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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록빛 저주의 공녀님-57화 (57/130)

57화

“개꿀개꿀.”

활기차고 굵은 소리에 발레린은 서둘러 눈을 떴다. 잡초는 언제 그랬냐는 듯 바싹 말라 있었다. 발레린은 눈을 동그랗게 뜬 채 그로프를 쳐다봤다.

“그로프, 성공했어.”

발레린이 멍하게 말하자 그로프가 입꼬리를 올렸다.

“전 주인님이 성공할 줄 알았습니다. 주인님이 아니라면 저는 살지 못했을 테니까요.”

발레린은 저도 모르게 활짝 웃었다.

“이건 기적이야. 그로프.”

“맞습니다. 그동안 저주라고 생각했던 것이 이제는 주인님의 의지대로 움직이는 능력이 되었으니까요.”

발레린은 빠르게 루네스에게 다가갔다. 그리고 시든 잡초를 흔들며 루네스에게 외쳤다.

“루네스! 성공했어!”

루네스는 깜짝 놀란 얼굴로 발레린에게 뛰어왔다.

“그럼 이제 왕자비님의 독기는 왕자비님의 의지대로 움직이는 능력이 된 거예요?”

발레린은 빠르게 고개를 끄덕였다. 루네스는 활짝 웃으며 발레린을 껴안았다.

“왕자비님! 이제 주변에 왕자비님을 이상하게 보는 사람이나 욕하는 사람도 없고, 모두 왕자비님께 함부로 못 대할 거예요. 저주도 아니잖아요!”

“그렇긴 해. 내가 마음대로 조절할 수 있으니까.”

발레린은 살짝 몸이 답답하긴 했지만 루네스가 너무나 정신없이 말해서 그저 동조해 주었다. 발레린도 심장이 날 생선처럼 팔딱팔딱 뛰는 것은 마찬가지였다.

그때 루네스가 다짜고짜 몸을 떼고서 발레린에게 말했다.

“그럼 이제 왕자님께 말씀드려야 하지 않나요?”

발레린은 고개를 끄덕였다. 옆에 있던 그로프도 개꿀개꿀 울었다. 발레린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지금 곧바로 왕자님께 가야겠어.”

발레린은 잔뜩 기대하는 마음으로 정원을 나섰다. 분명 제르딘도 이 사실을 알면 많이 기뻐할 것 같았다. 이제 저주란 것도 저주가 아니게 되었다. 의지대로 독기가 나온다면 필요할 때 쓰면 되는 것이다.

발레린은 미소를 지으며 빠르게 왕궁으로 들어갔다. 제르딘의 집무실로 가는 동안 하인들은 발레린에게 인사를 하곤 재빨리 사라졌다. 루네스는 여전히 그 모습이 신경 쓰이는지 그들을 한참 보다가 발레린에게 말했다.

“왕자비님, 정말 저 하인들에게 말씀하시지 않을 건가요?”

“그래도 인사는 하니까. 내가 괜히 말해 봤자 저들에게 반감만 살 거야. 그리고 난 정말로 아무렇지도 않고.”

루네스는 고개를 끄덕였다.

“역시 왕자비님은 마음도 남다르세요. 저도 왕자비님을 보며 배워야겠어요. 저는 사소한 것에도 화가 나는데 왕자비님은 그런 것에는 신경 쓰시지 않는 걸 보면 저보단 한참 나은 분이시라는 생각도 들어요.”

루네스는 그 말을 하면서 내내 발레린의 칭찬을 늘어놓았다. 발레린은 즐겁게 루네스의 칭찬을 들으며 제르딘의 집무실에 도착했다. 마침 집무실 문을 열고 나오는 보좌관이 보였다.

“왕자비님?”

“안녕하세요, 혹시 왕자님 계신가요?”

“급한 회의가 소집되어서 대회의실에 계십니다.”

“무슨 일이 있나요?”

