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6화
발레린은 설마 하는 심정으로 꽃병에 있는 백합에 숨을 불어넣었다. 하지만 백합은 시들지 않았다.
“이상하지 않아?”
그로프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발레린은 곰곰이 생각하다가 예전에 읽었던 책 내용을 기억했다. 재미있는 이야기가 많아 여러 번 읽어서 유난히 기억에 남는 책이었다.
“그러고 보니 내가 본 책에서는 ‘어떠한 사건을 겪은 뒤에는 저주받은 능력을 자유자재로 사용할 수 있다’고 본 것 같아.”
“능력을 자유자재로 사용할 수 있다고요?”
“간혹 저주라고 생각했던 것이 나중에는 능력이 되었다는 내용을 책으로 본 적이 있어.”
“그럼 주인님은 이제 저주라고 생각했던 독기가 주인님만의 능력이 되었다는 겁니까?”
“아직 확실하게는 모르겠어. 조금 전에는 널 꼭 살리고 싶다는 생각을 했었고…….”
발레린은 문득 백합을 보았다. 백합에게 숨결을 불어넣을 때는 죽이고 싶다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오히려 백합이 싱싱하게 살아 있었으면 했다.
발레린은 백합을 물끄러미 보다가 말했다.
“그러고 보면 어머니도 비슷한 말을 한 것 같아. 0오히려 이건 저주가 아니라 행운이고, 어머니도 나와 비슷하게 저주인 줄 알았는데 능력이었다고 말했었고.”
“그럼 정말 이제 주인님은 독기를 자유자재로 사용할 수 있다는 말인가요?”
“그건 모르겠어.”
발레린은 싱싱한 백합을 잠시 쳐다보다가 곧바로 그로프를 돌아봤다.
“그로프.”
“네, 주인님.”
“내가 정말로 독기를 마음대로 쓸 수 있는지 실험하러 갈래?”
“어디로 말입니까?”
“아까 왕궁 뒤에 잡초가 많은 곳에 말이야.”
그로프는 고개를 끄덕였다. 발레린이 손을 내밀자 그로프는 곧바로 손으로 올라왔다. 발레린은 그로프를 어깨 위에 올리곤 창문을 확인했다. 창문은 열려 있었는데 옆방과 꽤 가까웠다.
만약 작정하고 이곳으로 온다고 한다면 옆방에서 올 수도 있을 것 같았다.
발레린은 혹시 몰라 창문을 잠갔다. 마침 문을 열다가 루네스와 마주쳤다.
“왕자비님, 어디 가세요?”
“잠깐 정원에서 확인할 게 있어서.”
“무슨 확인이요?”
“내 몸에 있는 독기가 내 의지대로 움직이는지 확인하고 싶어서.”
“그게 가능해요? 이제 왕자비님의 숨결로는 독기가 나오지 않는다고 하지 않았나요?”
“그렇긴 한데 아까 그로프를 살릴 땐 내 독기가 통해서.”
루네스는 놀란 눈치였다. 그녀는 눈을 동그랗게 뜬 채 그로프를 쳐다봤다. 그로프는 그저 멀뚱멀뚱 루네스와 눈을 맞췄다. 루네스는 고개를 갸웃거리다가 발레린에게 말했다.
“왕자비님, 그러면 이제 왕자비님은 정말 대단하신 분이 되는 거예요!”
“대단하다고?”
“네! 만약 독기를 자유자재로 사용한다면 왕자비님께 함부로 다가올 사람도 없을 거라고요. 그리고 독은 오히려 왕자비님의 피에 흐르고 있으니 왕자비님을 위협하는 것도 없을 거고요.”
루네스는 꽤 흥분했는지 말이 빨랐다. 발레린은 빙긋 웃었다.
“그런데 아직 확인을 더 해 봐야 해. 어쨌든 이럴 땐 독기가 안 나오는 건 분명하니까.”
