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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록빛 저주의 공녀님-52화 (52/130)

52화

발레린은 솜털까지 서는 기분이었지만 가까스로 고개를 끄덕이며 제르딘을 쳐다봤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예전보다 제르딘의 얼굴이 딱딱하지 않다는 점이다. 그의 얼굴에는 묘한 미소가 피어올라 있었다. 달라진 그의 얼굴에 발레린은 내심 기대하는 마음으로 멍하니 그를 바라봤다.

그때 익숙한 목소리가 들렸다.

“왕자비님까지 오셨으니 저희가 여쭙고 싶은 것이 있습니다.”

발레린은 고개를 돌려 익숙한 목소리가 들린 곳을 바라봤다. 정원에서 몰래 보았던 루티스 백작이었다. 발레린은 놀랍지도 않았다. 어차피 그들은 배도스 공작과 함께 이런 회의에 참석하던 사람들이었다.

루티스 백작은 헛기침을 몇 번 하고는 천천히 입을 열었다.

“물론 이전에 왕비님이 몇 번 왕정 회의에 참석하신 선례가 있지만, 국정에의 지나친 간섭을 우려해서 줄곧 왕께서 결정을 내리시던 일이었습니다. 하지만 요즘 들어 왕자님께서 몸이 자주 편찮으시고…….”

그 말에 발레린은 황급히 제르딘을 돌아봤다. 제르딘은 그 말에도 그다지 감흥 없는 얼굴이었다. 발레린은 그에게 다가가 작게 속삭였다.

“왕자님, 정말 몸이 자주 아프시나요?”

그 말을 하면서 발레린은 저도 모르게 제르딘의 팔에 손을 대었다. 제르딘이 움찔거리며 발레린을 쳐다봤다. 그는 눈에 띄게 놀란 얼굴이었다. 발레린은 그 얼굴이 괜히 걱정되어 그를 자세히 살폈다.

제르딘은 시선을 피하며 눈썹을 찌푸렸다. 그는 앞을 보며 말했다.

“아픈 건 아니었습니다. 요즘 배도스 공작이 숨긴 황금 마검을 추적한다고 왕정 회의에 몇 번 빠진 적은 있습니다.”

그때 루티스 백작이 티 나게 기침을 해 댔다. 발레린은 할 수 없이 다시 고개를 돌려 루티스 백작을 쳐다봤다. 백작은 고개를 숙인 뒤 다시 말을 이었다.

“어쨌든 왕자님께서 몸이 편찮으시고 미령하시니 혹시나 모를 만일의 일에 대비하기 위해…….”

발레린은 속에서 뭔가 올라왔지만 가만히 숨을 내쉬었다. 어쨌든 루티스 백작이 어떤 말을 이을지 궁금하긴 했다.

루티스 백작은 잠시 뜸을 들였다가 말했다.

“……왕자비님을 이곳에 모신 겁니다. 어쨌든 왕자비님께서도 국정에 대해서 기본적으로 아시는 게 있어야 하니까요.”

“그래서 저를 가르쳐 주려고 이곳에 오라고 했나요?”

발레린은 그저 순수한 호기심으로 물었다. 하지만 그 말이 나가자마자 주변에 있던 귀족들이 헛기침을 하며 발레린의 눈을 피했다. 그때 배도스 공작이 날카로운 목소리로 말했다.

“가르치다니, 저희가 굳이 왕자비님을 왜 가르치겠습니까?”

“그럼 굳이 저를 왜 부르신 걸까요?”

발레린은 배도스 공작의 말을 기대하며 눈을 빛냈다. 지나치게 기대하는 발레린의 눈빛에 배도스 공작이 얼굴을 찌푸리며 시선을 내렸다.

그때 루티스 백작이 빠르게 끼어들었다.

“아까 말씀드렸다시피 왕자비님께서도 국정에 대한 일을 맡으실 수 있으니 의견을 구하려고 한 것뿐입니다. 저희가 너무 고여 있어도 안 되니까요.”

