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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록빛 저주의 공녀님-60화 (60/130)

60화

“묘하다고요?”

제르딘이 고개를 끄덕였다.

“공녀도 저 못지않게 어린 시절이 그다지 행복하지는 않으셨잖습니까?”

“그렇긴 하지만 그래도 저는 어머니와 그로프가 있었거든요.”

그때 가만히 있던 그로프가 개꿀개꿀 울었다. 제르딘은 그로프를 무심히 쳐다보았다.

“그러고 보면 제 어린 시절을 이렇게까지 생각해 준 사람은 없었습니다.”

발레린은 새삼 제르딘에게 특별하게 다가간 것 같아 기분이 좋았다. 미소를 짓자 제르딘이 말했다.

“공녀와 같은 분이 왕궁에 많았으면 좋겠습니다.”

발레린은 옅은 실망을 느끼며 물었다.

“저 같은 사람이요?”

“그러면 확실히 왕궁이 지긋지긋할 것 같지는 않습니다.”

칭찬인지 그저 그냥 하는 말인지. 발레린은 쉽사리 짐작을 할 수 없었다. 제르딘은 무심한 얼굴이었지만 그의 표정은 묘하게 달라 보였다. 아무 감정이 없어 보이던 눈동자에는 은근히 웃음기가 보였다.

발레린이 계속 쳐다보자 제르딘은 그로프를 보며 물었다.

“그나저나 그로프는 몇 살입니까?”

“네?”

“공녀 곁에 오래 있는 것 같아서요.”

그때 그로프가 대답했다.

“주인님과 같이 있는 이후로 제 나이는 세지 않고 있습니다. 저는 주인님의 독기로 생명을 이어 가는 거니까요.”

“그럼 공녀가 독기를 잃으면…….”

“그럴 일은 없겠지만 그래도 만약에 그렇다면 그로프는 죽게 되겠죠.”

그로프는 그저 고개를 끄덕였다.

“주인님 말이 맞아요. 주인님의 독기로 삶을 이어 가고 있어서 만약 주인님이 죽으면 저도 죽을 겁니다.”

발레린은 내심 저주가 완전히 풀리지 않기를 바랐다. 만약 저주가 완전히 풀린다면 위험에 빠진 그로프를 바로 구할 수 없을 것이다. 그럼 발레린은 평범한 사람이 되고 만다.

이제야 남이 무시하는 시선과 놀라는 시선에 익숙해졌는데 다시 평범한 사람으로는 돌아가고 싶지 않았다. 거기다 제르딘의 곁에 있으면서 더욱 도움이 되고 싶기도 했다.

만약 독기를 잃는다면 발레린은 삶을 잃는 것이나 마찬가지일 것이다.

그래서 발레린은 제 의지대로 독기가 나가는 게 가장 행복했다. 이제는 저주라는 걸림돌이 아니라 능력이 되었으니까.

발레린은 곰곰이 생각하다가 제르딘에게 말했다.

“그런데 저는 이 능력이 이제는 저주라고 생각하지 않아요.”

“저주가 아니면 능력이라고 생각하는 겁니까?”

발레린은 고개를 끄덕였다.

“어차피 독이 중화되면서 제 의지대로 독기를 사용할 수 있게 되었으니 이젠 저주라고 생각하지 않고 능력이라고 생각하려고요.”

“하지만 공녀는 여전히 초록빛 입술이지 않습니까?”

“예전에는 남들과 많이 달라서 슬프고 남들의 시선이 무서웠지만 이제는 적응되어서 괜찮아요. 그리고 은근히 남들과 다른 게 좋기도 하고요.”

무엇보다 초록빛 입술이 보랏빛 드레스와 어울려서 더 좋았다. 발레린은 미소를 지으며 말을 이었다.

“그리고 따지고 보면 몸에 독이 흐르고 있으니 제 능력이 살아 있는 한 입술은 초록색이어야 할 것 같아요. 만약 그게 아니면 평범한 사람이라는 뜻이니까요.”

