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0화
책에서 본 왕실 역사 못지않게 지금 왕실 상황도 흥미로웠다.
그때 감탄하듯 말이 들려왔다.
“역시 루티스 백작님은 정보력이 남다르시긴 합니다. 어떻게 이렇게 다 알고 계십니까?”
“내가 여기를 한두 번 다녀 보는가? 어쨌든 배도스 공작님 옆에 있으면서 배운 게 많기는 하지.”
“그럼 이 사실을 이용해서 왕자를 완전히 쳐 내는 게 맞지 않겠습니까? 어차피 피 검사도 거부하는 마당에 이걸 이용하면 깔끔하게 왕자가 내려갈 것 같은데요.”
“아니, 그건 안 돼. 배도스 공작님도 굳이 가만히 있는 걸 보면 그렇게 하면 우리도 위험해진다는 사실을 아는 거네.”
“하지만 백작님이 말한 사실로 보아 제르딘이 늑대 수인과 반쯤 섞인 사람이라는 게 명확하지 않습니까?”
“물론 내 말은 명확하지만 그걸 입증할 만한 자료가 없네. 이전 왕이 모두 다 처리해 놓아서 쉽지 않아.”
“하지만 보름달이 뜨는 날이 있지 않습니까?”
“보름달?”
“네, 늑대 수인의 피가 반쯤 섞인 사람은 그 부작용으로 보름달이 뜨는 날에 무척이나 성질이 난폭해진다고 합니다.”
“그렇긴 하지만 제르딘이 무척이나 철저하게 관리하고 있어서 쉽지 않네. 우리가 나서려고 하면 왕족의 일이므로 상관 말라고 하니.”
그들은 서로 마주 보며 잠시 말이 없었다. 그러다 루티스 백작이 말했다.
“그나저나 자네, 독사를 준비하게.”
“독사요?”
“배도스 공작님이 발레린 공녀를 몰아내기 위해 단단히 준비하고 있네.”
“그런데 독사는 왜…….”
“제르딘의 방에 독사를 푼 뒤에 발레린이 독사를 사서 사특한 일을 꾸미고 있었다고 작당할 참인가 봐.”
발레린은 눈을 동그랗게 떴다. 배도스 공작이 그렇게까지 질 나쁘게 굴 줄은 몰랐다.
‘날 모략하려고 하다니.’
발레린이 굳은 얼굴로 있는 사이 그들은 몇 마디 더 나누다가 이내 다른 곳으로 갔다. 발레린은 그들이 완전히 사라지자 방독면을 벗었다. 어깨 위에 있던 그로프가 울었다.
“개꿀개꿀.”
발레린은 그 자리에 철퍼덕 앉았다.
“그로프, 아무리 생각해도 저들은 막나가는 것 같지 않아?”
“그래도 저희가 다 듣지 않았습니까?”
“그렇긴 해. 오히려 그들이 뭘 하려고 하는지 알았으니 잘 대비하면 되겠지.”
“맞습니다. 저런 질 낮은 사람들에게 끌려다닐 필요 없죠.”
발레린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데 생각보다 배도스 공작이 너무한 것 같아.”
“이 궁에 들어올 때부터 제르딘이 한 말이 있지 않습니까?”
“무슨 말?”
“주인님과 계약 결혼을 하는 것도 배도스 공작을 몰락시키기 위해서라고 했고, 공작을 조심하라고도 했으니까요.”
“그렇긴 하지만 사람이 이렇게까지 굴 줄 몰랐어. 그냥 사람을 아주 내보내려고 마음먹은 것 같아.”
“자기 권력을 위해서 뭔들 못 하겠습니까? 지금 제르딘에게 하는 것만 봐도 그냥 아예 없애기 위해 작정한 것 같긴 합니다.”
발레린은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다 문득 잡풀이 발레린 앞에서 흔들렸다. 발레린은 잡풀을 보며 중얼거렸다.
“그로프, 너도 방금 봤지?”
