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2화
발레린은 활짝 웃으며 루네스에게 말했다.
“그럼 루티스 백작과 겔렌트 남작을 멀리 보내면 되겠네.”
루네스는 잠시 눈을 깜빡였다. 당황한 듯 말을 꺼내지 않는 루네스를 보며 발레린은 의아해했다.
“왜?”
루네스는 주변을 둘러보더니 황급히 발레린에게 속삭였다.
“무서운 말씀을 아무렇지 않게 하셔서요.”
“하지만 배도스 공작은 왕자님의 편을 들어 준 사람을 모두 독살했잖아. 진작 배도스 공작 주변에 있는 사람을 처리했어야 했어.”
발레린은 여태껏 그 생각을 하지 못한 것이 한탄스러울 지경이었다. 마침 호텔 문 앞이었다. 문지기가 발레린을 보며 격식을 갖춰 고개를 숙였다. 발레린은 그들에게 눈을 맞추며 인사를 한 뒤 호텔을 나갔다. 그 옆으로 루네스가 급하게 따라오며 물었다.
“왕자비님, 그럼 그분들을 어떻게 하시게요?”
“똑같이 하면 되지 않을까?”
“네? 그럼 두 분을…….”
루네스는 차마 말을 잇지 못했다. 발레린은 싱긋 웃으며 차분히 말했다.
“남을 죽이는 건 야만인이나 하는 짓이야. 책에서 봤는데 죽이는 것보다 더한 방법이 있어.”
“그게 뭔데요?”
그때 발레린은 멈춰 섰다.
“잠시만.”
발레린이 멈춘 곳은 아까 그로프가 풀쩍 뛰어간 큰 잎 식물이었다. 발레린은 주변을 둘러보며 그로프를 불렀다.
“그로프?”
그때 개꿀개꿀 소리가 들렸다. 발레린은 곧바로 소리가 들린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마침 그로프가 발레린에게 다가왔다.
“주인님!”
“그로프, 잘 쉬었어?”
그로프는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주인님께서 창문에서도 저를 봐주셔서 덕분에 잘 있을 수 있었습니다.”
“내가 창문에서 보는 걸 어떻게 알았어?”
“여러 창문 중에서 여길 쳐다보는 사람은 주인님밖에 없었습니다.”
발레린은 새삼 그로프의 시력에 감탄하며 손을 내밀었다. 그로프는 잽싸게 발레린의 손에 올라왔다. 그로프는 찬 곳에 오래 있어서 꽤 몸이 찼다.
“그로프, 춥지는 않아?”
“약간 춥긴 하지만 주인님의 온도 때문에 견딜 만합니다.”
발레린은 그로프를 손으로 잠시 감싸 주었다. 그러다가 손안에서 그로프가 외쳤다.
“주인님! 이제 괜찮습니다!”
꽤나 간절한 목소리에 발레린은 곧바로 한 손을 떼고서 그로프에게 물었다.
“그로프, 괜찮아?”
“네, 주인님 덕분에 괜찮습니다.”
발레린은 그나마 다행이라고 생각하며 그로프를 어깨 위에 올렸다. 그러자마자 옆에서 가만히 기다리던 루네스가 물었다.
“왕자비님, 아까 하시던 말씀 있잖아요.”
“무슨 말?”
발레린이 궁금해하자 루네스가 속삭이듯 발레린에게 말했다.
“죽이는 것보다 더한 방법이 있다고 하셨잖아요.”
그제야 발레린은 미소를 지으며 조잘조잘 설명했다.
“책에서 본 방법인데 사람을 아주 질리게 만들어서 스스로 나가떨어지게 하는 거야.”
“그게 가능한가요?”
“질리게 만드는 건 어렵지 않아. 그저 말꼬투리 하나 잡고 늘어지고 그 사람이 무슨 행동을 하면 안 좋은 쪽으로 부각시켜서 하나하나 해명하게 만들고 저들끼리 싸우게 두면 돼.”
