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5화
제르딘은 발레린을 잠시 보다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제가 공녀가 원하는 걸 줄 수 없는데도 좋습니까?”
“전 원래부터 기다리는 건 잘했어요.”
“하지만 전…….”
“왕자님께서 저에게 그런 감정을 줄 수 없는 건 잘 알고 있어요.”
발레린은 제르딘의 입에서 사랑을 줄 수 없다는 말은 더 듣고 싶지 않았다. 어차피 알고 있는데 그 사실에 대해 각인해 주는 건 싫었다.
발레린은 시계를 한번 보고는 제르딘에게 말했다.
“왕자님, 그럼 전 가 볼게요.”
마음 같아선 제르딘과 계속 있고 싶었지만 그가 귀찮아할 것 같아 더 있지 못했다. 거기다 제르딘이 짝사랑까지 하지 말라고 말을 할까 봐 두렵기도 했다.
물론 제르딘은 제 마음대로 하라고 했지만 발레린은 아무래도 불안했다.
제르딘은 별말 하지 않았다. 발레린은 제르딘에게 인사를 한 뒤 나가기 위해 문을 열었다. 그때 보좌관과 마주쳤다. 보좌관은 먼저 발레린에게 인사를 했다. 발레린은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숙이곤 집무실을 나갔다.
보좌관은 문을 닫고는 제르딘에게 다가왔다.
“왕자비님에 대한 공표는 모두 끝냈습니다. 다들 직접적으로는 왕자비님의 방독면에 대해서 말을 꺼내지 못할 겁니다.”
제르딘은 그저 고개를 끄덕였다. 살짝 지친 그의 얼굴에 보좌관이 조심스레 물었다.
“그나저나 내일이 보름달이 뜨는 날입니다.”
“약은?”
보좌관은 급히 주머니를 뒤져서 약을 내밀었다.
“여기 있습니다.”
제르딘은 붉은 약을 입 안에 집어넣었다. 보좌관은 그를 지켜보며 걱정스레 물었다.
“왕자비님도 같은 방을 쓰시는데 괜찮으시겠습니까?”
“그래서 지금 후회돼. 발레린을 생각하면서 같이 방을 쓰자고 했지만 잘못 생각했어.”
“왕자님, 그래도…….”
“처음에는 주변 소문을 의식했었지. 어쨌든 그런 소문만 가라앉으면 해결될 테니까. 그런데 나도 모르게 발레린이 자는 모습을 보고 있고 자꾸 시선이 향하니까.”
보좌관은 침을 꼴깍 삼켰다. 제르딘은 말없이 찻잔을 보다가 이내 시선을 들었다.
“그래도 아직 발레린을 완전히 믿지 못하겠어. 왕궁은 내가 믿던 사람도 내 발에 도끼를 찍는 곳이니까.”
제르딘이 차갑게 말했다.
“왕자님, 아직도 그분이 이곳을 벗어난 일 때문에 그러십니까?”
제르딘은 대답 없이 무심하게 있자 보좌관이 조심스레 말했다.
“그래도 왕자비님을 너무 밀어내지 마십시오. 그분이 아니었다면 왕자님께선…….”
“어차피 나랑 엮여 봤자 좋을 게 없어. 잡종 피에 보름달이 뜨는 날마다 피를 토하며 심장이 뜯길 것 같은데.”
“하지만 한방을 쓰는 것 자체가 그 모습을 유일하게 왕자비님께 보여 주는 것 아닙니까?”
제르딘은 말없이 가만히 있었다.
“왕자님도 결국 왕자비님을 이미 믿고 계신 것 아닙니까?”
제르딘은 아직 덜 마신 차를 바라봤다. 보랏빛 물이 유난히 눈에 띄었다. 그는 한참 물끄러미 보다가 말했다.
“발레린과 함께 황금 마검을 찾으러 갈 거야.”
“황금 마검이요?”