“뭘요?”
“내가 한숨 쉬니까 잡풀이 흔들리기만 할 뿐 시들지 않은 거.”
그로프는 발레린의 바로 앞에 있는 잡풀을 쳐다봤다. 잡풀은 시들지도 않고 싱싱하고 푸르렀다.
“확실히 주인님의 한숨에도 생물이 멀쩡한 것 같습니다.”
발레린은 급한 마음에 주변에 있던 풀에 숨을 불어넣었다. 하지만 풀은 약하게 흔들리기만 할 뿐 시들지 않았다. 발레린은 놀란 얼굴로 그로프를 쳐다봤다.
“내 한숨에도 식물이 시들지 않아!”
“식물만 통하는 걸까요?”
“그건 모르겠어.”
그 말을 하면서 발레린은 주변을 둘러봤다. 그러다 지나가던 개미가 보였다. 발레린은 고민하는 눈빛으로 그로프를 쳐다봤다.
“한숨 쉬어도 될까?”
“식물에 한숨을 쉬어도 시들지 않았으니 개미라면 더더욱 죽지 않을 겁니다.”
“괜찮겠지?”
아무래도 발레린은 불안했다. 늘 괜찮을 거라고 생각한 일에 뜻하지 않은 일이 종종 일어났던 것이다. 하지만 그로프는 발레린에게 고개를 끄덕이며 개꿀개꿀 울었다.
“주인님, 저를 믿으십시오. 아까 백합도 시들지 않았고 이 잡풀도 시들지 않았으니 주인님이 한숨을 쉬어도 개미는 멀쩡할 겁니다.”
발레린은 그로프의 말을 들으며 마음을 다잡았다. 그리고 개미에게 천천히 숨을 불어넣었다. 개미는 작게 밀려나기만 할 뿐 제 갈 길을 갔다. 발레린은 바쁘게 움직이는 개미를 멍하니 바라봤다. 개미는 여전히 힘 있게 걸어가고 있었다. 비틀거리지도 않았고 검은 선 같은 발은 빠르기만 했다.
발레린은 개미를 보며 멍하니 말했다.
“그로프, 정말 내 숨에 섞인 독기가 완전히 사라졌나 봐.”
“역시 주인님이십니다.”
그로프도 기쁜 듯 개꿀개꿀 울었다. 발레린은 환하게 웃으며 여기저기 풀은 물론 주변에 있는 정원수에도 숨을 불어넣었다. 하지만 모두 시들지 않고 멀쩡했다. 발레린은 만세를 하면서 환하게 웃었다. 그러다가 발레린은 급하게 그로프에게 말했다.
“이게 어떻게 된 거지? 원래는 안 이랬잖아!”
“그러게 말입니다. 무슨 일이 있었던 것도 아니었는데…….”
그로프가 고민하는 사이 발레린이 빠르게 말했다.
“혹시 왕자님과 입을 맞춰서 그런 것 아닐까?”
그로프가 고개를 갸웃거리자 발레린은 환한 얼굴로 설명했다.
“예전에 책에서 봤는데 늑대 수인은 다른 인간과 달라서 인간의 저주를 중화해 주는 역할도 한다고 했거든.”
그로프는 주변을 두리번거린 뒤 작게 속삭였다.
“하지만 제르딘은 반쯤 섞인 피 아닙니까?”
“그렇긴 하지만 그래도 늑대 수인의 피가 섞인 거잖아.”
그로프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때 부스럭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발레린이 재빠르게 쳐다보자 새 한 마리가 나와서 후다닥 날아갔다. 발레린은 주변을 둘러보다가 그로프에게 손을 내밀었다.
“그로프, 이제 가자. 알아볼 건 다 알아봤으니까.”
그로프는 천천히 발레린의 손에 올라왔다. 발레린은 그로프를 어깨에 놓고는 우선 방독면을 썼다.
“주인님, 이제 주인님의 숨결로 생물이 죽지 않는 것을 알았으니 안 써도 되지 않을까요?”
