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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록빛 저주의 공녀님-61화 (61/130)

61화

숙소에서 일하는 사람들인지 옷이 모두 같았다. 발레린이 얼떨떨해하는 사이 누군가 다가왔다. 그는 길가에 서 있는 사람과는 다른 차림새였다. 나름대로 높은 직인지 깔끔한 정장 차림이었다. 그는 제르딘과 발레린을 보자마자 고개를 숙였다.

“왕자님과 왕자비님을 뵙습니다.”

그러자 길가에 서 있던 사람들이 모두 다시 고개를 숙이며 같은 말을 반복했다. 잠시 후 그가 고개를 들며 소개했다.

“안녕하십니까, 저는 메르텐 호텔을 관리하는 메르텐입니다. 이곳에 와 주셔서 무척이나 감사합니다.”

제르딘은 그저 고개를 끄덕였다. 다른 마차를 타고 온 보좌관은 급히 메르텐에게 말했다.

“왕자님과 왕자비님께 숙소를 안내해 드리게.”

그러자마자 메르텐은 곧바로 옆으로 비켜서며 말했다.

“이쪽으로 오시지요.”

그 말을 하면서 메르텐은 이 호텔에 대한 자랑을 아끼지 않았다. 제르딘은 이미 들었는지 감흥이 없었으나 발레린은 그저 새로운 사실에 즐겁게 고개를 끄덕이며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정원은 왕궁에서 보지 못한 식물이 무척이나 많았다. 특히 잎이 커다란 식물이 눈에 띄었다.

발레린이 유심히 보고 있자 메르텐이 눈치 빠르게 말했다.

“큰 잎 식물입니다. 이곳 델프스 지방에만 크는 희귀식물입니다.”

발레린은 더욱더 신기해서 큰 잎 식물을 유심히 바라봤다. 유난히 큰 잎이 눈에 띄었다.

“만약 비가 오면 이 잎으로 몸을 가려도 되겠어요!”

“역시 왕자비님이십니다. 옛날에는 이 잎으로 우산을 만들어 썼다고 합니다.”

발레린은 빙긋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로프도 마음에 드는지 큰 잎 식물을 한참 동안 바라봤다. 그러다 그로프는 큰 잎으로 폴짝 뛰었다.

“그로프!”

“주인님, 잠시 동안 여기에 있어도 되겠습니까?”

“괜찮겠어? 여긴 사람이 지나다니는 길이라서.”

그로프는 잎이 갈라진 쪽으로 가서 몸을 오므렸다. 자세히 보지 않는다면 그로프는 그다지 눈에 띄지 않을 듯했다.

“이렇게 있으면 될 것 같습니다. 그리고 오랜만에 마음에 드는 안식처를 찾은 것 같아서 여기에서 잠시 쉬고 싶습니다.”

그로프는 큰 잎이 무척이나 마음에 든 것 같았다. 발레린은 새삼 그로프를 신경 쓰지 않은 것 같아 미안한 마음마저 들었다.

“그로프, 네가 있고 싶으면 언제든지 여기 있어도 돼.”

그러자 그로프가 대번에 고개를 내저었다.

“아니요. 이곳에 잠시 있다가 주인님께 돌아갈 겁니다.”

그때 메르텐이 조심스레 말했다.

“왕자비님, 그럼 이쪽으로 오시지요.”

발레린이 고개를 돌리니 주변 사람들이 모두 기다리고 있었다. 발레린은 서둘러 메르텐을 따라갔다. 발레린은 옆에 있는 제르딘에게 나직이 말했다.

“죄송해요, 왕자님 괜히 저 때문에 기다리시게 해서요.”

“아닙니다.”

간단한 대답이었지만 발레린은 그의 목소리에서 왠지 모를 따뜻함을 느꼈다. 그의 표정도 이전보다 한결 풀린 듯했다. 발레린은 그나마 다행이라고 생각하며 활기차게 호텔 안으로 들어갔다.

