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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록빛 저주의 공녀님-68화 (68/130)

68화

발레린이 깜짝 놀라 쳐다보자 제르딘이 말을 이었다.

“계약으로 맺어진 사이라도 정식으로 제출하려고 합니다. 이전에 왕족이 한 결혼 전통과 맞게 말입니다.”

발레린은 대답하지 못한 채 눈만 깜빡거렸다. 어차피 배도스 공작이 몰락하면 헤어질 사이인데 이렇게까지 제르딘이 신경 써 주는 것이 고맙다가도 지나치게 친절을 베푸는 게 아닌가 했다.

하지만 제르딘은 원래 그런 사람이니 발레린은 더 말하지 않았다.

그때 마차가 서서히 멈춰 섰다. 곧 문이 열리더니 보좌관이 고개를 들이밀었다.

“왕자님, 도착했습니다.”

발레린은 제르딘의 뒤를 이어서 마차에서 내렸다. 주변은 무척이나 평화로웠다. 바로 옆에는 유유히 강이 흐르고 있었고 주변에는 초원이 많았다. 발레린이 멍하니 풍경을 보는 사이 옆에서 보좌관이 말했다.

“왕자님, 현재 조사관이 먼저 조사한 곳은 남쪽 지역의 구역인데 이 구역은 지반이 질퍽하여 별로 좋지 않다고 합니다. 거기다 독사까지 출몰하고 있어서…….”

독사라는 말에 발레린은 눈을 동그랗게 뜨며 물었다.

“독사요?”

“다른 곳은 괜찮은데 유독 그곳만 독사가 많이 나온다고 합니다.”

“독사라면 저에게 맡기세요.”

그때 제르딘이 발레린을 돌아봤다.

“독사도 괜찮으십니까?”

“어차피 저와 같은 독기를 가지고 있는걸요.”

“마차에서는 그로프가 독사에게 물렸다고 하지 않았습니까?”

“원래 뱀은 개구리를 잡아먹잖아요. 하지만 사람은 물기만 할 뿐 잡아먹지는 못해요.”

“그렇긴 하지만 그래도 위험하지 않겠습니까?”

“괜찮아요. 예전에 독기 있는 생물과 잘 지내서 독사쯤은 아무 걱정 없을 것 같아요.”

발레린은 탑 안에 살 때 여러 생물과 친하게 지낸 적이 있었다. 대표적인 생물이 독거미였다.

‘지금쯤 잘 있겠지.’

발레린의 숟가락을 늘 깨끗이 닦아 주던 독거미였다.

‘그러고 보니 인사도 제대로 안 하고 왔네. 수줍음이 꽤 많던 독거미였는데.’

발레린이 멍하니 생각하는 사이 보좌관이 조심스레 물었다.

“왕자비님?”

“네?”

발레린이 놀라며 바라보자 보좌관이 조심스레 말했다.

“아무래도 왕자비님이 독사가 있는 곳에 앞장서시는 것은 무리인 듯합니다. 그래도 왕자비님이신데 위험한 일은…….”

“전 정말 괜찮아요!”

그때 제르딘이 나섰다.

“공녀, 직접 나서는 건 위험합니다.”

그 말에 발레린은 오히려 제르딘이 걱정되었다. 어차피 제 몸은 독기로 가득 차서 독사의 독 따위 아무것도 아니었다. 그런데 그런 곳에 제르딘이 간다고 생각하니 발레린은 내심 불안했다.

“그럼 왕자님은요?”

갑자기 묻는 말에 제르딘이 돌아봤다. 그의 얼굴이 묘하게 예민해 보였다. 그 모습에 발레린은 잽싸게 말을 이었다.

“왕자님도 그곳에 가면 독사 때문에 위험할 수 있잖아요.”

옆에 있던 보좌관이 급히 나섰다.

“저희 왕실 친위대가 호위할 겁니다. 그 부분에 대해선 왕자비님께서 그다지 걱정을 하지 않으셔도…….”

