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3화
“아니에요! 제가 도움이 되니까 좋은걸요. 그나저나 원래 왕정 회의에서 저렇게 사소한 문제로 다투나요?”
제르딘은 고개를 끄덕이며 앞으로 걸어갔다.
“제가 태어났을 때부터 그랬습니다. 아니, 이 왕국의 세워졌을 때부터 저런 문제로 싸웠을 겁니다.”
“하긴 『천년 왕국사』에서도 그런 문제를 많이 꼬집긴 했어요. 왕국의 일을 너무나 깔끔하게 하려는 나머지 아주 사소한 것에 집착을 한다고요.”
“그런 부분 때문에 원로원의 일부 귀족들이 『천년 왕국사』를 싫어하기도 합니다. 이 왕국에 대한 비판을 서슴지 않고 하니까요.”
“하지만 저는 그런 부분이 오히려 좋았어요. 조금 더 객관적으로 보이기도 하고요.”
제르딘이 문득 멈춰 서서 발레린을 쳐다봤다. 그의 눈동자는 꽤 짙은 하늘빛이었다. 발레린은 자신이 실수라도 했나 싶어서 서둘러 말했다.
“혹시 제가 말을 함부로 한 건가요?”
그 말에 제르딘이 대번에 고개를 돌리곤 말했다.
“아닙니다.”
발레린은 조금 기대하며 물었다.
“그럼 왜 그렇게 뚫어지게 보셨나요?”
“제 생각과 너무 같아서요. 여태껏 『천년 왕국사』를 그렇게 말한 사람은 없었습니다. 그런 말을 하면 제가 죽일까 봐 그랬는지 모르겠지만.”
발레린은 눈을 동그랗게 떴다. 발레린이 뭐라고 말하기도 전에 제르딘이 먼저 말했다.
“공녀를 탓하는 건 아닙니다. 그냥 너무 놀라워서 그렇게 본 겁니다.”
그러곤 제르딘은 먼저 앞서서 걸었다. 발레린은 새삼 ‘제르딘은 잔인하다’는 소문이 왜 생겼는지 이해가 되었다. 간혹 제르딘은 난폭한 말을 사용했는데 그 때문에 이상하게 소문이 난 것이 아닌가 했다.
발레린도 사실 제르딘의 말에 놀라긴 마찬가지였지만 곧 마음을 진정시켰다. 그러곤 재빠르게 제르딘의 옆을 따라갔다. 뒤로는 그를 따르는 수십 명의 하인들이 따라오고 있었다.
발레린은 그들을 힐끔 보았다. 여태껏 황금 마검에 대해서 알아본 사실을 제르딘에게 말해야 했다. 어쨌든 정보는 거의 다 알아낸 것이 분명했다.
발레린은 제르딘에게 더 가까이 다가갔다. 제르딘이 멈칫하며 발레린을 보았다. 그의 얼굴은 아까보다 더 굳었다. 발레린은 실수를 했나 싶어서 살짝 물러나며 고개를 숙였다.
“죄송해요. 제가 무례했나요?”
제르딘은 아까와 다르게 그저 발레린을 지켜보았다. 발레린은 고개를 살짝 들어 제르딘을 살폈다. 그는 조금 화가 난 듯 눈썹이 옅게 일그러졌다. 발레린은 마음속이 가라앉았다. 아까만 해도 그는 기분이 좋아 보였는데 지금은 심기가 불편해 보였다.
발레린은 머리를 대굴대굴 굴려 보았다. 하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그가 무례하다 느낄 만한 행동은 생각나지 않았다. 발레린이 그렇게 머리를 굴리는 사이 제르딘이 말했다.
“앞으론 이렇게 가까이 오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발레린은 놀라며 고개를 들었다. 제르딘은 다시 천천히 말했다.
“공녀를 기분 나쁘게 하려는 말은 아니었습니다. 단지 낯선 것뿐이니 이해해 주세요.”
