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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록빛 저주의 공녀님-70화 (70/130)

70화

제르딘은 먼저 두 길을 둘러본 뒤 기사에게 말했다.

“내가 이쪽 길로 갈 테니 나머지는 다른 쪽 길로 가.”

그때 보좌관이 뒤늦게 제르딘에게 뛰어갔다.

“왕자님, 안 됩니다. 우선 다른 길은 나중에 가기로 하고 다 함께…….”

“어차피 여기 온 이상 굳이 일을 더 만들 필요 없잖아. 각자 나눠서 길이 끊어지면 돌아오는 걸로 해.”

발레린은 고개를 끄덕이며 보좌관 옆으로 걸어갔다. 제르딘이 그 모습을 유심히 지켜봤다.

“공녀?”

“네?”

“왜 그쪽으로 가는 겁니까?”

“왕자님께서 저를 불편해하실까 봐…….”

“전혀 불편하지 않으니 이리 오세요.”

“괜찮으세요?”

“네.”

제르딘은 마음을 바꿀 생각이 없어 보였다. 발레린이 주변을 둘러보자 보좌관도 어쩔 수 없는 듯 고개를 숙였다. 할 수 없이 발레린은 제르딘 곁으로 갔다. 그가 가까이 와도 된다고 했지만 발레린은 왠지 모르게 발걸음이 떨어지지 않았다.

발레린이 일정 거리에서 멈춰 서자 제르딘이 말했다.

“혹시 저와 가기 싫다면…….”

“아니요! 그건 아니에요.”

발레린의 어깨 위에 있던 그로프가 울었다.

“개꿀개꿀.”

제르딘은 그로프를 잠시 쳐다보다가 길을 나섰다. 제르딘이 나서자 왕실 친위대가 뒤따라왔다. 발레린은 제르딘의 뒤를 따르며 그의 뒷모습을 뚫어지게 쳐다봤다. 넓은 어깨가 한눈에 보였다.

어차피 제르딘이 앞서고 있었기에 그의 얼굴은 보지 못했다. 그래서 발레린은 원 없이 제르딘의 뒷모습을 바라봤다.

제르딘은 왕궁에서 보던 모습과 달랐다. 무엇보다 그는 지친 기색이 없었다.

‘하긴 매일 산책을 한다고 들었는데.’

발레린이 멍하게 생각하며 걸어갈 때였다. 순간 제르딘이 멈춰 섰다. 그 탓에 발레린은 그의 등에 부딪혔다. 곧바로 제르딘이 돌아서 발레린의 팔을 잡았다.

“괜찮으십니까?”

닿는 숨결이 가까웠다. 발레린은 놀라서 눈을 깜빡였다. 차마 말이 나오지 않았다. 그때 그로프가 울었다.

“개꿀개꿀.”

제르딘은 눈썹을 찌푸리며 그로프를 보았다. 그로프가 고개를 갸웃거리자 제르딘은 발레린의 팔을 천천히 놓아주었다. 그러나 그의 시선은 여전히 발레린에게 향했다.

“아무래도 드레스로 이곳을 걷기에는 힘들어 보이는데 지금이라도…….”

“아니에요! 전 진짜 안 힘들어요.”

실제로 발레린은 드레스가 조금도 거슬리지 않았다. 거기다 그동안 꾸준히 운동을 해 왔기에 지치지도 않았다.

그때 부스럭 소리가 들렸다.

“저기, 왕자님, 이곳 지형이 이상한 것 같습니다.”

기사가 걱정스레 제르딘에게 말했다. 발레린은 발끝을 이리저리 움직여 보았다. 이상하게 자꾸 모래가 밑으로 꺼지는 것 같았다.

발레린이 고개를 들자, 순간 아래에 있던 모래가 완전히 내려앉았다. 발레린은 소리를 제대로 내지를 수도 없었다.

12. 과도한 친절

그렇게 얼마나 지난 걸까.

“공녀.”

익숙한 목소리에 발레린은 천천히 눈을 떴다. 제르딘이 다가와 무릎을 꿇고서 걱정스레 살폈다.