“내일 왕자비님과 황금 마검을 찾기 위해 델프스 지방으로 가려 하셨는데, 귀족들이 반대하는 바람에 급하게 대회의실에 가셨습니다.”

“내일이요?”

“네, 못 들으셨습니까?”

“왕자님께서 같이 간다고 하셨는데 내일인 줄은 몰랐어요.”

발레린은 아까보다 더 심장이 거세게 뛰는 듯했다. 어깨 위에 있던 그로프도 개꿀개꿀 울었다. 루네스도 발레린을 보며 눈을 빛냈다.

발레린은 그저 눈만 깜빡거리며 보좌관을 쳐다봤다. 보좌관은 잠시 헛기침을 하며 발레린에게 친절히 설명했다.

“내일 아침 일찍 황금 마검을 찾기 위해 델프스 지방으로 가실 겁니다. 아마 3일 정도 계시지 않을까 합니다.”

“3일이요?”

“이미 조사관 몇 명이 그곳으로 내려가서 살펴보고 있습니다. 왕자님과 왕자비님께서 크게 헤매실 일은 없을 겁니다.”

발레린은 고개를 끄덕이며 델프스 지방에 대해서 생각했다. 지도에서 봤던 곳이긴 하지만 황금 마검이 만들어진 곳이란 것은 몰랐다.

“그런데 델프스 지방이 황금 마검을 만든 장인이 있던 곳인가요?”

보좌관이 고개를 끄덕였다.

“예전부터 검을 만드는 장인이 많이 살던 곳이었습니다. 지금도 꾸준히 왕실에 품질이 좋은 검을 납품하고 있습니다.”

발레린은 새로 안 사실에 고개를 끄덕였다. 책에서는 알 수 없었던 사실이었다.

“그럼 왕자님께서 이미 알고 계셨던 건가요?”

“네, 왕자님께서도 예전에 손수 검을 받으시려 델프스 지방으로 가시기도 했으니까요.”

발레린은 머릿속으로 검을 받는 제르딘을 상상해 보았다. 머릿속으로도 제르딘의 멋있는 모습이 생각나 절로 미소가 나왔다.

그때 보좌관이 헛기침을 했다. 발레린은 곧바로 고개를 들어 보좌관을 보았다. 눈이 마주치자 보좌관이 고개를 숙인 뒤 말했다.

“그럼 저는 대회의실로 가 보겠습니다.”

“혹시 저도 대회의실에 가야 하나요?”

“네? 왕자비님께서 왜…….”

“왕자님을 반대하시는 분이 많으니 저라도 가서 말을 해야 하지 않을까 해서요.”

“아, 그건 괜찮을 겁니다. 사르티아 공작과 원로원 귀족들이 왕자님의 의견을 잘 들어 주시고 계십니다.”

발레린은 그나마 다행이라고 생각하며 미소를 지었다. 그렇게 보좌관은 빠르게 사라졌다. 발레린은 보좌관의 뒷모습을 보다가 문득 중얼거렸다.

“그러고 보니 내 독기가 저주가 아니라 능력이 되었다는 걸 말 못 했네.”

옆에서 내내 눈을 빛내던 루네스가 말했다.

“어차피 내일 아침 일찍 왕자님과 함께 가시니 말씀하실 기회는 많을 거예요.”

어깨 위에 있던 그로프도 개꿀개꿀 울면서 말했다.

“맞습니다. 내일 일찍 떠나시니 그때 말씀하시면 될 겁니다.”

발레린은 밝은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내일 일찍 제르딘과 함께 떠난다고 하니 하늘을 날아갈 듯한 기분이었다.

10. 델프스 지방

다음 날, 발레린은 이른 시간에 일어났다. 망설이지 않고 곧바로 고개를 돌리자 빈 침대가 보였다. 어젯밤에도 제르딘은 늦게까지 들어오지 않았다.

발레린은 어제만은 제르딘이 들어오는 모습을 보고 자려고 했지만 차마 밤을 새울 수는 없었다. 항상 일찍 잤기에 잠이 계속 오는 것을 막을 수 없었다.

