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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록빛 저주의 공녀님-58화 (58/130)

58화

발레린은 서둘러 정신을 차리며 그로프를 쳐다봤다.

“그로프, 언제 깼어?”

“아까 주인님이 크게 말할 때 깼습니다.”

“미안, 그로프. 내가 생각 없이 크게 말했지?”

“아닙니다. 어차피 오늘 일찍 나간다고 하지 않았습니까?”

“그렇긴 해. 그래도 그로프, 일찍 깨서 억울하지 않아?”

“전혀요. 오히려 주인님이 깨워 주셔서 감사했습니다.”

발레린은 그로프의 말에 미소를 지었다.

“고마워, 그로프.”

“저야말로 주인님께서 저의 곁에 계셔서 감사합니다.”

발레린은 그로프의 눈을 맞추며 웃다가 이내 문득 제르딘에게 하지 못한 말이 생각났다.

“또 말 못 했네.”

“무슨 말 말입니까?”

“내 독기가 이젠 저주가 아니라 능력이 되었다고. 그러고 보면 왕자님 덕분이야.”

“제르딘이요?”

발레린은 고개를 끄덕였다.

“내 숨결에 있던 독기가 왕자님의 입맞춤으로 중화되어서 내 의지대로 조절할 수 있게 됐잖아.”

“늑대 수인의 피가 섞이니 좋긴 하네요.”

“하지만 왕자님은 그 사실을 누구보다 싫어하지 않아?”

“그렇긴 합니다. 예전에 자조적으로 잡종 피라고 말하지 않았습니까?”

발레린은 낙담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왕자님도 엄청난 능력을 가지고 있는 건데.”

예전이었다면 발레린은 그저 저주라고 생각하며 독기를 가지고 살았을 것이다. 하지만 이제는 제르딘 덕분에 저주를 능력이라고 말할 수 있게 되었다.

비록 입술의 초록빛은 그대로지만 말이다.

하지만 발레린은 초록빛 입술 따위는 개의치 않았다. 거울을 보면 초록빛 입술은 보랏빛 드레스와 어울려서 더 좋았다.

발레린은 기분 좋게 미소를 지으며 그로프를 쳐다봤다.

“그나저나 그로프, 오늘 왕자님이 특히 달라 보이지 않았어?”

그로프가 고개를 갸웃거리자 발레린은 신나서 입을 열었다.

“내가 방독면을 벗으니 왕자님이 내 얼굴이 더 잘 보인다고 하셨잖아. 그리고 오늘 유난히 편안하게 보이기도 하고, 원래 그렇기는 하지만 잘생기기도 하고…… 많이 웃는 것 같기도 하고.”

그로프는 그저 고개를 끄덕였다. 발레린은 그러다가 문득 제르딘이 방에 들어오지 않고 그냥 나간 것을 생각했다. 순간 발레린은 그로프를 보며 빠르게 말했다.

“혹시 왕자님은 날 보러 온 거 아니야? 아무것도 가져가지 않고 그냥 방문만 했잖아.”

“그렇긴 합니다. 그러고 보면 주인님을 보며 반가워서 웃은 것 같기도 하고요.”

“그렇지? 그런데 만약 내가 그때 깨지 않았다면…….”

“그냥 주인님을 보고 갔을 것 같긴 합니다.”

발레린은 활짝 웃으며 말했다.

“일찍 깨서 다행이야. 그렇지 않다면 오늘 마차에 탈 때까지 왕자님을 못 만날 수도 있었잖아.”

그로프는 대답하지 않고 발레린을 빤히 바라보았다.

“그로프, 혹시 내 얼굴에 뭐 묻었어?”

발레린은 놀라며 거울 앞으로 달라갔다. 얼굴에는 아무것도 묻어 있지 않았다. 발레린은 그로프를 돌아보며 말했다.

“얼굴에는 아무것도 없는데?”

그로프는 잠시 망설이다가 대답했다.