발레린은 기쁘게 고개를 끄덕였다. 발레린이 여전히 밝은 표정을 짓고 있자 주변 귀족들은 더욱 당황한 듯 서로 눈치를 보았다. 제르딘은 그 모습을 흥미롭게 지켜봤다. 그들의 얼굴을 보면 이번에도 쉽사리 그들이 원하는 대로 진행되지는 않는 게 분명했다.

그때 배도스 공작이 큼큼 기침을 하며 발레린에게 물었다.

“왕자비님도 아시다시피 이번에 서부 지역에서 석탄 광맥이 많이 발견되었습니다. 그래서 사람을 보내서 정확한 수치를 알아볼 예정인데, 여태껏 역대 왕께서 보내신 수를 파악해 볼 때 몇 명을 보내야 효율적이겠습니까? 참고로 동부 지역에서도 광맥이 발견되었습니다.”

발레린은 그 말을 듣고서 의아했다. 그저 필요한 사람이 있으면 보내면 되는 것이고 알맞게 보내면 된다고 생각했다.

너무나 단순한 문제에 발레린은 의문이 들어 물었다.

“그런데 이 문제를 여기에서 의논하고 계셨나요?”

루티스 백작이 고개를 빳빳이 든 채 말했다.

“일주일 전부터 이 문제에 대해서 치열하게 의논했는데 결론이 나오지 않았습니다.”

발레린은 도저히 이해가 가지 않아 제르딘을 쳐다봤다. 제르딘은 그저 무감한 얼굴이었다. 발레린은 그에게 살짝 물어보았다.

“정말 이 문제로 일주일 동안 치열하게 다투었다고요?”

제르딘은 이런 일에 이골이 나 있는지 이제는 무심하게 대답했다.

“원로원 귀족에서부터 배도스 공작을 지지하는 귀족까지 치열했습니다.”

“하지만 쓸데없는 논쟁 아닌가요? 그냥 사람 수를 맞춰서 보내면 되잖아요.”

“사람 수에 따라서 서부 귀족과 동부 귀족 중 어느 쪽에 더 신경을 쓰는지가 나타날 수 있어서 쓸데없이 치열했던 겁니다. 거기다 광맥을 조사하는 사람 수는 한정되어 있으니 동일하게 갈 수는 없습니다.”

“하지만 날짜를 나누어서 가면 되잖아요.”

제르딘이 피식 웃었다.

“저들끼리 말이라도 맞췄는지 같은 날짜에 광맥에 대해 조사해 달라고 신청했습니다.”

발레린은 쓸데없는 기 싸움을 하는 것 같아 더더욱 납득이 되지 않았다. 거기다 왕정 회의에서 이런 사소한 것을 의논하고 있으니 절로 『천년 왕국사』가 생각났다.

사실 이런 일은 책에서도 흔히 보던 것이었다. 그 책을 쓴 사람도 왕국에서 너무나 사소한 일에 온 힘을 쏟는다고 비판했었다. 그래서 정작 큰일이 벌어졌을 땐 이미 그 일에 손쓸 여력이 없었다고.

발레린이 그 말에 백번 동의하며 입을 열려고 할 때였다. 난데없이 배도스 공작이 말했다.

“왕자비님, 왕자님과 충분히 상의해도 되지만 대답은 혼자 하셔야 합니다.”

“…….”

“대답은 정해져 있겠지만 말입니다.”

배도스 공작은 발레린이 대답하지 않았는데도 이미 대답을 들은 것처럼 입꼬리를 올렸다. 발레린은 그 모습이 마음에 들지 않아 차분히 입을 열었다.

“역대 왕이 했던 것을 생각해 보면 이런 일이 있을 땐 대개 사람 수를 맞춰서 보냈어요. 그리고 사람 수가 맞지 않는다면 동부 지역의 귀족과 서부 지역의 귀족을 불러서 주사위를 굴려서 가장 높은 수가 나온 사람에게 먼저 사람을 보냈고요.”

