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1화
발레린은 서운하긴 했지만 거기서 생각을 그쳤다. 더 생각해 봤자 우울할 뿐이었고 긍정적으로 돌아오는 것은 없었다.
현실은 사르티아 공작이 발레린의 편을 들어 줄는지도 미지수였다.
물론 사르티아 공작이 제르딘의 편을 들긴 했지만 그것은 제르딘이 명확하게 사르티아 공작이 원하는 땅을 준다고 했을 때의 이야기였다.
‘만약 왕자님이 그 말도 하지 않고 무작정 나와 결혼했다면…….’
사르티아 공작은 그렇게까지 제르딘의 편을 들지 않았을 것이다. 어차피 발레린은 언젠가 결혼을 해야 했다. 거기다 초록빛 저주 때문에 아무도 결혼하지 않으려 할 때 왕자가 나서 줬으니 사르티아 공작의 입장에선 발레린이 왕자와 결혼한 것은 손해 볼 것 없는 장사였다.
발레린은 이런저런 생각을 하다가 문득 결론을 내렸다.
‘아버지까지 자기편으로 끌어들인 걸 보면 확실히 왕자님은 천재야.’
결국 제르딘은 대단했다. 발레린은 그렇게 생각하며 미소를 지었다. 그때 루네스가 발레린을 걱정스레 살폈다.
“왕자비님?”
갑자기 울린 목소리에 발레린이 놀라며 고개를 들었다. 루네스는 발레린을 염려스럽게 쳐다보며 말했다.
“제가 어떻게 하면 될까요?”
“가장 중요한 건 나와 제르딘 외에 이곳에 아무도 들어오지 않는 거야. 그리고 의심스러운 사람이 있다면 곧바로 내게 말해 줘.”
루네스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자 발레린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루네스는 놀라며 발레린에게 말했다.
“어디 가세요?”
“어제 황금 마검에 대해서 못 본 책이 있어서.”
루네스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다녀오세요. 여긴 제가 지키고 있을게요.”
발레린은 밝게 웃으며 루네스에게 인사를 하곤 방을 나왔다. 복도는 꽤 조용했다. 마치 폭풍이 오기 전처럼 긴장감이 돌기도 했다.
그때 문득 그로프가 물었다.
“그런데 주인님, 루네스는 정말 믿을 만할까요?”
“만약 믿을 만하지 않으면 이전에 어떻게든 일을 냈을 거야.”
“그렇긴 합니다. 어쨌든 루네스는 주인님 곁에 가장 오래 있었던 사람이니까요.”
“그런데 지금까지 나를 잘 도와주고 있는 걸 보면 믿을 만하지 않아?”
“그렇지만 전 왠지 아직도 루네스가 신경 쓰입니다.”
“왜?”
그때 멀리서 누군가 다가왔다. 발레린은 방독면을 확인했다. 비틀어진 부분도 없었고 멀쩡히 잘 있었다. 하지만 그 사람은 발레린을 보자마자 고개를 숙이며 은근히 거리를 띄우고 빠르게 사라졌다.
어깨 위에 있던 그로프가 개꿀개꿀 울면서 말했다.
“이제 저런 사람들도 주인님의 숨결에 독기가 없다고 한다면 없어질 겁니다.”
발레린은 고개를 끄덕였다. 여태껏 이곳에 있으면서 방독면이 가장 답답했었다. 발음 연습은 탑 안에 있을 때부터 해서 말은 정확하게 나갔지만 그래도 방독면에 가려져 있으니 벗고 있을 때보다 답답했다.
거기다 오히려 방독면 때문에 더 눈에 띄니 하인들은 발레린이 알아차릴 정도로 눈치를 보며 지나쳤다.
발레린은 이제 그런 사람들이 사라질 것을 생각하며 기분 좋게 발걸음을 옮겼다. 이제는 황금 마검만 어디에 있는지 찾으면 되는 것이다.
