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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록빛 저주의 공녀님-64화 (64/130)

64화

제르딘은 눈썹을 찌푸린 채 발레린을 쳐다봤다. 그는 화가 나 보였지만 발레린은 개의치 않고 빠르게 말했다.

“왕자님은 계속 도와 드릴게요. 배도스 공작의 몰락을 위해서요. 하지만 저는 이제 왕자님께 더 다가가지 않을게요.”

발레린은 빠르게 몸을 돌려 나왔다. 뒤에서 부르는 소리가 들렸지만 차마 뒤돌아보지 못했다.

발레린이 저 혼자 좋다고 제르딘을 짝사랑한 것은 아니었다. 그에게 최대한 도움이 되도록, 그가 탑 안에서 발레린을 빼온 것처럼 발레린도 제르딘을 지켜 주고 싶었다.

하지만 발레린의 사랑은 그렇지 못했다. 제르딘을 더 피곤하게 했으며 어떨 땐 그를 곤란하게 했다.

발레린은 저도 모르게 훌쩍였다. 어느새 얼굴에 눈물이 주룩주룩 흐르고 있었다.

“주인님.”

그로프는 무슨 말을 할지 몰라 그저 발레린만 불렀다.

“그로프, 난 괜찮아.”

하지만 발레린은 엉엉 울었다.

‘이제 울지 않기로 했는데.’

그러나 이번만은 발레린은 눈물을 참을 수 없었다. 어머니가 돌아가신 이후로, 해인저 부인이 아버지와 결혼한 이후로 처음으로 서럽게 우는 것이었다. 그만큼 발레린은 마음이 너무나 아팠다.

11. 붉은빛 동굴

발레린은 곧바로 방으로 돌아왔다. 바로 옆방이라서 그리 멀지도 않았다. 발레린이 훌쩍거리며 침대에 눕자 그로프가 다가왔다.

“주인님, 염려치 마세요. 어차피 왕자는 주인님께 그런 감정을 가지지 않는다고 말하지 않았습니까?”

“하지만 이렇게 결혼까지 무르려 할 줄은 몰랐어. 내가 왕자님께 방해만 됐던 건지도 몰랐고.”

“그래도 계약이 있지 않습니까? 배도스 공작이 몰락할 때까지 결혼은 유지하지 않겠습니까?”

“그건 모르겠어. 왕자님께서 저렇게 말씀하셨는데. 심지어 대신전에 결혼 서약서도 제출하지 않았다고 했잖아.”

그로프는 말없이 발레린을 쳐다봤다. 발레린은 눈물을 닦으며 중얼거렸다.

“그동안 너무 내 생각만 했던 것 같아. 왕자님께서 그렇게까지 나 때문에 피곤한 줄은 몰랐는데.”

“아닙니다. 그래도 왕자는 주인님께서 많이 힘써 주신 덕분에 몇몇 사건을 해결하지 않았습니까?”

“그건 그렇지만 그래도 내가 귀찮았겠지.”

발레린은 손수건으로 코를 풀었다. 그녀의 코끝이 약간 붉었다. 새하얀 피부에 붉은 기가 유난히 눈에 띄었다. 그로프는 발레린을 걱정스레 쳐다봤다.

그때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렸다. 발레린은 깜짝 놀라며 문을 쳐다보곤 그로프에게 곧바로 고개를 돌렸다.

“왕자님일까?”

그 소리가 떨어지기 무섭게 문밖에서 말소리가 울렸다.

“왕자비님!”

루네스의 목소리였다. 발레린의 어깨는 절로 축 처졌다.

“들어와.”

문이 열리더니 루네스가 들어왔다. 발레린은 혹시나 싶어서 루네스의 주변을 살폈다. 하지만 루네스만 있을 뿐 아무도 없었다.

루네스는 발레린의 시선을 따라 뒤를 돌아봤다가 발레린을 쳐다봤다.

“혹시 기다리는 분이 있으셨나요?”

“아니.”