“괜찮으십니까?”

발레린은 고개를 끄덕이며 뒤로 물러났다. 제르딘은 굳은 얼굴로 발레린을 보았다. 발레린은 잽싸게 대답했다.

“전 괜찮아요.”

그러곤 곧바로 주변을 둘러봤다.

“그로프!”

그때 조금 떨어진 곳에서 개꿀개꿀 우는 소리가 들렸다. 발레린은 곧바로 일어나려다 순간 인상을 찌푸렸다. 제르딘이 급히 발레린에게 다가왔다. 그는 발레린의 발목을 쥐었다.

발레린이 놀라며 발목을 움찔하자 제르딘이 고개를 들었다.

“발목을 삔 것 같은데 괜찮겠습니까?”

발레린은 발목을 이리저리 돌려 보았다. 다시 아까와 같은 아픔이 솟아나기 시작했다. 발레린이 눈썹을 찌푸리자 제르딘이 말했다.

“아무래도 다친 것 같으니 여기서 기사들이 오기를 기다리는 게 나을 것 같습니다.”

“그런데 그분들이 이곳까지 찾을 수 있을까요?”

“저희가 빠진 곳이 명확하니 금방 찾을 수 있을 겁니다.”

발레린은 천장을 바라봤다. 여기저기 구멍이 뚫려 있어서 어느 곳에서 떨어진 건지 짐작이 가지 않았다. 발레린은 시무룩한 얼굴로 발목을 바라봤다.

그때 그로프가 펄쩍 뛰어와 발레린을 보았다.

“주인님.”

그로프의 목소리에 발레린은 서둘러 그로프를 손으로 데려왔다.

“그로프, 넌 다치지 않았어?”

“네, 전 다행히 다친 곳은 없습니다.”

“다행이야.”

발레린은 빙긋 웃으며 그로프를 어깨에 두었다.

“그런데 주인님, 발목은 괜찮습니까?”

“발목을 삐었대.”

발레린은 작게 한숨을 내쉰 뒤 주변을 둘러봤다. 주변에는 모래와 돌이 떨어져 있을 뿐이었다.

‘그러고 보면 그 뱀이 말해 준 것 같은데. 모래에 쉽게 빠질 수 있으니 조심하라고.’

새삼 발레린은 독사의 말이 고마웠다. 다만 너무나 갑작스러운 일이라 대비하지 못한 게 한이었다.

그때 발목이 다시 찌릿찌릿 아파 오기 시작했다. 발레린은 굳은 얼굴로 주위를 둘러봤다. 발목을 받칠 만한 것은 없었다.

“나뭇가지라도 있으면 좋을 텐데.”

그때 제르딘이 등에 달려 있는 막대를 떼어 냈다.

“왕자님, 그건…….”

발레린이 당황하며 말했지만 제르딘은 아무렇지 않은 듯 말했다.

“어차피 막대 없이도 들고 다닐 수 있습니다. 그리고 이렇게 해야 더 다치지 않습니다.”

제르딘은 심지어 자신의 옷을 잘라 내서 붕대처럼 발레린의 발에 고정했다. 그의 섬세한 손길에 발레린은 멍하니 바라만 보고 있었다. 특히 그의 손가락이 이렇게나 길고 남자다운지 몰랐다.

발레린이 넋을 놓고 보는 사이 제르딘이 고개를 들었다.

“한번 일어나 보시겠습니까?”

“네?”

“어쨌든 이곳을 나가려면 걷는 데 불편하지 않아야 하니까요.”

발레린이 고개를 끄덕이자 제르딘이 불쑥 다가왔다. 발레린이 놀라며 물러나자 그가 차분히 말했다.

“혼자 일어나기 힘들 겁니다.”

그러곤 제르딘은 발레린의 어깨를 가볍게 잡고서 고개를 돌렸다. 순간 시선이 맞닿아 발레린은 아무 생각도 떠오르지 않았다.

“천천히 일어나시면 됩니다.”

“…….”

“공녀?”