발레린은 실제로 그렇게 해 보지는 않았지만 책에서 본 바로는 이런 방법을 쓰면 사람은 죽는 것보다 더한 압박을 받는다고 했다.
그때 루네스가 아까보다는 차분한 목소리로 말했다.
“듣는 것만 해도 벌써 지치네요.”
발레린의 어깨에 있던 그로프도 개꿀개꿀 울었다.
“그렇긴 하지만 차마 죽일 수 없으니 그런 방법이라도 써서 왕자님께 안 좋은 행동을 한 사람들이 벌을 받게 만들고 싶어. 감히 왕자님을 건드렸으니까.”
발레린은 저에게 그런 짓을 하는 사람은 그저 무시하고 넘겨도 되지만 제르딘을 그렇게 건드린다면 무시할 수 없었다. 여태껏 가만히 있었지만 더 두면 더한 일을 할 것 같았다.
그렇게 생각하며 발레린은 호텔 안으로 들어와 주변을 이리저리 둘러봤다.
“여기에 식당은 어디 있어?”
“식당은 1층에 있는데 왕자님께서는 방에서 따로 드신다고 했어요.”
“그럼 내가 방으로 올라가는 거야?”
루네스가 고개를 끄덕였다. 발레린은 내심 기대하는 마음으로 빠르게 걸었다. 방까지 가는 계단은 무척 많았지만 여태껏 발레린은 꾸준히 운동했기에 지치지도 않았다.
다만 루네스는 어느덧 지쳐서 격한 숨을 내쉬며 발레린을 쳐다봤다.
“왕자비님, 어디서 이렇게 힘이 솟으시나요? 저는 도저히 지금 더 못 올라가겠는데요.”
“루네스, 천천히 와. 난 먼저 왕자님 방에 가 있을게.”
하지만 루네스는 오히려 쉬지 않고 발을 움직였다.
“왕자비님을 혼자 가시게 할 수 없어요. 제가 모시는 분인데 포기하면 안 되죠.”
“그래도 너무 힘들면 쉬어도 돼.”
루네스는 애써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내저었다. 할 수 없이 발레린은 가만히 서서 루네스를 기다려 주었다. 이렇게 기다리지 않으면 루네스는 쓰러질 것처럼 힘들어 보였다.
그렇게 발레린이 한참 기다려 주자 루네스가 어느덧 가까워졌다.
발레린은 그때도 바로 움직이지 않고 루네스가 숨을 돌릴 틈을 주었다. 생각보다 루네스가 많이 힘들어하자 발레린은 루네스를 걱정스럽게 살폈다.
“루네스, 괜찮아?”
“네, 괜찮아요. 그나저나 왕자비님이 아침 일찍 일어나셔서 운동은 하시는 것 같았지만 이렇게까지 체력이 좋으신 줄은 몰랐어요.”
“탑 안에 갇혀 있을 때도 늘 운동은 빼놓지 않고 했었어. 운동을 해야 책을 오래 읽을 수 있었거든.”
“대단하세요. 전 그런 생각도 하지 못했을 텐데.”
“모두 책에 나와 있는 내용이었어. 만약 내가 탑 안에서 책을 읽지 않았다면 난 탑 안에 몸은 물론 생각까지 갇혀서 영원히 나오지 못했을 거야.”
“하지만 그래도 왕자비님은 어떻게든 탑에서 나오셨을 거예요. 그만큼 대단하신 분이니까요.”
루네스는 아까와 다르게 무척이나 눈빛이 반짝거렸다. 발레린은 루네스의 눈빛이 너무나 순수해서 미소를 지었다.
“고마워, 루네스.”
“제가 오히려 더 고마워요. 이렇게 저를 위해서 기다려 주시고요.”
“그럼 이제 더 걸을 수 있겠지?”
발레린이 시선을 살짝 내리며 살피자 루네스가 고개를 끄덕였다. 발레린은 기분 좋게 몸을 돌리고는 앞장서서 걸었다. 루네스가 따라올 수 있게 빨리 가지는 않고 적당한 속도로 걸었다. 하지만 마음은 여전히 조급했다. 얼른 제르딘과 같이 식사하고 싶은 마음뿐이었다.