“주인님, 제르딘의 행동 하나하나 의미를 부여하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왜?”

“이렇게 계속 가다간 주인님이 더 빨리 지칠 것 같아서요.”

발레린은 미소를 지었다.

“그로프, 걱정해 줘서 고마워. 그런데 나는 왕자님을 좋아하는 게 세상에서 가장 행복해.”

“하지만 제르딘은 주인님께 사랑을 줄 수 없다고 했잖습니까.”

“그렇긴 하지만 그래도 이 순간만은 좋아.”

발레린은 활짝 웃었다. 그로프는 발레린의 말을 이해할 수 없어 가만히 있었다. 발레린은 그로프 근처에 앉아서 종알종알 이야기를 했다.

“탑 안에 있을 땐 이런 일을 상상할 수도 없었잖아. 지금은 다양한 경험을 한다고 생각해. 무엇보다 왕자님을 좋아한다고 내게 해가 되지는 않으니까.”

“하지만 주인님이 나중에 실망할 수도 있습니다.”

“실망할 수 있겠지. 그래도 난 늘 그랬던 것처럼 기다릴 거야. 그리고 그로프, 걱정하지 마. 난 내가 아니다 싶으면 포기할 거야.”

포기라는 말에 그로프는 놀라서 재빠르게 물었다.

“정말 제르딘의 사랑을 포기하겠다는 말입니까?”

“만약 왕자님이 나를 정말 사랑할 수 없다고 한다면 포기해야겠지. 하지만 그로프, 내가 여태껏 왕자님을 봐 왔지만 오늘은 분명 달랐어.”

발레린이 너무나 명쾌하게 말하자 그로프는 고개를 끄덕였다.

“역시 주인님은 남다르십니다. 저 같으면 벌써 포기했을 사랑을 주인님은 포기하지 않으니까요.”

“그로프, 그래도 너무 상심하지 마. 네 옆에는 내가 있잖아.”

발레린이 싱긋 미소를 짓자 그로프가 개꿀개꿀 울었다.

“역시 주인님뿐입니다.”

발레린은 미소를 지으며 아까 다 하지 못한 운동을 마저 했다. 그렇게 발레린이 운동을 하고 몸을 단련하고 있을 때 문득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렸다.

발레린이 들어오라고 하자 문이 천천히 열렸다.

“왕자비님, 오늘도 일찍 일어나셨네요!”

“오늘 일찍 델프스로 가는 날이잖아.”

“그럼 아침은 이곳에서 드시겠어요?”

“왕자님은 오늘도 나랑 같이 안 드신대?”

“네, 오늘은 아예 아침을 안 드신다고 하시던데요?”

발레린은 아까 제르딘이 마차에서 만나자고 말하긴 했으나 아침은 먹을 줄 알았다. 설마 했지만 이렇게까지 같이 못 있을 줄은 몰랐다.

발레린이 얼굴에 옅은 실망을 드러내자 루네스가 급히 말했다.

“왕자님께서 바쁘셔서 그럴 거예요. 제가 아까 언뜻 왕자님 집무실을 거치고 왔는데 오늘 델프스에 가신다고 바쁘신 것 같더라고요.”

“그래?”

“네, 그러니 너무 깊이 생각하지 마세요.”

발레린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아침은 방에서 먹을게.”

발레린이 밝게 말하자 루네스가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참고로 드레스는 아침을 다 드시고 갈아입으시면 될 거예요. 그때 제가 단장사와 함께 올게요.”

발레린은 활기차게 고개를 끄덕였다.

“더 필요하신 건 없으세요?”

“아니, 이제 나가도 좋아.”

“네, 아침은 곧바로 들고 올게요.”

루네스는 친절히 인사를 하곤 방을 나갔다. 발레린은 약간 맥이 빠져 침대에 털썩 누웠다. 발레린의 머리 쪽으로 그로프가 다가왔다.