제르딘이 시선을 고정하자 발레린은 불쑥 상체를 들었다. 그때 발이 아리기 시작했다. 제르딘이 옆에서 낮게 속삭였다.

“괜히 빨리 일어나려고 하지 말고 천천히 일어나세요.”

심지어 제르딘은 똑같은 말을 두 번씩 반복하고 있었다. 발레린은 제가 들은 것이 맞나 생각하다가 이내 천천히 발을 움직였다.

그나마 제르딘의 도움을 받으며 일어나니 발목이 크게 아프지는 않았다.

“고맙습니다. 왕자님.”

발레린은 제르딘을 보지 않고 대답했다. 이렇게까지 가까이 있는 것은 처음이었다. 그때 가까이에서 목소리가 들렸다.

“발을 움직이는 데 불편함은 없습니까?”

발레린은 발을 살짝 움직여 보았다. 확실히 발을 받쳐 주는 부목이 있으니 그다지 아프지는 않았다.

“괜찮아요.”

그러면서 제르딘과 눈이 마주쳤다. 단숨에 닿는 거리였다. 그것도 입술에 제르딘의 숨결이 닿는 것처럼 뜨거웠다.

발레린은 기분이 이상했다. 심장이 멎는 것처럼 숨 쉬는 것도 인지가 되지 않았고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거기다 너무 가까워서 심장 소리까지 들리는 것 같았다.

제르딘도 발레린에게 시선을 떼지 않았다. 무슨 일이라도 생길 것 같은 분위기에 발레린은 고개를 내렸다. 괜히 제르딘을 더 쳐다보고 있다가는 마음만 괴로울 것 같았다.

발레린은 그에게 살짝 물러났다.

“괜찮아요. 이젠.”

그 말을 하면서 발레린은 제르딘이 잡은 어깨를 슬쩍 바라봤다. 그때 그가 말했다.

“정말 괜찮으십니까?”

유난히 목소리가 가까웠다. 낮게 떨어지는 목소리는 은근히 귓속을 자극했다. 어느 것 하나 튀는 말은 없는데도 발레린의 심장은 쿵쿵 뛰었다.

발레린은 제르딘의 시선을 피하며 뒤로 물러났다. 그때 제르딘이 멈칫하며 발레린을 쳐다봤다.

발레린은 앉으려고 무릎을 굽혔다. 그제야 제르딘이 발레린을 조심스레 앉혀 주었다. 그때 그로프가 아래로 펄쩍 내려갔다.

그로프는 개꿀개꿀 울면서 말했다.

“주인님, 괜찮으십니까?”

“발목만 빼고 괜찮아. 이렇게 다쳐 본 적은 처음이라 신기하기도 하고.”

발레린은 이내 밝은 얼굴로 발목을 쳐다봤다. 제르딘이 빠르게 처치해 준 덕분에 발목은 알맞게 고정되어서 더 아프지는 않았다.

그로프는 발레린의 발목으로 폴짝폴짝 뛰어갔다. 그로프는 발레린의 발목을 할짝할짝 혀로 핥았다. 꽤 간지러워서 웃으며 보자 그로프가 돌아봤다.

“제 독기로 주인님의 발목을 핥았으니 이제 조금 있으면 나을 겁니다.”

그로프의 눈은 여느 때보다 의지가 굳어 보였다.

“그로프, 고마워.”

“제가 할 수 있는 게 이것뿐이라서 안타까울 뿐입니다. 차라리 제가 다쳤으면 좋았을 텐데…….”

“그로프, 괜히 그런 말 하지 마.”

발레린이 단호하게 말하자 그로프가 발레린에게 폴짝폴짝 뛰어왔다.

“발목은 언제 나을까요?”

“모르겠어. 이렇게 다쳐 본 적이 없어서.”

발레린이 멍하게 발목을 보고 있을 때 제르딘이 말했다.

“짧게는 일주일, 길게는 한 달 정도 걸릴 겁니다.”

제르딘이 발레린을 돌아봤다. 그의 하늘빛 눈동자는 꽤 짙은 빛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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