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9화
‘언제 이런 드레스를 입어 보겠어.’
그것도 왕자비로서 말이다. 발레린은 기분 좋게 하인들의 도움을 받으며 드레스를 갈아입었다. 그리고 하인들은 각자 머리와 얼굴을 깔끔하게 다듬었다.
특히 발레린의 머리는 곱슬기가 심한 편이었는데 하인들은 곱슬머리를 잘 다루는 전문가인지 빗으로 빗는 내내 머리가 따갑지도 않았다. 거기다 하인들은 루네스의 말처럼 발레린을 전혀 겁내지 않았다.
발레린은 내내 개의치 않는다고 생각했는데 그래도 이렇게 사람들이 잘 대해 주니 전보다는 마음이 한결 편안했다.
그렇게 몇 분 후, 하인들이 물러났다.
“다 되었습니다.”
발레린은 거울을 쳐다봤다. 눈보다 하얀 얼굴에선 생기가 감돌았고 초록빛 입술은 묘하게 보랏빛 드레스와 잘 어울려서 한결 조화로워 보였다. 거기다 곱슬기가 있는 머리는 다른 때보다 차분해 보였다.
발레린은 빙긋 웃으며 하인에게 말했다.
“고마워.”
하인들은 놀라며 고개를 숙였다.
“아닙니다. 왕자비님. 오히려 저희를 잘 봐주셔서 고맙습니다.”
그때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리더니 루네스가 급하게 문 쪽으로 걸어갔다. 루네스는 하인에게 말을 전해 듣고는 발레린에게 다가왔다.
“지금 왕자님께서 기다리고 계신다고 하네요.”
발레린은 서두르며 주변을 살폈다. 하지만 발레린에겐 처음부터 짐이 별로 없었다. 지금 방에서 발레린에게 소중한 것은 보라색 드레스와 노란 튤립, 그로프뿐이었다.
“드레스는 마차에 다 실었지?”
“네, 그 외에도 왕자비님께서 델프스에 내려가실 때 필요한 물건을 모두 챙겨서 실었습니다.”
발레린은 고개를 끄덕이며 노란 튤립을 보았다. 루네스가 빠르게 눈치를 채고는 발레린에게 물었다.
“노란 튤립도 챙길까요?”
“아니, 지금도 생생한데 여기에 두는 게 좋을 것 같아.”
괜히 들고 다니면서 노란 튤립이 훼손되지 않았으면 했다. 발레린의 어깨 위에 냉큼 오른 그로프는 고개를 끄덕이며 개꿀개꿀 울었다.
발레린은 기쁘게 계단을 내려가며 왕궁을 나갔다. 발레린의 걸음 속도가 누구보다 빨라서 루네스는 꽤 빠르게 걸어야 했다.
왕궁을 나가자마자 마차가 바로 앞에 대기하고 있었다. 그 앞에는 제르딘이 보좌관과 함께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발레린은 천천히 제르딘에게 다가갔다. 그는 아침 일찍 봤을 때와 다르게 무척이나 멀끔해 보였다.
단정하게 빗어 올린 금발은 한 치의 흐트러짐 없었고 피부는 잡티 하나 없이 깔끔했다. 하늘빛 눈동자는 맑은 빛을 띠면서도 아름다워 보였다. 특히 그가 입은 옷의 색 조화가 대단했다. 어두운 계열이었지만 하얀 셔츠와 잘 어울려서 누구보다 눈에 띄었다.
발레린이 멍하니 보고 있자 제르딘이 알아챘는지 고개를 돌렸다. 눈이 마주치자 그는 미소를 지으며 마차 문을 열었다. 옆에서 그로프가 개꿀개꿀 울었다. 발레린은 그저 멍하니 제르딘을 쳐다봤다.
‘웃어 주셨어.’
발레린은 전혀 기대하지 않았지만 그 웃음은 정말이지 환했다. 오랜만에 제르딘의 주변으로 별이 반짝이는 것 같았다.