“그래도 나를 처음 보는 사람들은 이 사실을 모르니까 당분간 쓰고 다니는 게 맞을 것 같아. 아무래도 그 사람들에겐 내가 많이 위험하긴 하니까.”
헬릭스가 뒤로 넘어간 이후로 주변의 하인들은 더욱 눈치를 봤었다. 발레린도 그들의 상황을 이해하지 못하는 것은 아니었다. 그들에겐 목숨이 걸린 일이긴 했으니까.
“그럼 왕자에게 이 사실을 알려야 하지 않을까요? 왕자가 나서서 주인님의 숨결로 생물이 죽지 않는다고 한다면 그나마 주변 사람들이 잘 알 것 같습니다.”
“나도 그럴 생각이야. 내가 나서면 아무래도 잘 믿어 주진 않으니까.”
해인저 모녀가 벌을 받고 난 뒤 발레린은 주변 하인들의 시선이 나아지는가 기대를 했었다. 하지만 그다지 나아지지는 않았다. 어쨌든 방독면을 계속 쓰고 다녔고, 발레린이 초록빛 저주에 걸렸다는 것은 지우지 못하는 사실이었다.
그럼에도 발레린은 활짝 웃으며 그로프에게 속삭였다.
“그래도 내 숨결에 독기가 나오지 않는 게 얼마나 다행인지 몰라.”
“맞습니다. 주인님이 계속 이곳에서 방독면을 쓰고 다니는 것이 마음에 걸렸는데 이제라도 방독면을 쓰지 않아서 저야말로 기분이 좋습니다.”
발레린은 그로프를 보고 활짝 웃으며 힘차게 걸어 왕궁으로 돌아갔다. 발레린의 마음은 아까보다 더 가벼웠다.
09. 책 속의 진실
발레린은 곧바로 제르딘의 집무실로 갔다. 하지만 집무실은 닫혀 있었다.
“왕자님께서는 왕정 회의에 참석하셨습니다.”
문지기의 말에 발레린은 방으로 돌아와야 했다. 발레린은 방에 들어오자마자 루네스에게 말했다.
“루네스, 여기에 나와 왕자님 외에는 절대 들어오지 못하게 해.”
“중간에 청소하는 하인도요?”
“응, 당분간만 그렇게 해 줘.”
“그럼 많이 불편하실 텐데. 저라도 방을 돌볼까요?”
“힘들지 않겠어? 꽤 넓어서 관리하기 힘들 텐데.”
“어차피 제가 걸어 다닐 수 있을 때부터 하던 일인걸요. 그런데 무슨 일이 있나요?”
발레린은 그로프를 쳐다봤다. 그로프는 그저 개꿀개꿀 울었다. 발레린은 미소를 짓고는 천천히 입을 열었다.
“내가 정원에 갔을 때 귀족들이 하는 말을 들었거든.”
“귀족들이요?”
“한 사람은 루티스 백작이었고 한 사람은 정확히 이름을 모르겠어. 여하튼 그 사람들이 하는 말을 들었는데 이 방에 독사를 풀고서 내가 한 것처럼 꾸미겠다는 거야.”
“정말 그런 말을 했다고요?”
발레린은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왕자비님께서는 그런 일을 할 분이 아니시잖아요.”
“그렇긴 하지만 이 왕궁에선 내 편이 많지 않잖아. 거기다 배도스 공작까지 나서면 나를 위해 증언해 줄 사람이 몇이나 되겠어?”
사실상 발레린은 이 왕궁에서 자신의 편은 그로프와 루네스, 그리고 제르딘밖에 없다고 생각했다. 아버지인 사르티아 공작은 여태껏 개인적으로 한 번도 얼굴을 본 적이 없을 정도였다. 그러니 사이가 좋다고 할 수는 없었다.
발레린이 어렸을 때부터 초록빛 저주를 받았다고 불길하게 생각한 사람도 아버지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