문득 발레린은 그로프가 한 말을 떠올렸다. 황금 마검을 찾는다면 제르딘과 영원히 헤어질 수도 있다는 말이었다. 그 사실은 조금 슬펐지만 이렇게 귀족들에게까지 무시를 받는 제르딘의 상황에 가만히 있을 수는 없었다.
‘어떻게든 왕자님을 지켜 줘야지.’
자신을 탑 밖으로 꺼내 준 왕자님이었다. 거기다 15년간 그렇게 바라고 바랐던 해인저 모녀를 완전히 보내 준 것도 제르딘이었다. 발레린은 제대로 은혜를 갚고 싶었다. 그전에 제르딘이 자신의 마음을 알아준다면 그것만으로도 발레린은 마음이 벅차오를 터였다.
그렇게 발레린이 한껏 행복한 상상을 하는 사이 어느덧 왕실 도서관에 도착했다. 발레린은 가벼운 발걸음으로 도서관 안으로 들어갔다. 안에는 아무도 드나들지 않아서 어제 발레린이 두고 간 그대로 있었다.
발레린은 다시 깃털 펜을 들고서 황금 마검에 대한 내용을 찾았다. 여태껏 황금 마검에 대해서 찾은 내용은 모두 비슷했다.
황금 마검은 가장 훌륭한 마검 장인이 만든 것으로, 한 자루가 아니라 두 자루로 만들어졌다는 내용이었다.
거기다 다른 황금 마검은 어디로 갔는지 나오지도 않았다. 그나마 주목할 만한 내용은 황금 마검 중 하나가 왕궁으로 갔고 다른 하나는 장인이 만일의 일에 대비하기 위해서 아무도 찾지 않는 장소에 숨겼다는 것이다.
발레린은 깃털 펜을 멈추고 여태껏 기록한 내용을 다시 훑었다. 어쨌든 장인이 어디서 황금 마검을 만들었는지가 중점이었다. 그곳을 찾는다면 황금 마검이 숨겨진 장소도 수소문하여 찾을 수 있을지도 몰랐다.
그때 그로프가 말했다.
“주인님, 아무래도 황금 마검은 두 자루로 만들어진 것 같습니다. 다들 이렇게 비슷한 내용이니 황금 마검을 만들었던 장소로 찾아가서 확인해 봐도 될 것 같고요.”
“나도 같은 생각이야. 어쨌든 황금 마검은 장인이 만들었고 그 마검을 만일의 일에 대비하기 위해 숨겼다고 했으니까.”
“그럼 숨긴 장소는 동굴 아닙니까?”
“동굴이라고?”
“네, 여기 적힌 내용을 보면 동굴일 가능성도 있을 것 같습니다.”
발레린은 그로프가 가리킨 책을 보았다.
“하긴, 마검은 동굴같이 습한 곳에 오래 놓아두면 마력이 더 강력해진다는 말을 본 적 있긴 해.”
발레린은 곰곰이 생각하다가 그로프에게 말했다.
“만약 황금 마검이 두 자루가 있다는 게 사실이라면, 황금 마검을 만든 곳 주변의 동굴을 수색해 보면 뭔가 나올 것 같아.”
그 말에 그로프가 눈을 번쩍 뜨며 개꿀개꿀 울었다.
“역시 주인님은 천재이십니다!”
발레린은 빙긋 웃었다. 그나마 어제보다는 희망이 더 보이는 것 같았다. 발레린은 아직 다 적지 못한 내용을 마저 적었다. 그리고 종이를 정리할 때쯤이었다.
“왕자비님!”
조급한 목소리에 발레린이 고개를 들자 루네스가 숨을 들이마시며 발레린을 보았다.
“무슨 일 있어?”
발레린이 걱정스레 묻자 루네스가 황급히 말했다.
“왕자님께서 왕자비님을 모시고 오라고 하셨어요.”
