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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록빛 저주의 공녀님-65화 (65/130)

65화

“왕자비님, 음식을 더 가져올까요?”

“아니, 이제 배가 불러서.”

옆에 있는 그로프도 개꿀개꿀 울었다. 발레린은 그로프를 보며 빙긋 웃고는 루네스를 쳐다봤다. 루네스는 이내 그릇을 다 치우고서 발레린에게 말했다.

“왕자님께서 오후에 델프스에 있는 동굴 시찰을 나가신다고 해요.”

발레린은 고개를 끄덕였다.

“만약 왕자비님께서 불편하시면 나오지 않아도 된다고 하셨는데…….”

“아니야! 물론 가야지.”

그로프도 놀란 눈으로 발레린을 쳐다봤다. 발레린은 다른 시선에는 개의치 않고 웃으며 루네스에게 말했다.

“어쨌든 난 왕자님께 최대한 도움이 되고 싶으니까.”

“왕자님께선 왕자비님이 불편하실 수 있다고 하셨는데, 괜찮으신가요?”

“괜찮아.”

그로프도 발레린의 눈치를 보았다. 루네스는 이내 고개를 끄덕이고는 물러났다. 루네스가 완전히 나가자 그로프가 말했다.

“주인님, 정말 괜찮으십니까?”

발레린은 아무렇지 않은 듯 고개를 끄덕였다.

“괜찮아, 그로프.”

“하지만 왕자와 같이 다니면 기분이 더 안 좋을 수 있습니다. 아무래도 왕자는…….”

“어차피 여기는 황금 마검을 찾으러 왔잖아. 그러니까 그걸 찾고 배도스 공작의 몰락을 지켜보면 되겠지.”

발레린의 눈동자는 여느 때보다 반짝반짝 빛이 났다. 아까 전까지 서럽게 울던 얼굴은 어느새 생기가 가득했다.

발레린은 음식을 먹고 난 뒤 늘 하던 것처럼 몸을 움직였다. 마음은 뒤숭숭했지만 그래도 할 일은 해야 했다.

그로프는 그저 발레린을 지켜봤다. 발레린은 몸을 움직이면서 창문을 바라봤다. 저 멀리 강물이 유유히 흘러가는 흐름은 무척이나 평화로워 보였다.

그때 그로프가 말했다.

“주인님, 만약 저라면 이곳에서 당장 나갔을 겁니다.”

발레린은 뒤를 돌아보며 그로프와 눈을 맞췄다.

“그로프, 어차피 여기서 내가 할 일은 정해져 있잖아. 그리고 난 누구보다 왕자님께서 이 왕국의 왕이 되셨으면 좋겠어. 그건 내 진심이기도 하고.”

“하지만…….”

“처음부터 왕자님께선 내게 사랑을 줄 수 없다고 하셨잖아. 그렇게 경고하기도 했고. 괜한 내 욕심이었어.”

발레린은 이번에야말로 운명이 제 마음대로 되지 않는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탑 안에만 있을 때는 그저 희망을 가지며 탑을 빠져나가기를 바랐다. 그리고 그 바람은 발레린이 기다리고 기다려 왔던 대로 술술 잘 풀렸다.

하지만 사람의 마음은 그와는 많이 달랐다. 아무리 노력해도 쉽지 않았다. 오히려 제르딘이 피곤하다고 생각하니 더 마음이 아팠다.

발레린은 벽에 걸린 보랏빛 드레스를 보며 다리를 움직이다가 이내 창문 밖을 내다봤다.

그로프가 폴짝 뛰어서 발레린 곁으로 왔다. 발레린은 미소를 지으며 그로프를 내려다봤다. 그로프는 커다란 눈을 깜빡이며 발레린과 눈을 맞췄다.

“주인님, 그래도 저는 늘 주인님 곁에만 있겠습니다.”

“고마워, 그로프, 역시 너밖에 없어.”