루네스는 그저 고개를 끄덕였다. 발레린은 아까 열린 창문을 기억하며 루네스에게 말했다.
“그리고 내가 없을 땐 창문을 잠가 놓도록 해. 혹시나 창문 너머 이상한 게 들어올 수 있으니까.”
“이상한 거요?”
“아까 그로프가 뱀에게 물려서 죽을 뻔했거든.”
루네스는 곧바로 고개를 숙였다.
“죄송해요, 왕자비님. 제가 잘 확인했어야 했는데.”
“아니야. 그로프 말로는 창문으로 뱀이 들어왔대. 그러니 내가 없을 땐 항상 창문을 잠가 놓았으면 좋겠어.”
“네, 명심할게요.”
발레린은 미소를 짓고는 재빨리 복도를 나섰다. 옆으로 루네스가 빠르게 따라왔다. 발레린이 눈길을 주자 루네스가 급히 말했다.
“내일 보름달이 뜨는 날이라 왕궁 내에서도 꽤 주시하고 있어요.”
발레린은 순간 제르딘이 생각났지만 애써 모르는 척 물었다.
“왜?”
루네스는 주변을 두리번거리고는 발레린에게 속삭이듯 말했다.
“왕자님 소문이 돌고 있잖아요. 저도 여기 온 지 몇 달 되지 않았는데 왕자님에 대한 소문은 꽤 많이 들었어요.”
“무슨 소문?”
그때 몇몇 하인이 몰려서 지나갔다. 그들은 발레린을 보자마자 고개를 숙이곤 빠르게 사라졌다. 루네스는 그들을 지켜보다가 발레린에게 작게 말했다.
“왕자님이 보름달이 뜰 때마다 방에서 안 나오신대요. 그날은 유령에 홀려서 무슨 일이 있어도 방에 계신다고 했어요.”
발레린은 제르딘이 유령에 홀렸다는 말이 뜬금없었지만 그저 고개를 끄덕였다. 생각보다 발레린이 반응하지 않자 루네스가 물었다.
“혹시 소문 들으셨어요?”
“비슷한 말은 들었어.”
“그런데 저는 왕자님이 유령에 홀렸다는 건 믿지 않아요. 보름달이 뜨는 날마다 왕자님이 편찮으신 게 우연히 겹쳐서 그런 소문이 난 것일 수도 있고요.”
발레린은 차마 늑대 수인이라는 말은 할 수 없었다. 제르딘이 왕이 될 때까지 숨겨야 하는 사실이었다.
루네스를 믿는다고 해도 발레린은 제르딘의 비밀을 굳이 알리고 싶지 않았다. 그리고 그 비밀을 자신만 알고 있다는 것에 묘한 행복감이 피어오르기도 했다.
그때 루네스가 말을 이었다.
“그래서 저는 왕자비님이 이곳에 오신 게 정말 좋아요! 다른 누구보다도 능력이 있으시고 확실히 이곳에 있는 사람보다 좋은 분이잖아요!”
루네스의 눈빛이 반짝였다. 발레린은 그저 미소를 지었다. 루네스는 옆에서 신나게 떠들었다.
“왕자비님의 드레스도 그렇고, 다른 사람처럼 유행만 따르지 않으시고요. 그리고 어느 누가 독을 먹고 과일 맛을 느낄 수 있겠어요? 심지어 왕자비님은 독을 먹어도 죽지 않으시잖아요!”
“그건 그래. 그러고 보니 요즘 독을 먹은 지가 꽤 되었네.”
그때 루네스가 발레린에게 상체를 숙여 작게 속삭였다.
“요즘 배도스 공작이 몸을 사리고 있는 것 같았어요. 제가 우연히 대회의실을 지나가면서 들었는데요. 요즘에는 독을 조심하는 것 같았어요. 아무래도 왕자님 주변에 있던 사람들이 독으로 죽어 가자 원로원 귀족들이 의심해서 그러는 것 같았어요.”
어깨 위에 있던 그로프가 울었다.