발레린이 잽싸게 대답했지만 거짓말이었다. 발레린은 은근히 제르딘이 와 주기를 기다렸다. 하지만 모두 자신의 바람일 뿐이었다.

‘왕자님은 나를 그저 피곤하게 여기실 뿐인데.’

발레린은 한숨을 내쉬곤 손수건을 루네스에게 건넸다.

“루네스, 이 손수건 좀 세탁해 줄래?”

루네스는 손수건을 조심스레 받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는 발레린을 이리저리 살펴보더니 조심스레 물었다.

“왕자비님, 무슨 일 있으셨나요?”

발레린은 작게 한숨을 내쉰 뒤 말했다.

“무슨 일이 있다기보다는 진실을 알았어.”

“진실이요?”

루네스의 눈빛이 초롱초롱 빛났다. 발레린은 아까 제르딘이 한 말을 루네스에게 전할 수는 없었다. 배도스 공작과 엮여 있는 데다가 제르딘도 무척이나 조심스러운 듯 보였다. 거기다 보좌관이 많이 걱정하고 있으니 일일이 다 말하기에는 발레린도 내키지 않았다.

“그런데 지금은 모두 말하기 곤란해. 어쨌든 여러 일이 얽혀 있어서.”

루네스는 차분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다 그녀는 발레린의 손을 덥석 잡았다.

“왕자비님, 그래도 저는 왕자비님 편이에요.”

“내 편?”

루네스는 눈을 빛내며 고개를 끄덕였다.

“제 목숨은 왕자비님이 살려 주셨으니 제가 어떻게든 왕자비님을 위협하는 사람이 있으면 막아 드릴게요!”

발레린은 절로 미소가 나왔다.

“고마워.”

“뭘요, 그나저나 점심은 드셨어요? 아까 보니까 왕자님께서는 점심을 드시지 않는다고 하인들끼리 말하는 걸 들어서요.”

“왕자님이 점심을 안 드셨어?”

“생각이 없다고 하시던데요.”

발레린은 힘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점심이라도 드셔야 하는데.’

마음속에선 여전히 제르딘 생각뿐이었다. 하지만 생각은 아무 잘못이 없다. 그저 제르딘 옆으로 더 가지 않으면 되었다. 발레린은 눈물이 나올 뻔했지만 겨우 참고서 고개를 들었다.

“난 점심 아직 안 먹었는데 가져와 줄래?”

안 그래도 배가 고픈 참이었다. 이럴 때일수록 배를 채워야 생각을 더 많이 할 수 있었다. 옆에 있던 그로프도 개꿀개꿀 울었다.

“곧바로 가져올게요.”

루네스는 누구보다 빠르게 방을 나갔다. 발레린은 닫힌 문을 잠시 보았다. 아까는 무척이나 슬펐지만 이제는 그저 전생의 일을 떠올리는 것처럼 아득하기만 했다.

그때 그로프가 나직이 말했다.

“주인님, 마음 편히 생각하십시오.”

발레린은 고개를 끄덕였다.

“어차피 왕자님은 내게 그런 감정을 줄 수 없다고 하기도 했고 결혼은 언젠가는 끝나니까.”

사실이었다. 하지만 그 사실에 발레린은 너무나 마음이 아팠다.

“그로프, 내가 너무 많이 기대했나 봐. 적당히 기대할걸. 그랬으면 이렇게까지 슬프지는 않을 텐데.”

“뭐든지 적당히가 어렵습니다.”

“그렇긴 해. 내 마음이 이렇게 커지는 걸 알고 있으면서도 너무 많이 기대했나 봐. 적당히 기대했다면 이렇게까지 힘이 빠지지는 않을 텐데.”

발레린은 고개를 푹 숙였다가 말을 내뱉었다.

“그래도 나는 괜찮을 줄 알았어. 왕자님이 나를 사랑하지 않는다고 해도 그렇게까지 실망하지 않을 줄 알았는데…….”