발레린은 고개를 끄덕였다. 제르딘은 다시 앞으로 걸어갔다. 발레린은 마음속이 좋지는 않았지만 그래도 해야 할 말이 있었기에 그에게 말했다.
“왕자님, 혹시 바쁘시나요?”
제르딘이 쳐다보자 발레린은 서둘러 말했다.
“제가 책에서 찾아볼 것은 거의 다 찾아본 것 같아서요. 그래서…….”
발레린은 뒤를 다시 쳐다봤다. 하인들은 고개를 숙이며 있었지만 거리가 가깝긴 했다. 그때 제르딘이 뒤를 보며 말했다.
“잠시 물러나 있어라.”
하인들은 곧바로 두 발자국 물러났다. 그제야 발레린은 제르딘에게 말했다.
“황금 마검에 대한 이야기예요. 길지는 않아서 조금만 시간을 내주시면 돼요.”
“그럼 집무실에서 이야기를 나누는 게 좋겠습니다.”
발레린은 밝은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면서 한 발자국 제르딘에게서 물러났다. 그가 다가오는 것을 싫어하니 그의 심기를 거스르는 행동은 하고 싶지 않았다. 제르딘은 그 모습을 잠시 보다가 이내 고개를 돌려 앞으로 걸어갔다.
발레린은 어느새 커다란 문 앞에 도착했다. 심히 오랜만에 가는 제르딘의 집무실이었다. 발레린은 새삼 설레는 마음으로 문이 열리기를 기다렸다. 문이 완전히 열리자 제르딘이 먼저 안내했다.
발레린은 기쁜 마음으로 안으로 들어갔다. 제르딘의 집무실은 예전과 비슷하게 깔끔하고 고풍스러웠다. 그중에서 책장에 무수하게 많이 꽂힌 책이 눈에 들어왔다. 자신처럼 제르딘이 책을 좋아하는 것이 눈에 보여 발레린은 더욱 미소를 지었다.
그때 여태껏 가만히 있던 그로프가 개꿀개꿀 울었다. 발레린이 고개를 내리자 그로프가 말했다.
“주인님, 저는 주인님의 방에 가 있겠습니다.”
“방에?”
“아무래도 그때 귀족이 말한 독사를 방에 풀어놓겠다는 말이 거슬려서요.”
“아마 루네스가 방을 지키고 있을 텐데.”
“그래도 제가 가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 같습니다.”
발레린은 그로프의 의견을 존중하며 마침 열린 문 사이로 그로프를 놓아주었다.
“그로프, 조심해. 나와 같이 다녀서 널 해치지는 않겠지만 혹시 모르니까.”
“걱정 마십시오. 저도 주인님처럼 사람들이 함부로 다가오지 못할 겁니다. 어쨌든 눈에 띄기도 하니까요.”
발레린은 싱긋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로프는 개꿀개꿀 울면서 인사를 하곤 복도를 펄쩍펄쩍 뛰었다. 발레린은 그로프를 잠시 보다가 몸을 돌렸다.
제르딘은 이미 탁자 앞에 있는 의자에 앉아 있었다. 그 옆으로는 보좌관이 서 있었다. 발레린은 서둘러 제르딘의 맞은편에 앉았다.
그때 하인이 김이 모락모락 나는 차를 내왔다. 센트릴 잎이 들어간 차였다.
“센트릴 차네요.”
“여전히 기억하고 계시는군요.”
“물론이에요! 여기 처음 왔을 때 엄청 설레고 좋았거든요.”
발레린이 웃으며 말하자 제르딘은 발레린을 잠시 쳐다봤다. 꽤 노골적인 시선이었다. 그러다 그는 눈썹을 찌푸리며 찻잔을 들었다.
발레린은 제르딘의 태도가 영 이상해서 그를 잠시 살폈다. 하지만 그는 이내 다시 무심한 얼굴이었다. 늘 보여 주던 은근히 차가워 보이면서도 이성적인 얼굴이었다.