“평범한 사람으로 돌아가고 싶지는 않습니까?”

“늘 이렇게 살아서 익숙해요. 그리고 저는 왕자님 옆에서 최대한 많이 도와 드리고 싶어서요. 그래서 제 능력을 유지하고 싶기도 하고요.”

제르딘은 말없이 발레린을 바라봤다. 그러다가 그가 문득 말했다.

“제가 공녀에겐 그렇게 대단한 사람인 줄 몰랐습니다.”

새삼스러운 말에 발레린은 얼른 대답했다.

“제 삶에서 유일하게 반짝반짝 빛나는 분이세요.”

어깨 위에 앉아 있던 그로프도 옆에서 개꿀개꿀 울었다. 제르딘은 그로프를 무감하게 쳐다봤다가 이내 발레린에게 시선을 돌렸다.

“제가 공녀에게 그런 말을 들어도 되는지 모르겠습니다. 저는 공녀가 가장 바라는 것을 줄 수 없는데.”

“아니에요. 저는 이미 왕자님께 많은 행복을 느끼고 있어요.”

발레린은 활짝 웃었다. 하지만 제르딘의 눈썹은 미세하게 굳어 있었다. 발레린은 조심스럽게 그에게 물었다.

“그런데 만약 저와 헤어지셔도 왕자님은 결혼을 하셔야 하지 않나요?”

제르딘은 발레린을 그저 물끄러미 쳐다봤다. 발레린은 그가 더 말하기 전에 잽싸게 말했다.

“만약 왕자님이 왕이 되시면 자식을 낳아야 하는데 그때도 사랑이 필요하지 않나요?”

“그렇긴 하지만 저는 그런 감정에는 연연하지 않을 겁니다. 어머니가 어떻게 망가졌는지 누구보다 옆에서 지켜봐서 그렇게 되기는 싫습니다.”

“하지만…….”

“어차피 왕족의 결혼은 사랑 없이 정략결혼으로 치러지는 경우가 많습니다. 어머니도 첫 번째 남자와는 그렇게 결혼해서 사이도 좋지 않았고요. 그런데 저는 만약 그렇게 결혼해도 아이는 낳을 생각입니다. 어쨌든 왕이 해야 하는 일 중에 후사를 잇는 것도 중요하니까요.”

발레린은 그 말을 듣고 은근히 서운했다. 저와는 그럴 생각이 없다는 게 더더욱 발레린의 마음을 후벼 팠다. 하지만 발레린은 내색하지 않고 물었다.

“저와 굳이 아이를 낳지 않으시려는 이유는 뭔가요?”

“미안하지만 그 이유를 말하면 공녀에게 무례를 범할 것 같습니다.”

“아니요! 말씀해 주셔도 돼요.”

“공녀에겐 상처만 될 텐데요?”

“전 괜찮아요. 그냥 말씀해 주세요! 전 이유를 알고 싶거든요.”

그로프는 발레린을 쳐다봤다. 발레린은 누구보다 제르딘에게 시선을 고정했다. 제르딘은 잠시 뜸을 들이다가 물었다.

“정말 괜찮으시겠습니까?”

“네! 왕자님이 무슨 말을 해도 상처받지 않을게요.”

제르딘은 눈썹을 살짝 찌푸린 채 발레린을 보았다. 여전히 발레린은 제르딘에게 시선을 떼지 않았다. 말을 할 때까지 기다릴 셈이었다.

발레린이 집요하게 보자 제르딘은 할 수 없이 입을 열었다.

“전 어렸을 때부터 잡종 피였습니다. 누구보다 고귀하고 맑아야 할 피에 다른 것이 섞였으니 제가 감내해야 할 부분이 많았습니다. 만약 제가 결혼해서 아이를 낳는다면 저와 다른 평범한 사람과 아이를 낳고 싶었습니다.”

“…….”

“저와 같은 아픔을 물려주고 싶지 않아서요. 어쨌든 확률이 있긴 하지만 보통 사람과 결혼했을 때 멀쩡한 아이가 태어날 확률이 높겠죠.”