호텔 안은 거대한 대리석이 돋보이는 신전과 비슷한 곳이었다. 연갈색 대리석 기둥이 군데군데 있었고 그 사이 나무 의자와 함께 커다란 잎 식물이 조화롭게 있어서 편안함과 고급스러움이 물씬 풍기는 곳이었다.

메르텐은 곧바로 계단으로 안내했다. 제법 높이 올라가는 것임에도 발레린은 힘들지 않고 즐겁기만 했다. 다만 하인들은 꽤 힘든지 점점 거리가 멀어지고 있었다.

그렇게 발레린은 제르딘과 일정한 거리를 유지하며 걷다 어느 문 앞에 도착했다.

“왕자님이 머무실 곳은 이곳이고 왕자비님이 머무실 곳은 이곳입니다.”

제르딘은 그저 고개를 끄덕였다. 메르텐은 제르딘과 발레린에게 친절히 인사를 하곤 계단을 내려갔다. 주변 하인들도 인사를 하고 물러났다. 이제 남은 사람은 발레린과 제르딘, 그의 보좌관뿐이었다.

발레린은 잠시 호텔의 문 장식에 시선을 빼앗겼다. 양각의 장식은 왕궁과 다르게 특이한 구조였는데 이전에 책에서 보던 방식과 색달라서 더욱 눈이 갔다.

그렇게 발레린이 눈을 떼지 못하는 사이 제르딘이 말했다.

“황금 마검에 대한 조사는 아마 점심쯤에 보고가 들어올 겁니다. 그동안 잠시 쉬셔도 괜찮을 거고요.”

“편의 봐주셔서 고맙습니다.”

발레린은 활짝 미소를 지었다. 제르딘은 발레린의 시선을 피하지 않고 바라보았다.

“저기, 왕자님?”

보좌관이 옆에서 말하자 제르딘이 고개를 돌렸다. 보좌관은 재빨리 말을 이었다.

“왕궁에서 미처 처리하지 못한 일을 보고하려고 하는데…….”

제르딘은 앞에 있는 문으로 고갯짓을 했다. 보좌관은 곧바로 문을 열었다. 그때 제르딘이 발레린을 돌아보며 말했다.

“그럼 점심에 뵙겠습니다.”

“네, 쉬세요. 왕자님!”

제르딘은 문으로 들어가자 보좌관이 뒤따라 들어갔다. 발레린은 닫힌 문을 잠시 바라봤다. 그러고 보면 말을 잘못한 것 같았다.

‘아까도 왕궁에서 처리하지 못한 일이 있다고 한 것 같은데 쉬라고 말하다니.’

발레린은 아쉬운 마음에 문을 잠시 보다가 이내 옆에 있는 방으로 들어갔다. 들어가자마자 발레린의 표정은 대번이 바뀌었다.

제르딘은 왕궁의 방보다 넓지 않다고 했지만 발레린의 입장에선 왕궁 못지않게 넓은 방이었다. 한 사람이 써도 되나 싶을 정도였다.

‘네 명은 거뜬히 같이 쓸 수 있을 것 같은데!’

발레린은 밝은 얼굴로 주변을 둘러보다가 창가에 섰다. 창문을 열자 시원한 바람이 부드럽게 불어왔다. 발레린은 저 멀리 강가를 바라보았다. 방이 꽤 높은 곳에 있어서 넓은 강은 물론 저 멀리까지 한눈에 보였다.

발레린은 문득 그로프가 잘 있는지 궁금해서 아래를 쳐다봤다. 지나다니는 사람들은 무척이나 밝은 얼굴이었다. 특히 화려한 드레스가 눈에 띄었다. 왕궁에 있을 땐 붉은 옷을 입은 하인들만 자주 봤는데 이곳은 고급 호텔이라 다양한 사람들이 많았다.

발레린은 즐거운 마음으로 창가에 터를 잡고 주변 풍경을 감상했다. 높은 곳에서 보는 것은 익숙한 일이었지만 이렇게 자유로운 마음으로 감상하니 기분이 남달랐다. 거기다 바로 옆방은 제르딘의 방이었다. 그와 함께 온 것만으로도 발레린은 기분이 날아갈 듯 기뻤다.