발레린은 눈물이 나오려는 것을 꾹 참으며 닫힌 문을 바라봤다. 옆에서 그로프가 발레린의 손에 발을 얹었다.

“주인님, 언젠가는 이렇게 서러운 감정도 자연히 잊힐 겁니다. 이 순간은 그저 순간일 뿐이고요.”

순간은 그저 순간일 뿐. 발레린은 그 말이 유난히 마음에 들어왔다.

“고마워, 그로프. ‘순간은 그저 순간일 뿐’은 부다르 책에 나왔던 말이지?”

“맞습니다. 주인님 옆에서 볼 때 그 말이 무척 마음에 들었습니다.”

발레린은 옅은 미소를 지었다.

“좋은 말 해 줘서 고마워. 그래도 나는 왕자님을 좋아한 건 후회하지 않아. 언제 사람을 이렇게까지 좋아해 보겠어? 거기다 왕자님은 내가 여태껏 본 사람 중에 가장 완벽한걸.”

“그건 그렇습니다. 저도 지금까지 제르딘 같은 사람은 본 적 없는걸요.”

“그렇지? 확실히 왕자님은 누구나 반할 사람이라니까.”

그렇게 발레린은 가볍게 생각했다. 그러나 그런 제르딘에게 더 다가갈 수 없다고 생각하니 발레린은 또다시 우울해졌다. 그럼에도 이젠 눈물은 나오지 않았다. 더 울 기운도 남아 있지 않았다. 그리고 어머니의 말을 생각했다.

우울해 봤자 우울할 뿐. 발레린은 그 말을 생각하며 고개를 들어 벽에 걸린 보라색 드레스를 보았다. 그나마 보랏빛을 보니 우울함이 조금은 사라지는 듯했다.

그렇게 발레린이 보랏빛 드레스를 멍하니 보고 있을 때였다.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리더니 루네스가 들어왔다. 루네스는 탁자 위에 푸짐한 음식을 놓았다.

“왕자비님, 이곳 음식이 왕궁 음식과 많이 달라서 음식의 질이나 맛이 부족하겠지만 양해해 주세요.”

하지만 발레린의 눈에는 그저 맛있고 푸짐하게만 보였다.

“음식은 맛있어 보이는데?”

“그래요? 여기에 있는 요리사가 무척 걱정했어요. 왕자비님의 입맛에 맞을는지요.”

발레린은 곧바로 포크를 들어 샐러드를 맛보았다. 왕궁에서 먹는 샐러드와 다르게 꽤 상큼하긴 했지만 오히려 발레린은 상큼한 맛이 더 입맛에 맞았다.

“맛있어.”

발레린이 밝게 웃으며 말하자 그제야 루네스가 입꼬리를 올렸다.

“다행이에요. 그나저나 요리사는 왕자비님의 입맛이 많이 까다롭다고 생각하더라고요.”

“왜? 난 그다지 음식을 가린 적도 없는데.”

“그저 소문만 듣고 왕자비님이 특이하신 분이니 입맛도 까다로우실 거라고 생각한 것 같아요. 제가 아무리 왕자비님이 겉으로 특이해도 속은 무척 깊으신 분이라고 해도 그저 걱정만 했다니까요.”

발레린은 고개를 끄덕이며 음식을 우적우적 씹었다. 남이 자신을 까다롭게 생각하든지 말든지 신경 쓰이지 않았다. 단지 지금은 배가 고팠고 제르딘 외에 무언가 열중할 것이 필요했다.

발레린이 다른 생각은 접어 두고 부지런히 음식을 먹자 루네스는 인사를 하곤 방을 나갔다. 그로프도 발레린 옆에서 빠르게 귀뚜라미를 잡아먹었다.

정신없이 먹으니 어느덧 그릇에 있는 음식은 거의 다 비워졌다. 발레린은 만족스러운 마음으로 루네스를 불렀다. 루네스는 오자마자 빈 그릇을 보더니 놀란 눈으로 발레린을 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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