제르딘은 물끄러미 발레린을 바라봤다. 그때 그로프가 개꿀개꿀 울었다. 발레린은 그제야 정신을 차리고서 제르딘에게 인사를 한 뒤 마차에 탔다. 제르딘도 따라서 마차에 타자 발레린은 제르딘에게서 눈길을 떼지 못했다.
‘어째서 계속 보는데도 또 보고 싶은지…….’
발레린 스스로도 알지 못한 채 멍하니 제르딘을 쳐다봤다. 그로프도 발레린을 따라서 제르딘을 쳐다봤다. 두 시선이 제르딘에게 집중되었다.
제르딘은 두 시선이 당황스럽긴 했지만 마차 창밖으로 시선을 돌렸다. 그때 발레린이 무의식적으로 중얼거렸다.
“옆모습도 잘생기셨어요.”
제르딘이 고개를 돌리자 발레린은 헐레벌떡 입을 막았다.
“죄송해요. 제가 머릿속으로만 생각한다고 했는데.”
“아닙니다.”
제르딘은 차분하게 말했지만 발레린의 어깨 위에서 그로프가 울었다.
“개꿀개꿀.”
발레린은 미소를 지으며 그로프를 쳐다봤다. 제르딘은 차분히 시선을 돌렸다. 그때 옆에서 그로프가 발레린에게 말했다.
“주인님, 왕자에게 어제 있었던 일을 말해 줘야 하지 않습니까?”
“무슨 일?”
“주인님이 이제 저주가 아니라 능력을 사용할 수 있게 된 거요.”
그 말에 발레린은 대번에 환하게 미소를 지었다.
“그로프, 고마워. 왕자님 미모 때문에 잠시 정신이 팔려서 잊고 있었어.”
“괜찮습니다. 저야말로 주인님께서 저로 인해서 기억하시는 게 감사할 따름입니다.”
발레린은 빙긋 웃고는 제르딘을 쳐다봤다. 순간 발레린은 제르딘의 하늘빛 눈동자와 마주쳤다. 그는 아까부터 보고 있었는지 시선이 고정되어 있었다.
“왕자님, 제가 어제…….”
“그로프와 이야기하는 거 들었습니다.”
“네? 벌써요?”
제르딘이 눈썹을 살짝 찌푸렸다.
“잊으셨나 본데 저는 그로프가 하는 말도 알아듣습니다.”
그제야 발레린은 입을 닫았다. 볼이 순식간에 붉게 타올랐다.
“죄송해요. 왕자님. 일부러 왕자님을 따돌리려고 그로프와 먼저 말한 건 아니었어요.”
“아니요. 그렇게까지 생각할 필요는 없습니다. 정말 저주가 완전히 풀린 겁니까?”
“저주가 완전히 풀린 건지는 모르겠지만 분명한 건 제 의지대로 독기를 사용할 수 있다는 거예요.”
“그럼 공녀가 원할 때마다 독기가 나오는 건가요?”
발레린은 기쁘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제르딘은 발레린을 보다가 말했다.
“축하합니다.”
“감사합니다. 왕자님.”
“그런데 당분간은 이 사실을 알리지 않아야 할 것 같습니다.”
“그럼 다른 사람에게는 말하지 말까요?”
“네, 더 알릴 필요는 없는 것 같습니다. 오히려 이 사실을 이용해 배도스 공작이 공녀의 독기로 사람을 죽일 수 있다고 할 것 같기도 하고요.”
발레린은 고개를 끄덕였다. 루네스에겐 말하긴 했지만 루네스는 다른 사람에게 알릴 것 같지 않았다.
어쨌든 발레린은 제르딘의 의견에 백번 동의하며 제르딘을 뚫어지게 쳐다봤다. 예전 같으면 그저 부끄러웠겠지만 이제는 오히려 저도 모르게 계속 시선이 갔다.
거기다 제르딘 같은 얼굴은 흔치 않았다. 발레린은 속으로 내심 감탄했다.
