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9화
기사가 발레린에게 인사했다. 발레린은 미소를 지으며 인사를 하고는 제르딘에게 말했다.
“황금 마검이 있는 동굴은 철 성분이 많아서 붉은빛이 진하게 보인다고 하더라고요.”
그때 제르딘이 시선을 내렸다.
“붉은빛이요?”
“네, 아마도 붉은빛을 띤 흙 주변에 있는 동굴에 황금 마검이 있을 것 같아요.”
제르딘은 그저 고개를 끄덕였다. 크게 놀라는 구석은 없었다.
“혹시 이전에 비슷한 말을 들으셨나요?”
“들어 보긴 했는데 직접 찾아가진 않았습니다.”
“왜요?”
“허무맹랑한 소리라고 믿었으니까요.”
“그래도 여러 책을 찾아보면 모두 비슷한 말을 하고 있었어요. 황금 마검은 두 자루이고 그걸 만든 장인이 따로 보관하고 있다고요.”
“오히려 그렇게 비슷한 말을 하고 있어서 더 믿지 못했던 겁니다. 다들 똑같은 말을 하니 그저 한 사람이 지어낸 이야기라고 생각했죠.”
“혹시 왕자님은 지금도 황금 마검이 두 자루란 걸 지어낸 이야기라고 생각하시나요?”
제르딘이 문득 돌아봤다.
“아니요.”
발레린은 조금 흥분해서 말했다.
“그럼 정말 황금 마검이 두 자루라는 걸 믿으세요?”
제르딘은 고개를 돌렸다.
“아니요. 그것도 믿지 않습니다.”
“그럼…….”
“저는 아까도 말했다시피 공녀의 의견을 존중하는 겁니다.”
발레린이 말없이 쳐다보자 제르딘이 차분히 말했다.
“공녀, 너무 기대하지 마세요. 이 세상 일이 생각하고 기대해서 다 풀리는 건 아니니까요.”
그 말에 발레린은 마음속이 푹 찔리는 듯했지만 개의치 않고 대답했다.
“만약 황금 마검이 없더라도 이곳에 온 건 헛된 일이 아니라고 생각해요. 어쨌든 얻어 가는 게 있겠죠.”
제르딘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유난히 발레린을 뚫어지게 바라봤다. 발레린 의아하게 생각하는 사이 제르딘이 말했다.
“공녀는 제가 생각하는 것보다 더한 생각을 하는 것 같습니다.”
“더한 생각이요?”
“저는 그렇게까지 생각하지 못하거든요. 그저 얻는 게 없으면 없다고 생각할 뿐인데.”
그때 어깨 위에 있던 그로프가 말했다.
“저는 주인님 말처럼 황금 마검이 없다고 해도 분명 이곳에서 얻어 가는 게 있다고 생각합니다. 탑 안에 갇혀 있었을 때도 꽤 많은 것을 얻었지 않습니까?”
발레린은 그곳에서 먹은 독을 생각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긴 해. 탑 안이 아니었다면 언제 그렇게 많은 독을 먹어 봤겠어?”
독 생각을 하자 발레린은 입에 침이 고이는 듯했다. 독을 먹은 지도 참 오래되었다. 그동안 배도스 공작이 몸을 사린 탓도 있었다.
발레린은 힐끗 제르딘을 살폈다. 그의 얼굴은 어디서 봐도 눈에 띄었다. 그때 제르딘이 묘한 미소를 지었다. 발레린은 황급히 시선을 내렸다.
“제게 물어볼 것이 있습니까?”
발레린이 놀라며 고개를 들자 곧바로 눈이 마주쳤다. 발레린은 눈을 깜빡이며 시선을 돌렸다.
‘왜 웃어 준 거지?’
발레린은 마음속이 더 심란해졌다. 하지만 깊이 생각하지 않았다. 제르딘은 별생각이 없었을 것이다.
‘아닌데, 이전과 다르긴 한데.’
그 생각을 하자마자 발레린은 한숨이 나오려 했다. 이제는 기대하면 안 되었다. 제르딘은 처음부터 사랑이라는 감정을 줄 수 없다고 했고 짝사랑도 피곤하다고 했다.