발레린이 빙긋 웃자 그로프가 개꿀개꿀 울었다. 그렇게 운동을 한 뒤 발레린은 창턱에 팔을 댄 채 볼을 괴었다. 시원한 바람이 솔솔 불어와 발레린의 머리카락을 살짝 흔들었다.

발레린은 눈을 감고 바람을 맞으며 생각에 잠겼다. 그로프는 발레린을 지켜보다가 저 멀리 풍경을 바라봤다. 평화롭기 그지없는 모습이었다.

그때 발레린이 말했다.

“그로프, 가만히 생각해 보니까 여기선 왕자님을 짝사랑하는 것뿐만 아니라 내가 해야 할 일이 많아.”

“무슨 일이요?”

“왕자님을 괴롭히는 무리를 없애는 거 말이야.”

“…….”

“그런 사람들을 없애면 나중에 후손들이 더 잘 살 거야. 그리고 역사책에 우리가 이룬 업적들이 적힐 수도 있겠지.”

발레린은 순간 심장이 두근거리는 것을 느꼈다. 그동안 내내 책에서만 보던 일이 이제는 눈앞에 있었다.

“그렇게 배도스 공작이 완전히 몰락하면 왕자님이 왕이 될 거고 그건 찬란한 역사의 시작일 거야.”

발레린은 왕이 된 제르딘을 생각하며 빙긋 웃었다. 그 상상만으로도 발레린은 행복했다. 꼭 제르딘을 짝사랑해서가 아니라 정말로 그가 훌륭한 왕이 되었으면 했다. 행복한 미래를 위해서.

발레린을 지켜보던 그로프는 옆에서 개꿀개꿀 울며 말했다.

“역시 주인님은 대단하십니다.”

“뭐가?”

“저 같으면 하루 종일 방에 처박혀서 울고 있을 겁니다. 예전에 제가 디디카 호수에 있을 땐 저를 괴롭히던 개구리들 때문에 저는 밖에 나오지도 않고 계속 울었거든요.”

발레린은 따뜻한 손으로 그로프를 감싸 주었다. 그로프는 발레린의 손에서 고개를 살짝 빼든 채 말을 이었다.

“하지만 주인님은 확실히 저랑 다르십니다. 오히려 이럴 때일수록 할 일을 생각하니 역시 주인님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어쨌든 난 왕자님을 도와주고 싶어. 왕자님은 정말 잘되었으면 좋겠어. 물론 왕자님의 마음은 내가 어떻게 할 수 없지만.”

발레린은 그것 하나만 아쉬웠다. 만약 제르딘이 제 마음을 받아 주기만 한다면 발레린은 더 소원이 없을 것이다. 하지만 이젠 그 마음을 접어야 했다.

발레린은 다시 저 멀리 흐르는 강물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제르딘을 생각하며 차분히 말했다.

“왕자님이 내 짝사랑을 피곤해하시니 좋아하는 걸 티 내면 오히려 내가 이기적인 사람이 될 거야.”

“…….”

“어차피 내 사랑은 왕자님이 원하시지 않으니까.”

발레린은 그 사실만으로 마음이 아렸지만 이내 다른 일을 생각했다. 여전히 제르딘을 위해서 할 일이 산더미였다.

발레린은 곧바로 탁자 앞에 앉았다. 그로프는 뒤늦게 따라와서 발레린이 종이에 쓰는 것을 물끄러미 보았다.

“뭐 하시는 겁니까?”

“우선 구체적으로 할 일을 적어 보는 거야.”

“제르딘을 위해서요?”

발레린은 고개를 끄덕이며 말을 덧붙였다.

“매시드 왕국을 위해서이기도 해.”

그로프가 호기심을 가지며 쳐다보자 발레린이 설명했다.

“생각보다 할 일이 많아. 어쨌든 지금은 황금 마검을 하나 더 찾아서 배도스 공작 주위에 있는 루티스 백작과 겔렌트 남작을 먼저 쳐야 해. 그 다음에는 배도스 공작 차례지. 그리고 배도스 공작이 몰락하면 왕자님이 왕이 되는 거야!”