“그럼 저도 같이 가면 되겠네요! 왕자님을 지키는 기사들이 있으니 저도 많이 위험하지는 않을 것 같은데.”

발레린이 활짝 웃으며 말하자 보좌관이 제르딘의 눈치를 보았다.

“공녀, 정말 괜찮겠습니까?”

“전 정말 괜찮아요. 뱀 언어를 책으로 배우기도 했고요.”

“뱀 언어도 있습니까?”

“널리 인정받은 책은 아니지만 그래도 실제로 그게 통하는 건지 알고 싶어요. 전 아직 그 책 언어를 기억하고 있거든요.”

제르딘은 살짝 굳은 얼굴로 발레린을 바라봤다. 약간은 어이없는 것 같기도 했다. 발레린은 그의 모호한 태도에 빠르게 말했다.

“그리고 오히려 독사가 있으면 왕자님을 지켜 드리고 싶기도 하고요.”

“저를 지켜 주고 싶다고요?”

“네!”

발레린이 대답하자마자 제르딘이 묘한 눈빛으로 바라봤다. 그때 옆에서 그로프가 개꿀개꿀 울며 말했다.

“저희 주인님께서는 누구보다 더 열심히 황금 마검에 대해서 찾으셨습니다. 그러니 이렇게 탐색하는 데에 주인님의 권한도 있다고 생각합니다.”

제르딘은 그로프를 물끄러미 보더니 이내 발레린을 보았다.

“제가 여기 온 목적도 공녀의 의견을 지지하기 위해서니 공녀의 말에 따르겠습니다.”

발레린은 절로 미소가 나왔다.

“고맙습니다. 왕자님.”

그러면서 제르딘을 쳐다봤다. 정말로 발레린이 늘 바라 왔던 완벽한 이상형이었다. 동화 속에 나오는 왕자님. 친절하고 배려심이 깊고 사람을 진정으로 생각할 줄 아는, 여태껏 발레린이 봐 온 사람과는 차원이 다른 사람이었다.

사랑이라는 감정만 있다면 더할 나위 없겠지만……. 발레린은 그 생각을 하자 마음속이 씁쓸했지만 미소를 잃지 않았다. 그래도 이렇게 제르딘이 자신의 의견을 존중해 주니 감사할 따름이었다.

심지어 처음에 제르딘은 황금 마검이 두 자루가 있다는 말을 믿지 않았다.

‘그래도 이렇게 내 의견을 따르면서 같이 가 주다니.’

발레린은 그것 하나만으로도 제르딘이 좋았다. 그렇게 발레린은 제르딘을 따라나섰다.

그때 옆에서 보좌관이 나섰다.

“왕자님, 그래도 왕자비님까지 나서시면 위험할 수 있습니다.”

“어차피 공녀는 이곳까지 함께 왔어. 나를 지켜 준다는데 굳이 거절하기도 어렵고.”

제르딘은 그 말을 하면서 발레린을 쳐다봤다. 그의 시선은 이전보다는 한층 부드러웠다. 그 시선에 발레린은 즐겁다가도 이내 시선을 내렸다. 더 쳐다보다가는 제르딘을 귀찮게 할 것 같아서였다.

대신 그로프가 제르딘을 뚫어지게 쳐다봤다. 그로프는 제르딘을 보고는 발레린에게 속삭였다.

“지금 제르딘은 주인님을 빤히 쳐다보고 있습니다.”

발레린이 고개를 들자 제르딘은 자연스레 시선을 돌렸다. 그는 이내 먼저 앞장섰다. 발레린은 주변을 살피다가 뒤늦게 제르딘을 따라서 걸었다. 하지만 발레린이 일정한 거리를 유지하자 제르딘이 멈춰 서서 발레린을 돌아봤다.

“공녀, 이런 곳에선 굳이 거리를 두지 않아도 된다고 하지 않았습니까?”

“그렇긴 한데…… 정말 괜찮으세요?”

“뭘 말입니까?”

