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4화
“축하합니다. 입에서 이젠 독기가 안 나오신다고 하니.”
“전 이 모든 게 왕자님 덕분 같아요.”
“제 덕분이라니. 공녀가 운이 좋아서 그런 걸 겁니다.”
“하지만 그러기에는 제가 한 게 없는걸요. 거기다 책에서 늑대 수인은 다른 인간과 달라서 인간의 저주를 중화해 주는 역할도 한다고 봤었어요.”
제르딘은 잠시 말이 없었다. 그러다가 그는 이내 굳은 얼굴로 말했다.
“그럼 결혼식 때 제가 잠깐 입을 맞춰서 공녀의 독이 중화되었다는 말입니까?”
“사실 그게 아니면 도저히 다른 건 생각나지 않아요. 그게 제일 타당하기도 하고요.”
“독이 풀릴 만한 음식을 먹어서 그럴 수도 있지 않습니까?”
“아니요. 특히 저같이 독과 연관된 저주는 음식을 먹는다고 풀리지 않아요. 여러 책에서 공통적으로 주장하는 것이기도 하고요.”
제르딘은 여전히 말없이 발레린을 쳐다봤다. 그의 시선은 살짝 굳어 있었지만 화난 것 같지는 않았다. 발레린은 활짝 웃으며 말했다.
“저는 왕자님이 늑대 수인의 피가 섞여서 정말 좋아요. 그렇지 않았다면 이렇게 갑자기 제 독기가 사라지진 않았을 거예요.”
그때 제르딘이 헛웃음을 터뜨렸다. 발레린이 의아해하자 제르딘이 입을 열었다.
“그렇게 말한 사람은 공녀가 처음입니다.”
그 말에 발레린은 기분이 좋아져 자연스레 목소리가 커졌다.
“제가요?”
제르딘은 고개를 끄덕였다.
“전 잡종 피가 섞인 것을 숨겼습니다. 제 스스로 그런 피가 섞였다는 게 싫었거든요.”
제르딘은 자조적인 미소를 지었다.
“그런데 공녀가 그런 말을 하니 기분이 묘합니다.”
발레린은 그 말이 이상하게 비꼬듯이 들렸다. 그래서 서둘러 그에게 항변했다.
“일부러 작정하고 그렇게 말한 건 아니에요! 그냥 저는 단지 그대로 말을…….”
“공녀가 일부러 그렇게 말한 거라고 생각하지는 않습니다.”
제르딘은 반듯한 미소를 지었다. 발레린은 지금 제르딘이 무슨 생각을 하는지 도저히 짐작할 수 없었다. 그는 어떨 땐 한없이 친절해 보이다가도 어떨 땐 한없이 다른 사람 같아 보이기도 했다.
그때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렸다. 제르딘이 들어오라고 하자 문이 열리면서 여러 사람이 들어왔다.
보좌관이 급히 제르딘에게 와서 말했다.
“독을 조사하는 조사관을 불러왔습니다.”
제르딘은 고개를 끄덕이며 명령했다.
“왕자비의 입김에 독이 없는지 검사해. 없으면 방독면을 벗고 다니도록 공식적으로 공표할 테니.”
조사관은 고개를 숙이곤 방독면을 썼다. 그리고 발레린에게 다가와 말했다.
“잠시 방독면을 벗어 주시겠습니까?”
그 말에 주변에 있던 사람들은 모두 방독면을 썼다. 제르딘은 보좌관이 방독면을 끈질기게 내밀자 천천히 방독면을 썼다.
발레린은 주변에 있는 사람들이 모두 방독면을 쓴 것을 확인하고는 천천히 제 방독면을 벗었다. 조사관은 발레린의 입 주변에 작은 철 막대를 내밀었다.
“이 철 막대에 숨을 불어넣으시면 됩니다.”