그 생각을 하자 발레린은 떠들썩하던 마음속이 안정되는 듯했다. 약간의 생채기는 났어도.
그렇게 발레린이 멍하게 걷는 사이 제르딘이 문득 멈춰 섰다.
“이곳인 것 같습니다.”
발레린이 고개를 들자 커다란 동굴 입구가 보였다. 동굴은 특이하게 붉은빛을 띠었다.
“붉은 동굴이에요!”
발레린이 크게 말하자 제르딘은 부드럽게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때 발레린의 어깨 위에 있던 그로프가 속삭였다.
“왕자가 또 웃었습니다.”
그로프도 유심히 보고 있었던 모양이었다. 발레린이 그로프를 보자 그로프가 나직이 말했다.
“아까부터 왕자는 주인님을 보고 웃었습니다. 그것도 여러 번이요.”
발레린은 그로프에게 작게 속삭였다.
“그로프, 별거 아닐 거야. 다르게 생각해 보면 왕자님이 왕궁을 나와서 기분이 좋으실 수도 있어.”
그동안 제르딘은 왕궁을 무척이나 답답하고 권태로운 곳으로 봤었다. 처음에 발레린이 왕궁을 보며 감탄할 때도 제르딘은 지긋지긋하다고 했었다.
그 생각을 하자 제르딘이 왜 이렇게 갑자기 웃음이 많아진 건지 이해가 되었다.
“혹시 왕자님도 좋으세요?”
그 말에 제르딘이 멈칫하며 발레린을 바라봤다. 그의 표정에는 당혹감이 서려 있었다.
“뭘 말입니까?”
“궁을 나와서요. 저는 새로운 풍경을 이렇게 가까이 보는 게 무척 좋거든요.”
발레린이 미소를 짓자 그제야 제르딘이 고개를 끄덕였다.
“이런 곳은 이전에 와 본 적이 있어서 그다지…….”
그 말을 하면서 제르딘은 발레린을 보았다. 그는 가만히 지켜보다가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오랜만에 밖으로 나오니 좋긴 합니다.”
그 말에 발레린은 절로 활짝 웃었다. 제르딘은 그 모습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약간 넋이 나간 얼굴이었다. 발레린은 어딘가 익숙한 그 얼굴에 저도 모르게 빤히 쳐다봤다.
그때 그로프가 울었다.
“개꿀개꿀.”
제르딘은 이내 고개를 돌렸다. 그의 얼굴은 약간 굳어 있었다. 은근히 화가 난 듯한 표정에 발레린은 그에게 더 말을 꺼내지 않았다.
마침 동굴 앞이었다. 주변에 있던 기사들이 주변을 둘러봤다. 그때 기사 한 명이 비명을 지르며 뒤로 물러났다. 발레린이 힐끗 보니 뱀 한 마리가 대가리를 들고 혀를 날름거리고 있었다.
발레린은 곧바로 그로프에게 말했다.
“그로프, 내 주머니에 들어올래? 혹시 위험할까 싶어서.”
그로프는 고개를 끄덕였다. 발레린은 그로프를 손에 얹어 주머니에 넣었다. 그러곤 곧바로 뱀이 있는 곳으로 뛰어갔다. 제르딘이 빠르게 발레린의 뒤를 따라갔다.
발레린은 뱀 앞에 서서 쉭쉭 소리를 냈다.
뱀은 고개를 빼 들었다가 발레린을 이리저리 살폈다. 그러다 눈을 맞추고는 혀를 날름거렸다. 발레린이 쉭쉭거리자 뱀은 고개를 끄덕이고는 이내 몸을 낮춰 다른 곳으로 사라졌다.
발레린은 곧바로 고개를 돌려 제르딘을 보았다.
“왕자님, 뱀 언어가 통해요!”
발레린이 밝게 말했지만 제르딘의 얼굴은 그다지 밝지 않았다. 놀란 것도 아니고 그저 굳은 얼굴이었다. 발레린은 개의치 않고 곧바로 주머니에서 그로프를 꺼냈다.
