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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록빛 저주의 공녀님-63화 (63/130)

63화

“그렇지만 다른 방법으로 해도 되지 않습니까? 굳이 왕자비님을 실망시키는 방법을 쓰시는 이유가…….”

“그래야 확실해. 괜히 망설여 봤자 상황은 더 악화되겠지.”

“하지만 배도스 공작이 아직 건재하지 않습니까?”

“이 상황을 잘못 이용하면 배도스 공작이 받을 타격도 만만치 않을 거야. 감히 내가 결혼한 것도 속이고 그 청혼서를 받은 거니까.”

발레린은 순간 입을 막았다.

“대체 그 왕국은 어디에 있는 왕국입니까? 저는 왕국 이름도 처음 듣습니다.”

“배도스 공작이 일부러 나를 압박하려고 멋대로 만든 왕국 이름인지도 모르지.”

“왕자님께서 결혼하실 때 제가 축하 선물과 함께 많은 편지를 분류했습니다. 이 근처의 왕국은 모조리 왕자님이 결혼하신 것을 알고 있는데 대체…….”

“그래서 굳이 이 일을 크게 떠벌리고 싶지 않아. 내 선에서 확실하게 자르는 게 나아.”

“하지만 배도스 공작만 처리하면 되는 것 아닙니까? 멋대로 그 청혼서를 받아들였으니까요.”

“아직 내가 발레린과 한 결혼 서약서를 제출하지 않은 건 맞으니까.”

“왜 미루셨습니까?”

“발레린을 이용하는 것 같다는 생각이 끊이지 않아. 처음 발레린을 찾아갔을 때도 그런 이유로 찾아가기도 했고.”

“하지만 왕자비님을 탑에서 꺼내 주셨잖습니까. 그리고 해인저 모녀의 재판도 빠르게 처리하시고요.”

제르딘은 대답하지 않았다. 보좌관은 제르딘을 잠시 보다가 조심스럽게 말했다.

“그래서 저는 지금 왕자님께서 그 청혼을 완전히 거절하지 않고 보류하시는 게 이해가 안 갑니다. 완전히 거절하시고 공녀님과의 결혼 서약서를 제출하시면 깔끔한 것 아니겠습니까?”

“그 방법은 배도스 공작이 없을 때 가능한 이야기야. 지금 배도스 공작이 청혼서를 다짜고짜 받아들였으니 이걸 엮어서 배도스 공작까지 내보내는 게 가장 깔끔해.”

“왕자님, 지금 누구보다 왕자님을 생각하시는 분이 왕자비님이신데 이걸 이야기해 주시지 않는다면…….”

“어차피 발레린과의 서약서는 약식에 불과해. 제대로 정리해서 신전에 제출할 거야.”

“대신관이 조용한 걸 보면 이걸 알고 있는데 가만히 있는 겁니까?”

“발레린 때문인 것 같아.”

“왕자비님이요?”

“이전에 이야기를 나눴다고 들었는데 그때 꽤 친해진 것 같더군.”

“그게 가능합니까? 대신관은 어느 누구보다 자기만 생각하는 답답한 인물 아닙니까?”

“그러니까 더 신기한 노인네야. 옛날에는 나를 그렇게 못 잡아먹어서 안달이었는데.”

“그래서 요즘 신전에서 조용하군요. 이전에는 배도스 공작과 함께 이상한 말을 하는가 싶었는데.”

“그러니 오히려 이런 상황을 이용해서 배도스 공작을 몰아붙이면 돼.”

“하지만 이건 꽤 위험할 것 같습니다. 오히려 왕자님께서 그 왕국의 청혼서를 보류하시고 왕자비님과의 서약서도 제출하시지 않았다면 왕자님만 난처하신 상황일 겁니다. 심지어 왕자님께서는 정식으로 결혼도 하시지 않았습니까?”

“발레린과의 결혼은 무를 생각이야.”

“네? 그게 무슨 말입니까?”