“물론 이전에 말씀하시긴 했지만 아무래도 저는 납득이 가지 않아서요. 분명 궁전에 있을 땐 제가 근처에 가면 낯설다고 가까이 오지 말라고 하셨잖아요.”

“…….”

“그리고 저는 이 정도 거리가 적당한 것 같아요. 너무 가까이 가면 왕자님이 불편하실 것 같고…….”

“전혀 불편하지 않습니다.”

발레린이 눈을 동그랗게 뜨자 제르딘이 말했다.

“제 가까이에서 걸으세요.”

제르딘은 유난히 힘주어 말하는 듯했다. 이런 상황에서 더 거절하기도 이상했고 이미 제르딘의 말에 따르기도 했기에 발레린은 제르딘 가까이 갔다. 갑자기 바뀐 제르딘의 태도가 의아하긴 했지만 발레린은 더 생각하지 않고 부지런히 걸었다.

거리가 가깝다 보니 제르딘의 재킷 소매가 손등에 살짝살짝 닿았다. 발레린은 애써 신경 쓰지 않으려 해도 자꾸만 닿는 옷에 온통 신경이 곤두섰다.

그때 제르딘의 손이 살짝 닿았다. 따뜻한 살결이 스쳐 지나간 것뿐이지만 발레린은 화들짝 놀라며 멈춰 섰다.

제르딘이 문득 돌아봤다. 발레린은 차마 말이 떠오르지 않았고 제르딘도 먼저 말을 꺼내지 않았다.

순간 묘한 분위기가 흘렀다. 무언가 주변을 꽉 감싸는 것처럼 묵묵하고 고요했다. 제르딘의 시선은 여전했다. 그는 딱히 서두르지도 않으며 발레린을 보았다.

어깨 위에서 그로프가 개꿀개꿀 울었다. 발레린은 어색한 미소를 짓고는 먼저 걸어갔다. 제르딘은 다시 발레린의 걸음에 맞춰 걸었다. 발레린은 제르딘을 신경 쓰지 않기 위해 괜히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주변은 넓은 초원이었다. 사람의 손길이 닿지 않은 곳이었는데 저 멀리 양 떼가 보일 정도로 평화로웠다. 오랜만에 시야가 탁 트인 곳에 와서 발레린은 저도 모르게 얼굴이 환해졌다.

그렇게 발레린이 밝은 얼굴로 주변을 둘러보고 있을 때였다. 뒤따라 걷던 보좌관이 제르딘에게 속삭였다.

“이곳에 있는 동굴은 총 세 군데입니다. 한 군데는 저희가 이미 둘러봤는데 아무것도 발견하지 못했습니다. 나머지 두 곳을 가 봐야 하는데…….”

그때 제르딘이 멈춰 섰다. 그가 멈춰 서자마자 따라오던 사람들이 고개를 숙이며 멈췄다. 제르딘을 주변을 둘러보았다. 따르는 사람들이 꽤 많았다. 그는 보좌관에게 말했다.

“그럼 나눠서 가면 되겠네.”

“예? 하지만…….”

“발레린과 나는 같이 움직이고, 다른 기사들은 다른 동굴을 살피라고 해.”

“왕자님, 괜찮으시겠습니까?”

“발레린이 지켜 준다고 하는데 괜찮겠지.”

제르딘이 싱긋 웃었다. 발레린은 처음 보는 제르딘의 미소에 잠시 넋이 나갔다가 그로프가 개꿀개꿀 울고 나서야 겨우 정신을 차렸다.

여태껏 제르딘이 저렇게 말한 적이 없어서 더 그랬다.

“공녀?”

갑자기 부르는 소리에 발레린은 고개를 번쩍 들었다. 제르딘은 대수롭지 않은 목소리로 말했다.

“동굴에서도 공녀와 함께 움직일 겁니다.”

발레린은 고개를 끄덕이며 제르딘을 따라갔다. 그의 주변으로는 기사 한 명이 있었다. 발레린이 기사를 힐끔 보자 제르딘이 말했다.

“왕실 친위대입니다. 제가 가장 아끼는 기사이기도 하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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