‘어떻게 저렇게 잘생긴 얼굴일까.’
특히 이목구비가 모두 조화롭게 위치해서 더욱 신기했다. 그야말로 완벽한 비율이 발동한 얼굴이었다. 새삼 발레린은 저도 모르게 미소를 지었다.
그로프 역시 주인님인 발레린의 시선을 따라서 제르딘을 쳐다봤다. 그로프는 내심 제르딘이 인간 중에서 가장 잘생긴 얼굴이라는 것이 신기해서 계속 쳐다봤다.
그렇게 두 시선이 쏟아지는 가운데 제르딘은 잠시 발레린을 보았다. 발레린의 눈빛에는 무의식적인 반짝임이 존재했다. 제르딘은 신기해하며 발레린을 잠시 보다가 이내 정신을 차리며 말했다.
“델프스 지방까지는 두 시간이 걸릴 겁니다. 왕궁의 남쪽에 있어서 수도 주변과는 다르니 낯설 겁니다.”
발레린은 잽싸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그곳에 도착해서는 각자 다른 방을 쓸 예정입니다.”
“왜요?”
발레린은 너무나 놀랐기에 자연히 목소리가 커졌다. 제르딘은 차분히 설명했다.
“오늘은 보름달이 뜨는 날이라 아무래도 공녀가 위험할 것 같습니다.”
“하지만 전에는 그저 조심하라고 하셨지, 저를 배제하지는 않으셨잖아요.”
“그렇긴 하지만 생각해 보니 아무래도 공녀에겐 너무 많은 짐을 주는 것 같아서요.”
“아니요, 짐이라니요! 저는 괜찮아요.”
“이전에 제가 너무 생각이 없었습니다.”
“저는 정말 괜찮은데…….”
발레린은 내심 서운하기도 했다. 하지만 제르딘이 의견을 굽힐 것 같지 않아 더 말하지 않았다. 잠시 분위기가 가라앉았다.
제르딘은 마차 창밖으로 시선을 돌렸다. 발레린은 그의 얼굴을 잠시 보다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왕자님, 그런데 몸은 괜찮으시나요?”
제르딘이 고개를 돌려 발레린을 쳐다봤다. 그는 발레린과 눈이 마주치자 고개를 끄덕였다.
“제 걱정은 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이젠 익숙하니까요.”
“하지만 부작용이 꽤 고통스럽다고 하던데요.”
“그것도 이미 숱하게 겪어서 참을 만합니다.”
제르딘은 아무 감정이 없어 보였다. 그 모습에 발레린은 더 마음이 아렸다. 어렸을 때부터 그가 감내하고 견뎌야 하던 아픔이었을 것이다. 거기다 이 사실을 다른 사람에겐 다 알리지도 못하고 아는 사람끼리만 알았을 것이다.
발레린은 저도 모르게 제르딘을 동정 어린 시선으로 쳐다봤다. 제르딘은 발레린을 물끄러미 보다가 미소를 지었다.
“저를 그렇게 쳐다볼 필요는 없습니다.”
“네?”
“저를 그렇게까지 불쌍하게 여기지 않아도 된다고요.”
“하지만 왕자님께선 많은 아픔을 혼자 견뎌 내셔야 했잖아요.”
“…….”
“그것도 어렸을 때부터 그러셨으니, 저는 그 점이 더 신경 쓰여요.”
제르딘은 대답이 없었다. 그는 발레린은 쳐다볼 뿐이었다. 언뜻 보면 감정이 없는 시선이었지만 묘하게 집요한 구석이 있는 눈빛이었다. 은근히 화가 난 듯 보이기도 했다.
발레린은 도저히 제르딘의 속을 알 수 없어 한참 동안 그를 쳐다봤다.
그때 제르딘이 한쪽 입꼬리를 올리고는 말했다.
“공녀가 이런 말을 할 때마다 기분이 묘한 것 아십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