가만히 듣고 있던 발레린도 심장이 쿵 내려앉는 듯했다. 발레린은 아무 생각이 나지 않았다. 그들의 말을 듣고 있을 때부터 그랬다. 새로운 사실에 흥분되기보다는 오히려 들을수록 깊은 호수 아래로 들어가는 기분이었다.

발레린이 멍하니 있을 때 제르딘이 말했다.

“발레린과 결혼하면서부터 일이 조금씩 어긋나고 있어. 사르티아 공작과 원로원 귀족들이 나를 은근히 두둔하고 있긴 하지만 배도스 공작을 칠 기미가 보이지 않아. 그리고 이번에야말로 그게 명확히 보이고.”

“그럼 왕자비님과의 결혼은 정말 무르실 예정입니까?”

“지금 상황에선 발레린과 결혼을 유지해 봤자 위험해.”

“그럼 정말 이름도 들어 보지 못한 왕국의 공주가 한 청혼을 받아들이신다는 말씀입니까?”

“그렇게 보이게끔 만들고 배도스 공작의 뒤통수를 칠 거야. 지금으로선 그게 최선이고.”

“만약 그게 성공한다면 배도스 공작은 정말로 이곳에 발길도 하지 못할 것 같습니다. 이전부터 왕자의 친척이라는 명목으로 자꾸 왕자님의 명령에 불복했으니까요.”

“이전부터 그렇게 봐줬던 것도 그 명분 때문이었지.”

제르딘의 눈빛이 한층 짙어졌다. 그는 차분하게 말을 이었다.

“배도스 공작은 왕궁에서 내 권력을 가로채고 멋대로 왕족을 무시하고 도움도 되지 않는 걸로 자꾸 나를 막고 이상한 소문을 퍼뜨렸지. 만약 친척이 아니었다면 진작 죽였을 거야.”

“거기다 왕자님의 주변을 모두 독살한 것도 배도스 공작 짓 아닙니까?”

“이젠 발레린이 있으니 그것도 함부로 못 하는 거지. 내가 있는 왕궁에는 독의 반입을 막았음에도 자꾸만 독살이 나왔던 것도 그들이 독을 이 왕궁 근처에 숨겼다가 사용해서였어. 그걸 발레린이 잘 찾아냈으니.”

“그러고 보면 왕자비님을 잘 데려오신 것 같습니다. 그러니 이번에라도 다르게 생각해 주시면 안 되겠습니까?”

제르딘의 얼굴이 대번에 굳었다.

“내가 아까 몇 번이나 설명한 것 같은데?”

“하지만 왕자님, 저는 아무리 생각해도 납득이 되지 않습니다. 대체 왜 이렇게까지 위험을 무릅쓰시는 겁니까?”

“어차피 오늘 보름달이 떠. 그럼 내가 아무리 애써도 내게 나타나는 증상은 막지 못해.”

제르딘은 보좌관을 보며 말을 이었다.

“난 그렇게 태어났으니까 바꿀 수 없는 거지.”

“그래도 이번 일은 다르지 않습니까? 왕자님께서 마음만 바꾸시면 편하게 가실 수 있습니다. 굳이 위험을 무릅쓰지 않더라도…….”

“그럼 배도스 공작은 늘 내 목을 조이며 다닐 텐데?”

“왕자님.”

“너도 내 옆에 있으면서 누구보다 잘 알지 않나? 배도스 공작은 내가 어릴 때부터 나를 무시하면서 왕이 될 자격도 없는 놈이라고 말했었지. 그리고 실제로 나를 죽이려고 많은 시도를 했었고.”

보좌관의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

“배도스 공작이 왕자님을 죽이려고 했다고요?”

제르딘은 여유롭게 술잔을 들어 물었다.

“아르렌 호수 기억하나?”

“기억하고 있습니다. 어릴 때 왕자님께서 자주 놀러 가시던 곳 아닙니까?”

“내가 거기서 놀다가 죽을 뻔한 것도 알고 있겠군.”

“근처에 있던 기사가 구해 드렸다고 했습니다. 지금 그 기사는 죽어서 없지만요.”