그때 그로프가 말했다.
“주인님, 식물 위에 있는 것보다 확실히 주인님 곁이 더 편합니다.”
“그래도 그런 곳에 가고 싶으면 언제든지 말해.”
“개꿀개꿀.”
발레린은 그로프에게 미소를 지은 뒤 루네스가 따라오는 것을 살폈다. 그나마 루네스는 충분히 쉬었는지 잘 따라오고 있었다. 이제 몇 계단만 올라가면 제르딘의 방이 나왔다.
발레린은 기분 좋게 계단을 올라갔다.
제르딘의 방 앞에 서자 기사가 발레린을 쳐다봤다. 그들은 발레린과 눈이 마주치자마자 고개를 숙이곤 문을 열어 주었다. 그때 루네스가 말했다.
“왕자비님, 저는 여기서 기다리고 있을게요.”
“아니야. 굳이 기다리지 말고 쉬어.”
“그래도 될까요? 그래도 혹시 시키실 일이 있으시면…….”
“필요하면 따로 부를게.”
안 그래도 여기까지 올라오는데 고생했는데 루네스는 쉬어야 했다. 루네스는 더 말하지 않고 발레린에게 고개를 숙였다.
“고맙습니다. 왕자비님 같은 분은 이 세상 어디에도 없을 거예요. 모든 사람들이 왕자비님이 이렇게 좋으신 분이란 것을 알아야 하는데…….”
루네스는 무척이나 안타까운 듯 발레린을 쳐다봤다.
“괜찮아, 루네스. 그럼 쉬어.”
루네스는 금방이라도 울 것처럼 고개를 끄덕였다. 발레린은 미소를 짓고는 열린 문으로 들어갔다.
방 안은 발레린의 방 못지않게 무척이나 넓었다. 발레린은 잠시 감탄하며 방을 이리저리 쳐다봤다. 안락한 의자와 함께 기다란 식물이 돋보였는데 무척이나 편안한 분위기였다.
제르딘은 안쪽에 있는지 보이지 않았다.
그렇게 발레린은 멍하니 주변을 구경하며 안쪽으로 걸어가고 있었다. 문득 익숙한 목소리가 울렸다.
“왕자님, 왕자비님께 사실대로 이야기하시는 게 어떻습니까?”
보좌관의 목소리는 무척이나 간절하게 들렸다. 발레린은 조심스럽게 둥근 문틀에 기댄 채 안을 살폈다. 제르딘은 긴 의자에 등을 기댄 채 눈을 감고 있었다.
“사실대로 말하면 실망할 텐데.”
“그래도 이 사안은 심각하지 않습니까? 왕자비님께서 아셔야 왕자님도 대비해서…….”
그때 제르딘이 눈을 떴다. 그의 눈매가 날카로워졌다.
“어차피 배도스 공작이 몰락하면 발레린과 헤어져야 해. 지금 사르티아 공작도 어느 정도 마음이 돌아섰고 원로원 귀족들도 다들 배도스 공작과 조금씩 척을 지는 것 같으니 이 기회에 그렇게 나가는 것도 나쁘지 않아.”
“하지만 왕자비님이 많이 실망하실 것 같습니다.”
“그건 내가 감내해야 하는 상황이야.”
보좌관은 쩔쩔매는 것처럼 제르딘을 살폈다. 제르딘은 빈 잔을 들며 옆에 있는 하인에게 눈짓했다. 하인이 급히 제르딘에게 술을 따라 주었다. 제르딘은 술을 한 모금 마신 뒤 잔을 내려놓았다. 보좌관이 걱정스레 살피자 제르딘이 말했다.
“내가 발레린을 이용한 거라고 생각하겠지. 하지만 원래부터 이 관계는 그렇게 될 수밖에 없었어. 그래서 내가 이렇게까지 하는 거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