발레린은 빙긋 웃으며 왕이 된 제르딘을 상상했다. 지금보다 더 멋진 모습이 머릿속에 그려졌다. 왕이 된다면 왕의 정식 복색인 붉은 망토를 걸치고 다녀야 했고 왕의 상징인 왕관과 더불어……. 그러나 그 옆을 상상하다가 발레린은 서둘러 다시 종이를 확인했다.

하마터면 제르딘 옆에 있는 다른 왕비까지 상상할 뻔했다. 발레린은 거기까지는 차마 더 상상하지 못했다.

발레린은 그렇게 할 일을 차곡차곡 종이에 써 내려갔다.

1. 황금 마검 찾기

2. 감히 왕자님을 모욕한 루티스 백작과 겔렌트 남작을 치기

3. 배도스 공작 몰락하게 하기

4. 왕자님의 멋진 왕위 계승식☆☆☆

특히 발레린은 마지막에 별 모양을 가장 많이 그려 놓았다. 제르딘을 위한 일이기도 한 동시에 왕국을 지키는 것이나 다름없었다.

“배도스 공작 같은 사람에게 왕국이 넘어가는 건 볼 수 없지.”

발레린이 읽은 『천년 왕국사』에선, 배도스 공작 같은 사람에게 왕국이 넘어가면 늘 왕국이 망했고 몇십 년 동안 백성들의 삶은 무척이나 궁핍하고 힘들었다.

작정하고 주변 사람을 독살하고 제 이익만 챙기는 사람이 왕국 사람들을 제대로 생각해 줄지도 의문이었다.

‘다들 제 배만 채우기 바쁘겠지.’

어쨌든 발레린은 배도스 공작보다 제르딘이 훌륭한 왕이 될 거라고 생각했다. 비록 제르딘은 감정을 줄 수 없다고 했지만, 그래도 그에겐 일말의 친절함과 사람을 생각해 주는 배려심이 있었다.

발레린은 그걸 착각해서 희망이라고 생각했지만.

이내 발레린은 다른 생각은 접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러곤 짐 가방을 이리저리 뒤적거렸다.

그로프는 폴짝폴짝 뛰어와 발레린 옆으로 와서 고개를 번쩍 들며 발레린을 살폈다.

“주인님, 지금은 뭘 하시는 겁니까?”

“황금 마검에 대해 적어 놓은 종이를 찾고 있어. 분명 여기 어딘가에 넣어 둔 것 같은데…….”

발레린의 짐은 별로 없었기에 짐 가방도 한 개뿐이었다. 루네스가 다 챙겼다고 했으니 짐 가방 어딘가에 분명 있을 것이다.

그렇게 부지런히 여러 물건을 뒤적거릴 때 문득 발레린의 손에 종이가 닿았다. 발레린은 곧바로 종이를 들어 올렸다.

“찾았어!”

발레린은 그 자리에서 종이를 펴서 이리저리 살폈다. 그동안 책에서 찾은 내용 중 델프스에 대한 말은 없었지만, 동굴에 대한 몇 가지 실마리는 있었다.

“그러고 보면 황금 마검을 보관한 동굴은 붉은빛이 강하다고 하네. 철 성분이 많이 섞여 있어서 그런가 봐.”

“그럼 붉은 동굴을 위주로 보는 게 어떻겠습니까?”

발레린은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곤 다른 종이에 동굴에 대한 실마리를 모두 적었다.

“그러니까 장인이 황금 마검을 보관한 동굴은 마검을 만든 곳 주변에 있는데, 이 중 붉은빛을 띤 곳을 찾아야 해.”

그때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렸다.

“들어와.”

그 말이 들리자마자 문이 열리더니 루네스가 들어왔다.

“왕자비님, 시찰단이 모두 꾸려졌다고 하네요. 지금 나가시면 돼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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