“뱀은 갔습니까?”
“원래 이곳에서 먹이 활동을 했는데, 최근 사람이 많아져서 있는 게 불편할 거라고 말하니 갔어. 당분간은 이곳에 오지 않을 거야.”
“역시 주인님이십니다. 어떻게 뱀 언어를 그렇게 잘하십니까?”
“그 책 덕분이야. 나도 사실 뱀 언어가 통할 줄 몰랐거든. 내가 생각했던 대로 대화가 통하니까 신기해.”
“그렇긴 합니다. 그나저나 그 뱀은 독사 아니었습니까?”
발레린은 놀란 눈으로 주변을 둘러봤다. 그러나 뱀은 이내 어디로 사라졌는지 보이지 않았다.
“독사였어?”
“네, 대가리가 세모 모양이었습니다. 이빨도 꽤 날카로웠고요.”
“그래도 뱀에게 물려도 난 멀쩡해. 내 독이 웬만한 뱀보다 독하니까.”
“하지만 물리면 아프지 않습니까?”
“그건 그래. 물리면 아프고 자국이 남겠지.”
그때 낮은 목소리가 울렸다.
“공녀.”
발레린이 놀라며 고개를 돌리자 제르딘이 서 있었다. 그는 아까와 같은 얼굴이었다. 약간은 어이없는 듯하면서도 굳은 얼굴.
발레린은 뱀이 물러난 기쁜 소식을 빠르게 전했다.
“이제 뱀은 당분간 이곳에 오지 않는대요. 주변에 있는 뱀들에게도 전해 달라고 했어요. 이곳에 사람이 많이 다녀서 뱀도 다칠 수 있다고요.”
“정말 뱀과 말이 통한 겁니까?”
제르딘의 목소리는 약간 낮았지만 정말로 궁금한 듯했다. 발레린은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까만 곱슬머리가 격하게 흔들렸다.
“뱀도 동의하고 물러갔으니까요. 심지어 저보고 이곳은 모래가 많으니 발이 빠지지 않도록 조심하라고 했어요.”
“…….”
“그나저나 책으로만 배웠는데 막상 써먹으니까 신기해요.”
발레린이 미소를 짓자 제르딘은 그저 바라보기만 했다. 발레린은 아무 반응도 없는 제르딘을 보며 걱정스레 살폈다.
“괜찮으세요?”
제르딘은 헛웃음을 지으며 고개를 내저었다.
“오히려 제가 공녀께 괜찮으냐고 물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전 괜찮아요!”
제르딘은 발레린을 빤히 보았다. 특히 그의 시선은 발레린의 입술에 있었다. 발레린이 입꼬리를 올리자 제르딘의 표정이 아까보다는 한결 풀렸다.
“다행이네요.”
발레린은 미소를 짓고는 동굴을 이리저리 둘러봤다.
“여긴 확실히 붉은빛이 많아 보여서 황금 마검이 있을지도 모르겠는데요.”
“공녀, 너무 기대하지는 마세요.”
발레린은 고개를 끄덕였다. 제르딘은 먼저 앞장서서 동굴로 들어갔다. 시원한 바람이 술술 불어오는 곳이었는데 처음 들어가는 동굴에 발레린은 설레는 마음이었다.
동굴 안은 바깥과 다르게 서늘했다. 주변에 있던 기사들이 하나둘씩 등을 켰다. 마침 보좌관이 발레린 곁에 등을 켜 주었다. 그가 계속 들고 있자 발레린은 보좌관에게 손을 내밀었다.
“제가 들게요.”
“아닙니다. 두 분을 보좌하는 게 제 일인데요.”
“아니에요. 등을 두 개씩 들고 있으면 힘들잖아요. 제가 들게요.”
발레린이 손을 내밀자 보좌관은 할 수 없이 등을 주었다. 발레린은 밝게 웃으며 등을 받았다.
“감사합니다.”
“오히려 제가 감사합니다. 이렇게까지 신경을 써 주시니.”
그때 앞서가던 기사가 소리쳤다.
“길이 두 갈래로 나누어졌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