발레린은 천장을 멍하니 바라봤다. 머릿속에는 마차에서 만나자고 하는 제르딘이 둥둥 떠다녔다. 발레린은 제르딘을 생각하며 중얼거렸다.

“그로프, 그래도 왕자님과 같은 마차를 타고 가서 다행이야.”

“그래도 주인님을 생각하는 것 같습니다. 따로 타고 간다면 말이 나왔을 테니까요.”

“그건 그래. 그러고 보면 처음 이 왕궁에 올 때 왕자님과 함께 마차를 타고 왔었는데…….”

발레린은 제르딘과 처음 마차를 탔을 때를 생각했다. 얼굴에는 절로 미소가 그려졌다. 그땐 제르딘은 무척이나 침착하고 정중했다. 물론 지금도 그는 변하지 않았다. 다만 다른 점은 조금은 발레린에게 웃어 준다는 점이었다.

발레린은 그 점을 생각하며 희망을 가졌다.

“그래도 아직 절망할 때는 아니야. 그로프.”

그러곤 발레린은 곧바로 일어나 욕실로 들어갔다. 발레린이 욕실에 있는 사이 루네스가 방으로 들어왔다.

“왕자비님?”

발레린은 욕실 문을 살짝 열어 루네스를 쳐다봤다.

“아침은 갖다 놓고 가.”

루네스는 놀라며 고개를 숙였다.

“그럼 필요한 게 있으시면 언제든지 부르세요.”

그렇게 말하며 루네스는 재빨리 방을 나갔다. 발레린은 문을 닫고서 머릿속에 남아 있는 옛날 노래를 흥얼거리며 몸을 씻었다.

몸을 씻고 난 후 먹는 음식은 꿀맛이었다. 발레린은 전보다 입맛이 더 돌아서 루네스가 가져온 음식을 모두 먹었다. 과일로 입가심을 하자 어느새 그릇은 모두 깨끗해졌다.

마침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렸다.

“들어와.”

그 소리에 맞춰 문이 열렸다. 루네스는 빠르게 접시를 치웠다. 여러 하인들이 발레린의 곁에 섰다. 발레린이 미소를 지으며 보자 그들은 고개를 숙여 인사를 했다.

루네스는 하인들을 보며 발레린에게 말했다.

“왕자비님, 이번에는 왕자비님께서 불편해하지 않으실 사람들을 불러왔어요. 드레스와 함께 머리까지 단장해 드릴 거예요.”

발레린은 그들의 안내에 따라 거울 앞으로 갔다. 거기에 맞춰 여러 드레스가 보였다. 모두 보랏빛 드레스밖에 없었다. 발레린은 그중에서 가장 눈에 띄는 드레스를 골랐다. 늘 입고 다니던 드레스와 비슷했지만 묘하게 소매 부분의 디자인이 다른 드레스였다.

주변에 있던 하인들이 감탄하며 말했다.

“역시 드레스를 보시는 감각이 남다르시네요!”

의외의 말에 발레린이 쳐다보자 하인들이 하나둘씩 말을 이었다.

“이 드레스가 가장 비싼 드레스거든요.”

“맞아요, 장인이 손수 만들어서 가치가 어마어마해요.”

발레린은 새삼 이런 드레스를 입는 것에 행복했다. 예전에는 꿈도 꾸지 못했다. 늘 보랏빛으로 독에 절여진 드레스를 입었다. 그것도 새 드레스가 아니라 버린 드레스였다.

“그리고 이 드레스는 왕자비님을 위해서 특별히 보라색으로 염색했다고 해요. 이 세상에 하나밖에 없기도 하고요.”

하인들은 모두 드레스에 대해 말을 멈추지 않았다. 발레린은 내심 탑 안에서 살 때보다 확실히 삶이 나아졌음을 느끼며 보랏빛 드레스를 보았다. 유난히 빛깔이 깔끔하고 디자인이 섬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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