점심시간이 되었을 때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렸다. 발레린은 여전히 창문 아래를 구경하며 외쳤다.

“들어와.”

문이 열리자마자 루네스가 들어왔다. 루네스는 벌써부터 웃는 얼굴이었다. 발레린이 의아해하며 보자 루네스가 곧바로 대답했다.

“왕자비님, 왕자님께서 점심을 같이하자고 하십니다!”

“그럼 그로프도 데려와야겠어. 이제 슬슬 배가 고플 텐데.”

“제가 데려갈까요?”

“아니, 그로프는 독 개구리라서 함부로 만지면 안 돼. 작은 통이 있으면 괜찮겠지만.”

“통을 구해 올까요?”

발레린은 고개를 내저었다.

“내가 그로프를 데려갈게.”

루네스는 고개를 끄덕이며 발레린과 함께 나섰다. 나서자마자 주변의 복도를 지나는 귀족들과 마주쳤다. 발레린은 미소를 지으며 인사를 했다. 귀족들은 모두 놀란 눈으로 발레린을 쳐다봤다.

발레린이 그들을 완전히 지나치자 루네스가 작게 속삭였다.

“왕자비님, 아무래도 귀족들도 문제예요. 왕자비님이 지나가시는데 저렇게 인사를 안 해도 되는 걸까요?”

“내가 많이 신기한가 봐.”

발레린은 그저 미소를 지었다. 구경거리를 보는 듯한 시선은 많이 느껴 봤었다. 발레린이 아무렇지 않아 하자 루네스가 한탄했다.

“하지만 아무리 신기해도 왕자비님께 인사도 하지 않는 건 너무한 것 같아요.”

루네스는 문득 뒤를 쳐다봤다. 여전히 귀족들은 가지도 않고 발레린의 자취만 좇고 있었다. 루네스가 인상을 쓰자 그제야 그들은 잽싸게 고개를 돌렸다.

“왕자비님, 아무리 세드릭스 부인이 사교계에 좋은 말을 해 주었다고 해도 기본적으로 귀족들은 왕자비님을 그저 신기한 사람이라고 생각하는 것 같아요.”

“혹시 그 귀족들이 왕자님을 비난하기도 해?”

발레린은 자신에 대한 귀족들의 시선이나 소문에 대해선 그다지 신경이 쓰이지 않았다. 오로지 발레린의 머릿속에는 제르딘뿐이었다.

“그건 모르겠어요. 아마 직접적으론 못 하지 않을까요? 왕족을 모욕하면 감옥행인데.”

발레린은 문득 왕궁 뒤의 정원에서 들은 말이 생각났다. 그러고 보니 그 귀족들이 한 말은 왕족에 대한 모욕이었다. 거기다 그 사람들은 무척이나 노골적인 말을 많이 했었다.

발레린은 굳은 얼굴로 앞을 걸었다.

‘왕족을 모욕한 사람들을 어떻게 해야 할까.’

그때 루네스가 말했다.

“그러고 보니까 아까 왕자비님을 유난히 쳐다보고 있던 사람은 루티스 백작 부인과 겔렌트 남작 부인인 것 같아요.”

발레린은 곧바로 멈춰서 루네스를 쳐다봤다.

“혹시 루티스 백작과 겔렌트 남작이 친해?”

“두 분 엄청 친하세요. 제가 대회의실을 지나갈 때마다 봤는데 두 분이서 항상 붙어 다녔어요. 거기다 두 분이야말로 배도스 공작과 정말 가까운 사람들이고요.”

“그럼 배도스 공작과 관련된 모든 일에 다 연관이 있겠네?”

“그 두 분이 가장 배도스 공작과 관계가 깊을 거예요. 특히 루티스 백작님은 왕자님이 어렸을 때부터 배도스 공작과 함께 이 왕궁에 있었다고 들었어요.”

발레린은 그제야 머릿속에 있었던 그 대화가 서서히 맞춰지는 것을 느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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