안 좋은데 그렇게 앉아 있으면 더 나빠질 겁니다. 그리고 여긴 아직 제대로 조사도 이루어지지 않은 곳이라 아무리 공녀가 독에 강하다고 해도 위험할 수 있습니다.”

발레린은 눈을 깜빡이며 제르딘을 쳐다봤다. 차마 말이 나오지 않았다. 제르딘은 무려 걱정을 하고 있었다. 심지어 발레린이 독에 강하다는 것을 알면서도.

너무나 친절한 태도에 발레린은 마음이 벅차오르다가도 제르딘이 말한 ‘피곤’을 생각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