제르딘이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지금까지 조사한 바로 황금 마검은 아직 발견되지 않았습니다.”
“그래도 발레린 말대로 시도는 해 봐야지. 그나저나 황금 마검을 만든 장인이 있던 곳이 델프스 지방인가?”
“그건 맞습니다만…….”
“내일 당장 그곳으로 갈 채비를 해.”
“하지만 왕자님, 아직 왕정 회의도 남아 있고 귀족 회의도 있습니다.”
“잠시 미뤄. 지금은 이게 더 급하니까.”
“하지만 배도스 공작 측이 가만히 있지 않을 텐데요.”
“그쪽만 난리를 치겠지. 원로원 귀족 측에선 내가 황금 마검을 찾으러 간다고 한다면 별말 없을 거야.”
“하지만 내일은 보름달이 뜨는 날입니다. 이곳에서 조금 쉬시고 출발하는 것이 어떻습니까?”
“아니, 차라리 왕궁을 벗어나 있는 게 좋을 것 같아. 요즘 부작용도 더 심해지고 있으니.”
“그렇지만 낯선 곳에 가시면 더 힘들 수도 있습니다.”
제르딘은 그저 찻잔을 보며 무감하게 말했다.
“내 인생에 안 힘든 때가 있었나? 늘 가시밭길이었는데.”
“왕자님. 그래도 이건…….”
“그렇다고 발레린을 혼자 보낼 수 없잖아. 기사들도 믿음이 가지 않아. 그리고 지금 발레린의 숨결에 독기가 없어서 사람들이 다가오니 더 위험할 수도 있고.”
“하지만 왕자님, 그렇다고 사람들이 무작정 왕자비님께 다가오지는 않을 겁니다. 어쨌든 소문도 있고…….”
“내가 두 번 명령을 해야 하나?”
제르딘이 차가운 눈초리로 쳐다봤다. 보좌관은 굳은 얼굴로 고개를 숙였다.
“델프스 지방으로 갈 채비를 하겠습니다.”
발레린은 집무실을 나오자마자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사람들은 모두 발레린을 보고 놀라며 옆으로 바짝 붙어 걸었다. 발레린은 늘 있는 일이라 개의치 않고 방으로 향했다.
‘그로프는 잘 있겠지.’
그래도 발레린은 그로프가 옆에 있어서 내심 다행이었다. 그로프가 없었다면 이 왕궁에서 외로웠을 것이다.
마침 발레린이 방 근처에 도착하자 루네스가 반겼다.
“왕자비님!”
그러나 루네스는 눈을 동그랗게 뜨며 말했다.
“방독면은요?”
“이제 내 숨결에 독기가 없어져서 괜찮아.”
루네스는 환한 얼굴로 말했다.
“그럼 이제 왕자비님은 방독면을 벗고 다니셔도 된다는 건가요?”
발레린은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정말 잘됐네요! 안 그래도 왕자비님이 많이 답답해 보였었는데.”
“고마워, 루네스, 그나저나 별일은 없었지?”
“의심스러운 사람이 몇 명 이곳에 왔긴 하지만 왕자비님이 아무도 들이지 말라고 하셔서 다른 곳으로 갔어요.”
“그로프는?”
“그로프는 지금 방 안에 있어요.”
“루네스, 고생했어. 이제 내가 방에 있을 테니까 좀 쉬어도 돼.”
“왕자비님, 필요한 게 있으시면 언제든지 불러 주세요.”
“그럼 도서관에 있는 자료 좀 들고 올래? 여기서 정리하게.”
“네, 당장 들고 올게요!”
발레린은 미소를 지으며 루네스를 보다가 이내 방으로 들어갔다. 방은 깨끗하게 치워져 있었다. 생각보다 방은 조용했다. 발레린은 이리저리 둘러보며 그로프를 찾았다. 그때 하얀 침대보에 쓰러진 빨간 개구리가 보였다.