발레린은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마음속은 무척이나 슬펐지만 애써 내색하지 않았다. 상처받지 않는다고 말했으니 더더욱 제르딘에게 티를 낼 수 없었다.

발레린은 일부러 활기차게 말했다.

“역시 왕자님이세요! 전 그런 생각까지는 못 했거든요.”

“공녀, 제가 한 말은 그저…….”

“저도 왕자님이었다면 그렇게 생각했을 것 같아요. 누구보다 아픔을 잘 아는데 그걸 굳이 자식에게까지 물려주고 싶지 않으시겠죠.”

“…….”

“왕자님, 솔직하게 말씀해 주셔서 고마워요. 전 오히려 이런 부분 때문에 왕자님이 더욱 좋아요.”

발레린은 그나마 제르딘이 자신에게 한 말이 진실인 점이 좋았다. 만약 이것마저 거짓말이었다면 발레린은 더 슬펐을 것이다.

제르딘은 잠시 동안 말이 없었다. 그는 발레린을 보고 있었다. 그의 시선은 은근히 노골적이었는데 발레린은 그와 눈이 마주치면 속마음까지 들킬까 봐 마차 창밖을 바라봤다.

어느새 주변에는 넓은 들판이 보였다. 저 멀리 푸른 수평선이 보이기도 했다. 발레린은 바뀐 풍경에 흥분하며 고개를 돌렸다.

“왕자님, 이 도로와 강가가 가까운가 봐요!”

제르딘은 이내 창밖으로 시선을 돌렸다.

“델프스에 가까워지는 것 같습니다. 그곳에는 넓은 강이 유명하거든요.”

발레린은 미소를 지으며 그로프에게 속삭였다.

“그로프, 왕궁에만 있다가 이곳에 오니까 좋지 않아? 넓은 강도 보고 말이야.”

“그렇습니다. 확실히 강이 보이니 다르긴 합니다.”

“그렇지? 강이 저렇게 넓은 건 처음 봐. 맨날 책에 나오는 그림으로만 봤는데.”

발레린은 아무리 그림을 잘 그려도 실제로 보는 것만 못하다고 느꼈다. 그로프도 옆에서 개꿀개꿀 울면서 발레린의 말에 맞장구 쳐 주었다.

마차 안에서 조용한 사람은 제르딘뿐이었다. 그의 시선은 발레린에게 있었다. 표정은 좋지 않았다. 미간은 미세하게 굳어서 그의 심기가 조금 뒤틀렸다는 것이 느껴질 정도였다. 이전과 다르게 그의 하늘빛 눈동자에는 은근한 감정이 보이기도 했다.

발레린은 한참 동안 마차 창밖을 구경하다가 제르딘을 돌아봤다. 곧바로 마주친 시선에 발레린은 당황스러웠지만 미소를 지으며 물었다.

“왕자님, 그런데 숙소는 어딘가요?”

“강 근처입니다. 왕궁보다는 좁겠지만 나름대로 쉴 만한 곳입니다.”

발레린은 활짝 웃었다.

“그럼 창문으로 강이 보이겠네요!”

제르딘이 고개를 끄덕였다. 발레린은 신이 나서 그로프에게 말했다.

“그로프, 창문에서 저 강이 더 잘 보이겠어!”

“그럴 것 같습니다. 이곳보다 높은 곳에서 보면 확실히 저 멀리까지 보이겠습니다.”

발레린은 활짝 웃으며 유유히 흘러가는 강가를 보았다.

그때 마차가 서서히 멈춰 섰다. 제르딘은 발레린에게 차분히 말했다.

“숙소에 도착한 것 같습니다.”

그 말이 끝나기 무섭게 마차 문이 열렸다. 제르딘이 먼저 내려서 발레린에게 손을 내밀었다. 발레린은 조심스럽게 제르딘의 손을 잡고는 마차에서 내렸다. 마차에서 내리자마자 양옆으로 서 있던 사람들이 고개를 숙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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