발레린은 후하며 숨을 내쉬었다. 철 막대는 아무 표식도 뜨지 않은 채 전과 그대로였다. 조사관은 철 막대를 이리저리 살폈다. 1분 후 조사관은 제르딘에게 보고했다.
“독기가 없습니다.”
제르딘은 방독면을 벗고는 보좌관에게 말했다.
“이제부터 발레린이 방독면을 벗고 다닌다고 게시판에 붙이고 하인들에게도 공표해.”
보좌관은 고개를 끄덕이고는 집무실을 나갔다. 발레린은 무척이나 기쁜 사실에 믿어지지 않았다.
“정말 방독면을 벗고 다녀도 되나요?”
“제가 정식으로 공표했으니 다들 토 달지는 않을 겁니다. 만약 이 문제에 대해 안 좋은 말이 들리면 곧바로 제게 말하세요. 제 말을 어기는 것은 즉시 감옥행이니까요.”
발레린은 고개를 끄덕였다. 다만 이 역사적인 순간에 그로프가 없는 것이 아쉬웠다. 그래도 발레린은 마냥 기분이 좋아 미소를 지었다.
하지만 근처에 있던 사람들은 여전히 방독면을 쓰고 있었다. 제르딘도 그것을 깨달았는지 조사관에게 말했다.
“자네가 확인하지 않았나? 이제 발레린의 입김에 독이 없다고.”
“하지만 왕자님, 독이란 것은 언제 나올지도 모르고…….”
“지금 내 말에 토를 다는 건가?”
조사관은 황급히 고개를 숙였다.
“아닙니다.”
“그럼 당장 방독면을 벗어라.”
조사관은 황급히 방독면을 벗었다. 그가 벗자마자 주변에 있던 사람들도 모두 벗었다. 제르딘은 그들을 쳐다보지 않고 손을 내저었다.
조사관은 제르딘에게 인사를 하곤 집무실을 나갔다. 한순간 집무실이 조용해졌다. 제르딘은 차를 들어 마셨다. 발레린은 그를 잠시 보다가 말했다.
“왕자님, 아까 황금 마검에 대해서 말인데요. 그럼 제가 혼자 가서…….”
“차라리 저와 함께 가는 게 낫겠습니다.”
발레린은 그 말에 너무나 놀라서 말이 나오지 않았다. 제르딘은 천천히 말을 이었다.
“어차피 저도 황금 마검을 찾고 있었고 공녀에게 이 일을 다 맡기는 건 저와 맞지 않아서요.”
“바쁘지 않으세요?”
“급한 일은 모두 끝냈습니다.”
“하지만 배도스 공작은 왕자님이 없으면 무슨 짓을 할지 모르잖아요.”
“원로원 귀족들도 있어서 그렇게까지 막나가지는 않을 겁니다. 원로원 의원들 중 몇몇은 아예 배도스 공작에게 돌아섰다는 사람도 있거든요.”
뜻밖의 사실에 발레린은 그저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발레린은 여전히 제르딘이 걱정되었다.
“그럼 왕자님이 없는 동안 일은 누가 대신 하나요?”
“오랫동안 있지는 않을 거라서 누가 대신하지는 않을 겁니다. 간혹 중요한 서류는 보좌관이 받아 올 거고요.”
“보좌관은 믿을 수 있는 사람인가요?”
그 말에 제르딘의 한쪽 입꼬리가 올라갔다. 그의 묘한 미소가 너무나 아름다워 발레린은 순간 할 말을 잃고 멍하니 쳐다봤다.
“보좌관은 제가 어렸을 때부터 저를 봐 왔던 사람입니다. 제가 잡종 피 때문에 보름달이 뜨는 날마다 고생을 해도 그에 대해선 말을 흘리지 않았고요.”
“그나마 다행이네요. 그분이라도 왕자님을 생각해 주셔서요.”
“이제는 사르티아 공작도 있지 않습니까?”
“아까 왕정 회의에선 아무 말도 하지 않으시던데요.”