발레린은 재빨리 침대로 뛰어갔다.
“그로프?”
발레린이 조심스럽게 말했지만 그로프는 미동조차 없었다. 발레린은 서둘러 그로프를 들어 이리저리 살폈다. 그로프는 축 늘어져서 눈도 뜨지 않았다.
“그로프!”
하지만 그로프는 대답이 없었다. 발레린은 할 수 없이 그로프의 배에 입을 맞췄다. 하지만 그로프는 아무 기색이 없었다.
순간 발레린은 자신의 숨결에 있는 독기가 사라졌다는 것을 깨달았다.
발레린은 머릿속이 새하얗게 되는 기분이었다. 여전히 그로프는 축 늘어져 있고 자신의 능력은 이제 통하지 않았다.
방독면을 쓰지 않는다고 해서 좋았지만 그건 사람과 있을 때 좋은 것일 뿐, 그로프와 있을 땐 그 능력이 절실했다.
발레린은 눈물이 나오려던 것을 겨우 참고 다시 그로프를 살폈다. 그리고 안 된다는 것을 알면서도 다시 한번 그로프의 배에 입을 맞췄다.
아직 초록빛 입술인 것을 보면 여전히 몸에 초록빛 저주가 결려 있다는 것인데…….
‘제발, 이번만이라도 그로프에게 독기가 그대로 전해지기를.’
그렇게 발레린은 간절히 빌면서 그로프의 배에서 입을 뗐다. 그리고 잠시 후 그로프가 캑캑거리며 기침을 해 댔다. 발레린은 깜짝 놀라 그로프를 쳐다봤다.
그로프는 천천히 몸을 가다듬고 발레린을 쳐다봤다.
“그로프, 괜찮아?”
그로프는 힘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어떻게 된 거야? 왜 갑자기 침대에 쓰려져 있었어?”
“아까 창문으로 이상한 뱀이 들어왔었습니다. 그래서 뱀을 피하려고 이리저리 뛰어다녔는데 뱀에게 잘못 물리는 바람에…….”
발레린은 그로프의 다리 부분을 보았다. 이빨 자국이 보였는데 핏자국도 언뜻 보였다.
“그래도 이렇게 살아서 다행이야.”
“주인님께서 힘써 주신 덕분입니다.”
“그런데 그 뱀은 어떻게 들어왔을까?”
“창문으로 들어온 걸 보면 이 방 근처에서 일부러 이쪽으로 밀어 넣은 게 아닌가 합니다. 그리고 아예 이곳에 독사를 푸는 게 아니라 이 독사로 일을 그르치게 만들려는 것처럼 보였습니다. 제가 그나마 이곳에 있어서 뱀이 방을 나간 것 같기도 하고요.”
“배도스 공작은 정말 상상 이상이구나.”
발레린은 화가 났다. 자신만 못살게 굴면 되지, 그로프까지 괴롭히는 건 용납할 수 없었다. 발레린은 그로프를 걱정스레 살폈다.
“정말 괜찮은 것 맞지?”
“네, 괜찮습니다. 머리가 약간 어질하긴 하지만 견딜 만합니다.”
“정말 견딜 만해?”
그로프는 고개를 끄덕였다. 발레린은 다행이라는 생각을 하면서도 한편으론 의아했다. 발레린이 그로프를 뚫어지게 보고 있자 그로프가 개꿀개꿀 울었다.
“주인님, 너무 걱정하지 마십시오. 저는 어떻게든 살아남는 디디카 호수의 독 개구리니까요.”
그 말에 발레린은 그나마 얼굴을 펼 수 있었다. 하지만 머릿속에는 여전히 의문이 남았다.
“주인님, 혹시 걱정이 있으십니까?”
“아니, 이 상황이 이상해서.”
“뭘 말입니까?”
“분명 내 숨결에 독기가 없는데 배에 입을 맞추니까 네가 살아났잖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