제르딘은 왕정 회의에 참석 중이었고 헬릭스가 한 말도 있기에 발레린은 놀라지 않고 차분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혹시 방에 들어오려던 사람은 없었지?”
“네, 제가 여태껏 지키고 있다가 문지기에게 겨우 부탁하고 왔어요. 어쨌든 문지기도 왕자님의 측근이니 다른 사람을 함부로 들어가게 하지는 않을 거예요.”
“고마워, 루네스.”
“아니에요. 제가 당연히 해야 하는 일인걸요. 저는 일단 왕자비님의 방으로 갈게요. 혹시나 다른 일이 있을까 해서요.”
발레린은 고개를 끄덕이며 미소를 지었다. 루네스가 이렇게 열심히 하는 것을 보면 확실히 배도스 공작 사람 같지는 않았다.
물론 『천년 왕국사』에 의하면 지나치게 열심히 도와주는 사람을 경계하라 했지만, 우선 발레린은 루네스를 믿고 싶었다.
이런 곳에서 사람을 믿지 못하면 결국 혼자만 남을 것이다. 남을 지나치게 경계하는 것도 지금으로선 조심해야 했다.
그렇게 발레린은 루네스의 안내에 따라 왕정 회의가 열리는 대회의실로 갔다.
마침 커다란 문 앞에 도착하자 발레린은 문득 심장이 쿵쿵 뛰었다. 긴장보다는 제르딘을 만날 생각에 설렐 뿐이었다.
발레린이 잔뜩 기대하며 문지기를 쳐다보자 문지기는 곧바로 인사를 하고는 문을 열어 주었다.
문은 무거워서 그런지 천천히 열렸다. 안에서는 요란하게 떠드는 소리가 들렸다.
문이 완전히 열리자 발레린은 망설이지 않고 대회의실 안으로 들어갔다.
상석에는 제르딘이 앉아 있었다. 그의 표정에는 거의 변화가 없었다. 발레린과 시선이 마주치자 그의 표정이 조금은 부드러워졌다. 발레린은 그의 묘한 표정 변화에 넋을 놓고 바라보았다.
‘분명 전에는 저렇게까지 표정이 변하지 않았는데.’
발레린이 멍하니 미소를 짓는 사이 제르딘의 보좌관이 잽싸게 발레린을 안내했다.
“왕자비님, 어서 오십시오. 제가 모시러 가야 했는데 이곳에 급한 일이 있어서 가지 못했습니다.”
“아니에요.”
그사이 보좌관이 의자 근처로 안내했다.
“전 여기 앉으면 되나요?”
보좌관은 잽싸게 고개를 끄덕이며 뒤로 물러났다. 앉을 자리를 미리 준비해 놓은 모양이었다. 그것도 제르딘의 옆자리였다.
발레린은 미소를 지으며 대회의실에 앉은 귀족을 두리번거렸다. 그때 뚱한 표정의 배도스 공작이 보였다. 발레린은 그에게 미소를 지으며 의자에 앉았다.
어쨌든 배도스 공작 덕분에 제르딘과 가까이 있는 시간이 늘어났다. 발레린은 그것 하나는 마음에 들어 내내 미소를 지었다.
그때 배도스 공작이 발레린을 보았다. 그는 입꼬리를 올리고는 천천히 입을 열었다.
“왕자비님, 오랜만입니다.”
“저도 오랜만이에요. 배도스 공작.”
배도스 공작의 눈썹이 살짝 일그러졌다. 주변에 있던 귀족이 수군대며 발레린을 쳐다봤다. 옆에서 상황을 지켜보던 제르딘이 피식 웃었다.
발레린이 놀라며 보자 제르딘이 고개를 숙여 발레린의 귓가에 속삭였다.
“원래 공작이라고 말하는 게 맞습니다. 이제 당신은 왕자비니까요.”
낮게 떨어지는 목소리가 귓가를 유난히 간질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