그때 제르딘이 말했다.
“할 말이 있다고 들었는데.”
“아, 황금 마검에 대해서 여러 책을 봤는데 모두 비슷한 말이 있었어요. 우선 황금 마검은 두 자루로 만들어졌는데 장인이 하나는 왕궁으로 보냈고 하나는 만일에 대비하기 위해서 동굴에 숨겼다고 했어요.”
“동굴이요?”
“네! 제 예상으로는 그 동굴은 장인이 황금 마검을 만든 곳 주위에 있을 것 같아요. 그래서 우선 황금 마검을 만든 장인이 있던 곳을 찾고 그 주변의 동굴을 조사해 보면 뭔가 나올 것 같기도 해요.”
제르딘은 고개를 끄덕였다.
“제가 조사하라고 하겠습니다.”
“아니에요. 제가 직접 가면 돼요.”
제르딘이 고개를 들었다.
“공녀, 굳이 직접 나설 필요는 없습니다.”
“하지만 제가 직접 주변을 둘러보고 싶어요. 물론 조사하시는 분을 믿지 못하는 건 아니지만 전 왕궁 밖도 궁금하긴 하거든요. 15년 동안 탑 안에 갇혀 있었던지라 이젠 왕궁 말고 다른 곳이 궁금하기도 하고요.”
“혼자는 위험합니다. 아무리 주변에 지키는 기사들이 있다고 해도…….”
“하지만 저한테 다가올 사람은 없을 텐데요.”
“…….”
“어차피 저주를 받아서 제가 입만 벌려도 쓰러지는데 오지 않을 거예요.”
그 말을 하자마자 발레린은 정원에서 있었던 일을 떠올렸다. 순간 발레린도 잊고 있었다. 발레린은 다시 말을 빠르게 정정했다.
“아까 한 말은 일부 최소예요! 이상하게 들리시겠지만 사실 이제 제게서 독기가 뿜어져 나가지 않아요!”
발레린은 잔뜩 기대하며 제르딘을 쳐다봤다. 그는 무심한 얼굴이긴 했지만 눈썹에 약간 힘이 들어가 있었다.
“사실입니까?”
“네! 제가 정원에서 시험해 보고 왔어요! 이젠 제 숨이 닿아도 풀이나 개미가 죽지 않아요!”
보좌관도 무척이나 당황한 얼굴이었다. 제르딘은 발레린을 잠시 보다가 말했다.
“그럼 방독면을 벗고 다녀도 됩니다.”
그때 보좌관이 급히 말했다.
“하지만 왕자님, 원로원 귀족은 물론 배도스 공작 쪽 귀족들에게 먹이만 주는 꼴이 될 겁니다. 만약 독으로 안 좋은 사건이라도 일어난다면 그 화살은 모두 왕자비님께…….”
“그건 아직 일어나지 않은 일이니 심하게 걱정할 것 없어. 그리고 발레린은 여태껏 방독면으로 답답하게 지냈으니 이제라도 벗을 기회를 줘야지.”
보좌관은 난처한 얼굴로 제르딘에게 고개를 숙여 속삭였다.
“하지만 사람에겐 여전히 그 독기가 통할지도 모르잖습니까?”
그 말을 하자마자 보좌관이 발레린에게 고개를 숙였다.
“왕자비님, 죄송합니다.”
발레린은 고개를 내저었다.
“아니에요! 저에게 사람을 기절시킬 만한 독기가 뿜어져 나왔으니 그렇게 걱정을 하는 건 당연하잖아요.”
발레린은 이런 일은 흔했기에 기분은 나쁘지 않았다. 제르딘은 보좌관에게 말했다.
“독을 측정하는 사람을 불러. 곧바로 측정하고 공식적으로 발레린이 방독면을 벗고 다니도록 공표할 테니까.”
보좌관은 고개를 끄덕이곤 물러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