발레린은 바로 시계를 확인했다. 새벽 4시 30분이었다.

‘평소보다 일찍 일어났는데.’

심지어 주변은 아직 해가 완전히 뜨지 않아 어두웠다. 발레린은 머리맡에 자고 있는 그로프를 쳐다봤다. 그로프는 눈을 꾹 감고서 가만히 몸을 겹친 채 자고 있었다. 통통한 그로프를 넉넉한 마음으로 보다가 이내 천천히 침대에서 벗어났다.

발레린은 그로프가 깨지 않도록 조심스럽게 커튼을 쳤다. 창문을 열지 않았는데도 쌀쌀함이 느껴질 정도였다.

발레린은 아직 뜨지 않은 해를 생각하며 마음속으로 기도했다.

‘이번 여행으로 꼭 왕자님의 마음이 변했으면 좋겠어요.’

제르딘은 친절한 것 같으면서도 은근히 가까이 오지 말라고 하며 선을 그었다. 발레린은 그 격차가 너무 느껴져서 마음이 불안했다. 심지어 사람의 마음이니 기다림으로 해결되지 않을 것 같다는 생각까지 들었다.

하지만 발레린은 생각은 거기서 그치고 그로프가 깨지 않도록 조심스럽게 운동을 시작했다. 어느새 얼굴에는 미소가 만연했다. 오늘 제르딘과 함께 떠나는데 기쁘지 않을 이유가 없었다.

그렇게 발레린이 밝은 얼굴로 운동을 한참 동안 하고 있을 때였다.

문이 천천히 열렸다. 발레린은 깜짝 놀라서 문 쪽을 바라봤다. 순간 하늘빛 눈동자와 마주쳤다. 가볍게 내려온 금발은 이전과 다르게 차분한 분위기를 풍겼으며 곧게 뻗은 코와 조화로운 입술은 은근히 어두운 방에서 그의 미모를 돋보이게 했다.

발레린은 저도 모르게 외쳤다.

“왕자님?”

제르딘도 놀라운 것은 마찬가지인지 눈썹에 살짝 힘을 주었다.

“벌써 일어난 겁니까?”

“네, 오늘은 유난히 일찍 눈이 뜨였어요.”

발레린은 싱긋 웃었다. 제르딘은 잠시 머뭇거렸다. 그는 선뜻 방 안으로 들어오지 않았다. 발레린은 의아해하다가 문득 물었다.

“그런데 왕자님은 지금 들어오시는 거예요?”

“아니요. 아침 산책을 하고 왔습니다.”

“아침 산책이요?”

“어렸을 때부터 이 시간에 일어나서 산책을 하고 있습니다.”

이미 제르딘에겐 완전한 습관으로 자리 잡은 듯했다. 발레린은 처음 안 사실에 머릿속이 멍하다가 이내 제르딘을 보았다. 그는 가벼운 옷차림이었다. 왕정 회의에서 보던 모습과는 다르게 조금은 풀어진 모습이었다.

발레린은 새삼 이런 모습도 나쁘지 않아 저도 모르게 계속 바라보았다. 제르딘은 잠시 눈썹을 찌푸렸다가 고개를 들어 발레린에게 말했다.

“그럼 전 가 보겠습니다.”

“벌써 가신다고요?”

제르딘은 고개를 끄덕이며 물러났다. 그러다 문득 발레린의 얼굴을 보았다.

“확실히 방독면을 벗고 있으니 공녀의 얼굴이 더 잘 보이네요.”

발레린은 저도 모르게 높은 목소리가 나갔다.

“네?”

제르딘은 피식 웃으며 말했다.

“저는 이만 나가 볼 테니 마차 앞에서 뵙겠습니다.”

발레린은 그저 멍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제르딘은 가볍게 방을 나갔다. 문이 완전히 닫히자 발레린은 문을 쳐다보며 멍하게 중얼거렸다.

“꿈같아.”

그때 그로프가 울었다.

“개꿀개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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