“그래도 그분은 제가 하고자 하는 일에는 곧잘 저를 지지해 주십니다. 어제는 그 상황에 직접적이라 말을 아낀 것 같긴 했지만.”
발레린은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아버지가 책이라도 잘 읽었다면 그때 할 말이 많았을 것이다. 하지만 사르티아 공작은 책을 많이 읽지 않았다. 그러니 탑에 그렇게 낡은 책을 모두 버렸지.
만약 책 읽기를 즐기고 좋아했다면 낡은 책이라도 읽었을 것이다. 낡은 책이야말로 새로 나온 책과 다르게 깊은 정보가 곳곳에 숨어 있으니까.
그럼에도 발레린은 사르티아 공작이 그렇게 제르딘을 지지해 주니 새삼 고맙기도 했다. 그러나 그것도 잠깐이었다.
“그러고 보면 저희 아버지는 왕자님께서 땅을 준다고 하셔서 그렇게까지 지지하시는 거죠?”
제르딘이 고개를 끄덕였다.
“만약 그게 아니면 사르티아 공작도 어쩔 수 없을 겁니다.”
“그건 그래요. 제가 탑 안에 있을 때 한 번도 오지 않았으니까요.”
발레린은 어머니를 생각하다가 이내 생각을 고쳐먹고 더 하지 않았다. 우울해해 봤자 우울한 기분에 더 밑으로 파고들어서 나중에 올라오기가 쉽지 않았다.
그래서 발레린은 우울한 기분이 문득 들 때마다 책을 펼쳤다. 책을 읽으면 그나마 우울한 기분이 잊히기 때문이다.
그때 문득 제르딘이 말했다.
“이제 방독면을 벗고 다니니 훨씬 편하겠습니다.”
“모두 왕자님 덕분이에요. 그러고 보면 제가 이곳에 온 이후로 왕자님 덕만 보고 있네요.”
발레린은 진심으로 말했다. 그나마 제르딘 덕분에 이렇게 방독면을 벗을 수 있었다. 한편 제르딘은 발레린의 입술을 잠시 바라보았다. 그의 끈질긴 시선에 발레린이 눈을 빛내자 제르딘이 옅은 한숨을 내쉬었다.
“그런데 괜찮으시겠습니까?”
“뭐가요?”
“방독면을 벗으면 사람들은 공녀의 얼굴을 더 볼 테니까요.”
발레린은 제르딘의 걱정에 오히려 기분이 더 좋아져 빙긋 웃었다.
“전 괜찮아요. 어차피 어렸을 때부터 사람들이 초록색 입술이라고 엄청 놀려서 이젠 단련이 됐어요.”
제르딘의 얼굴은 더 안 좋아졌다. 그는 굳은 얼굴로 발레린을 쳐다봤다. 발레린이 의아해하자 제르딘이 말했다.
“저주에 걸린 게 싫었던 적은 없습니까?”
“어렸을 때 저주 때문에 아버지가 저를 한 번도 보러 오지 않으셔서 많이 서럽기도 했어요. 하지만 그럴 때마다 어머니가 곁에서 제게 좋은 말을 많이 해 주셔서 그나마 견딜 만했어요.”
제르딘은 고개를 끄덕였다.
“공녀에겐 어머니가 좋은 분이셨군요.”
“네, 지금도 어머니가 하신 말씀을 늘 마음속에 지니고 다녀요.”
제르딘이 궁금해하며 쳐다보자 발레린은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
“울기만 하면 내 편은 없겠지만 웃으면 모두 내 편이 된다고요.”
“그래서 공녀가 자주 웃는 겁니까?”
“그렇기도 하고 왕자님 곁에 있으면 확실히 웃음이 자주 나와요.”
“왜요?”
“왕자님 얼굴이 잘생기기도 했고, 그냥 보기만 해도 좋아서요.”
발레린은 활짝 미소를 지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