“개꿀개꿀.”
발레린은 생각보다 제르딘의 편이 넓어지는 것 같아 기분이 좋았다. 왕궁 밖으로 향하는 문 앞에서, 발레린은 열린 문 사이로 나갔다.
문지기가 언뜻 발레린을 보았다. 발레린이 그대로 보자 그들은 놀란 눈으로 고개를 숙였다.
옆에 있던 루네스가 그 모습을 보더니 발레린에게 말했다.
“왕자비님, 아무래도 이 왕궁에 있는 사람들은 모두 왕자비님을 너무 적대시하는 것 같아요. 저렇게 인사를 하긴 해도 도망치듯 가고, 놀라기 바쁘고요.”
발레린은 하인들의 행동에 아무 생각이 없었다. 하지만 루네스가 너무나 안타깝게 여기는 듯해서 미소를 지었다.
“루네스, 네가 날 걱정하는 것만으로도 괜찮아. 어차피 하인들 입장에선 내가 낯설 테니까.”
“그래도 이제 왕자님께서 정식으로 공표까지 했는데 저렇게 행동하는 건 왕자비님께 예의가 어긋나는 것 같아요.”
“조금 있으면 저 사람들도 나에 대한 인식이 바뀔 거야. 기다리기만 하면 돼.”
발레린의 어깨 위에 있던 그로프가 다시 울었다.
“개꿀개꿀.”
루네스는 그저 고개를 끄덕이며 발레린과 함께 걸었다. 발레린은 왕궁 뒤로 향했다. 왕궁 뒤에는 관리가 덜 행해지는지 확실히 군데군데 잡초가 머리를 들이밀고 있었다.
발레린은 가볍게 잡초를 잡아 뺐다. 뿌리까지 완벽하게 뽑히자 루네스가 감탄했다.
“역시 왕자비님이세요. 어떻게 이렇게 깔끔하게 뽑으세요?”
“내 손에 힘이 좋나 봐.”
그러곤 발레린은 잡초를 이리저리 살폈다. 엄청 흔한 잡초였다. 제초제를 뿌려도 어떻게든 고개를 들이밀어서 사는 강한 생명력을 지닌 잡초였다.
발레린은 루네스에게 고개를 돌렸다.
“루네스, 이 잡초가 내 능력에 따라 움직이는지 시험해 보고 올게.”
“제가 같이 가면 위험할까요?”
“내 독기가 주변에 퍼질지도 모르니까 조금 떨어져 있는 게 좋을 것 같아.”
루네스는 고개를 끄덕이며 몇 발자국 물러났다. 발레린은 거기에서 더 물러나서 풀이 가득 있는 곳으로 갔다.
발레린은 내심 심장이 두근거렸다. 그동안 저주라고 여겼던 독기를 이제는 제 마음대로 쓸 수 있다고 하니 설레는 마음도 있었다. 하지만 생각처럼 되지 않을까 하는 불안함도 동시에 존재했다.
발레린은 침을 꼴깍 삼켰다. 그로프는 그 울림을 들었는지 나직이 말했다.
“주인님, 성공할 겁니다. 솔직히 주인님이 아니면 성공하지 않을 이유도 없습니다.”
“내가 생각했던 대로겠지?”
“네, 주인님은 저를 또 살리지 않으셨습니까?”
발레린은 그로프의 말에 용기를 얻었다. 그리고 고개를 돌려 잡초를 보았다. 지나치게 생생한 잡초는 아무리 밟아도 꺾어지지 않을 것처럼 빳빳해 보였다.
발레린은 오늘은 이 잡초에게 미안하다고 생각하며 잡초가 시들기를 빌었다. 그리고 눈을 감고 천천히 잡초에 숨결을 불어넣었다.
“그로프, 어떻게 됐어?”
발레린은 차마 눈을 떠서 볼 수 없었다. 만약 시들지 않았다면 그로프에게 했던 것은 그저 기적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