배도스 공작의 얼굴이 굳었다. 주변에 있던 귀족들도 모두 할 말을 잃은 얼굴이었다. 발레린은 그들의 반응이 오히려 이해가 되지 않았다. 그저 자신이 모른다는 말만 내뱉을 줄 알았던 모양이었다.

심지어 발레린이 한 대답은 『천년 왕국사』에 그대로 나오는 내용이었다. 워낙 사소한 일 때문에 왕정 회의에서 높은 소리가 끊이지 않자 13대 왕은 아예 주사위로 해결을 했다.

하지만 귀족들은 반발했다. 그렇게 중대한 일을 고작 주사위 하나로 결정한다는 것은 그들을 무시하는 것이라 했다.

오히려 13대 왕은 그 말을 반박했다. 이런 일일수록 단순하게 해결해야 한다며 그들의 사소한 다툼을 비판하면서 이 상황에 대해서 아무것도 모르는 주사위가 가장 공정하다고 했다.

왕도 이익 관계를 생각해서 편을 들어 줘야 했고 다른 귀족들도 그럴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그 말에 귀족들은 말없이 주사위를 굴렸다. 그게 왕국사에서 꽤 유명한 주사위 정치였다.

‘유명한 일화인데 왜 내가 모른다고 생각했을까.’

오히려 발레린은 그것이 의문이었다.

발레린이 그들을 지켜보자 오히려 귀족들은 서로 눈을 피했다. 옆에 있던 제르딘이 웃었다. 발레린의 의아하게 보자 제르딘이 발레린의 귓가에 나직이 속삭였다.

“저도 미처 생각하지 못했던 방법인데 역시 공녀입니다.”

그러곤 제르딘은 앉아 있는 귀족을 보며 한마디 했다.

“이 상황에선 발레린이 말한 방법이 가장 공정한 것 같은데 어떤가?”

귀족들은 여전히 눈치를 봤다.

“가장 유명한 방법이 있는데 정작 그걸 잊고 일주일 동안이나 고민했다니. 역시 그대들 말처럼 너무 고여 있기만 하면 안 되겠네.”

제르딘이 미소를 지으며 말하자 배도스 공작의 얼굴이 더욱 일그러졌다. 발레린은 그 모습을 흥미롭게 지켜봤다. 확실히 오늘 배도스 공작의 생각대로 일이 진행되지는 않는 것 같았다.

제르딘은 하인에게 주사위를 들고 오라고 했다. 마침 이곳에 동부 지역의 귀족과 서부 지역의 귀족이 있으니 담판을 지으려는 모양이었다.

“나오게.”

제르딘이 한마디 하자 귀족 두 명이 쭈뼛거리며 나왔다. 제르딘은 동부 지역의 귀족에게 주사위를 보냈다.

“어쨌든 자네가 먼저 조사 날짜를 보냈으니 먼저 하게.”

동부 귀족은 고개를 숙이곤 주사위를 굴렸다. 나온 수는 2였다. 다음에는 서부 지역의 귀족 차례였다. 그 사람은 다름 아닌 사르티아 공작이었다. 그가 주사위를 굴리자 나온 수는 5였다. 동부 귀족은 큼큼거리며 내심 불만을 표했다. 제르딘은 신경 쓰지 않고 말했다.

“그럼 서부 지역에 먼저 조사관을 보내겠네. 오늘 회의는 여기서 끝내지.”

제르딘이 먼저 일어나자 주변에 있던 귀족들이 서둘러 일어났다. 발레린도 제르딘을 따라서 대회의실을 나갔다. 복도로 나서자 제르딘이 멈춰 서서 발레린에게 말했다.

“역시 그 어려운 『천년 왕국사』를 16번이나 완독한 분이십니다. 제가 생각지도 못한 부분을 오히려 알려 주다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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