“원래 배도스 공작은 나를 그곳에서 죽이려고 했어. 그래서 주변에 사람이 오지 않게 막았지만 희한하게도 그곳에 몰래 낚시를 하러 온 기사가 나를 발견한 거야.”

제르딘이 미소를 지었다. 보좌관은 잔뜩 굳은 얼굴로 제르딘을 바라볼 뿐이었다. 제르딘은 술잔에 있는 술을 천천히 흔들며 말했다.

“기사가 날 구했고, 나중에는 배도스 공작이 그 기사를 죽였지.”

“배도스 공작이 그 기사까지 죽인 줄은 몰랐습니다.”

“내가 안 좋은 일을 겪을 때마다 배도스 공작이 얽히지 않은 적은 없었지. 늘 조사하다 보면 배도스 공작이 나왔고 그걸 증명하려고 하면 증거가 완전히 사라졌었어. 아예 그 말을 꺼내지도 못하게 말이야.”

“…….”

“처음에는 배도스 공작이 증거를 눈에 띄게 남겼지만 세월이 지나니 그것도 학습이 되었는지 아예 자기를 숨기고 아무 상관 없는 것처럼 증거를 숨겼지.”

보좌관은 말없이 제르딘을 쳐다봤다. 제르딘은 그 어느 때보다 감정을 보이지 않았다. 보좌관이 걱정스레 보자 제르딘이 말을 이었다.

“그리고 이젠 배도스 공작 스스로가 먼저 증거를 드러낸 거야. 그 청혼서를 수락하면서 말이야.”

“그럼 그 뜻이 뭡니까?”

“배도스 공작이 낭떠러지에 떨어지기 직전이라는 거지. 그러니 내내 숨기고 있던 걸 직접 드러내면서 나서는 거겠지.”

보좌관은 도저히 이해하지 못한 얼굴이었다. 그는 얼굴을 잔뜩 굳히며 내내 제르딘의 눈치를 봤다.

제르딘은 여유롭게 술잔을 들었다. 그가 한 모금 마셨을 때 보좌관이 급히 말했다.

“그러면 왕자님께서 자칫 위험해지실 수 있습니다. 그리고 지금 누구보다 왕자비님께서 고생하고 계시는데…….”

“발레린이 나를 어떻게 생각하고 있는지 잘 알아. 그리고 요즘 발레린 때문에 피곤한 일도 생기고 있지만…….”

발레린은 저도 모르게 앞으로 나갔다. 보좌관은 깜짝 놀란 얼굴로 발레린을 쳐다봤다.

“왕자비님, 언제 오셨습니까?”

하지만 발레린은 대답하지 않고 제르딘을 쳐다봤다. 제르딘도 발레린을 뚫어지게 보는 것은 마찬가지였다. 그의 얼굴은 아까보다 더 진지했다. 주변 분위기는 돌을 끼얹은 것처럼 무겁고 조용했다.

두 사람이 서로를 마주보고 있자 보좌관은 난처한 얼굴로 제르딘에게 고개를 숙이곤 그곳을 나갔다.

발레린은 울음이 나오려는 것을 겨우 참고 말했다.

“왕자님, 혹시 제 짝사랑이 피곤하신가요?”

제르딘은 잠시 말이 없다가 이내 차분히 말했다.

“피곤한 건 아닙니다. 그런데 결혼한 뒤에는 곤란한 일이 종종 생기고 있습니다.”

발레린은 미처 깨닫지 못했다. 늘 제르딘을 위한다고 생각했는데 오히려 자신만 생각한 것이 되었다. 발레린은 스스로도 당황스럽고 용납할 수 없어 고개를 숙였다.

“왕자님이 그렇게 생각하신다면 전 왕자님에 대한 사랑을 접을게요.”

“발레린, 제가 한 말은 그 뜻이 아니라…….”

“아니에요. 왕자님을 사랑하는 게 왕자님께 그렇게까지 누를 끼칠 줄 몰랐어요. 죄송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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