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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록빛 저주의 공녀님-49화 (49/130)

49화

발레린은 마음이 안 좋았지만 해명했다.

“웃긴 했지만 제 습관이었고 헬릭스 님도 습관인 것 같았어요. 늘 저를 보고 웃었거든요.”

제르딘이 한숨을 내쉬었다. 발레린은 예상치 못한 제르딘의 반응에 의아할 뿐이었다.

“혹시 제가 헬릭스 님을 만나지 않아야 했나요?”

발레린이 걱정스레 묻자 제르딘이 발레린을 물끄러미 바라봤다. 그의 시선은 집요하면서도 은근히 짙은 구석이 있었다. 발레린은 괜히 얼굴이 화끈거리면서 심장이 두근두근 뛰었다.

‘내가 실수를 한 건가.’

그 생각이 드는 동시에 제르딘이 말했다.

“헬릭스는 옷을 바꿔 입듯 여자를 가볍게 만나는 사람입니다. 그리고 여자를 만나려고 할 때 늘 등신처럼 웃고 다니고요.”

등신이라는 말에 발레린이 놀라자 제르딘이 눈썹을 살짝 찌푸렸다. 단정한 얼굴에 은근히 화가 밴 모습을 보니 발레린은 난데없이 심장이 난폭하게 뛰는 것을 느꼈다.

“앞으로 헬릭스는 멀리하는 게 좋을 겁니다.”

“네, 명심할게요.”

제르딘은 고개를 숙이곤 물러났다. 발레린은 괜히 아쉬워서 그에게 말했다.

“그나저나 왕정 회의에서 저를 불러들인다는 게 사실인가요?”

“그게 무슨 말입니까?”

“헬릭스 님이 말해 줬어요. 배도스 공작이 저를 완전히 내쫓기 위해 그런 회의에 불러들인다고요.”

“그렇게 두지는 않을 겁니다.”

“하지만 제가 참가해도 괜찮을 것 같기도 해요.”

제르딘이 눈썹을 찌푸린 채 발레린을 응시했다. 발레린은 차분히 말했다.

“그곳에 부르려는 목적도 저를 망신 주려는 것이니 제가 그런 사람이 아니란 걸 보이고 싶기도 하고요.”

발레린은 제르딘을 보며 미소를 지었다. 그가 가만히 보고 있자 활발하게 입을 열었다.

“그래서 왕자님께 도움이 될 만한 사람이라고 귀족들에게 각인시키고 싶어요.”

“하지만 귀족들은 그렇게 만만한 상대가 아닙니다.”

“그렇긴 하지만 배도스 공작이 그렇게까지 작정한다면 차라리 왕정 회의에서 제가 어떤 사람인지 드러내는 게 좋을 것 같아요. 그럼 다음에도 저를 그렇게 써먹지 않을 것 같고요.”

발레린은 확신에 차서 말했지만 제르딘은 여전히 굳은 얼굴로 발레린을 볼 뿐이었다. 발레린이 조심스레 쳐다보자 제르딘이 말했다.

“정말 괜찮겠습니까?”

“네! 어차피 전 『천년 왕국사』를 16번이나 완독한 사람이잖아요!”

그 말에 제르딘이 잠시 내려다보다 별안간 웃었다. 그 미소가 너무나 눈부셔 발레린은 저도 모르게 멍하게 쳐다봤다. 발레린이 눈을 반짝이며 보자 제르딘의 표정이 천천히 굳었다. 그는 발레린에게서 한 발짝 물러나며 말했다.

“그럼 저는 이만 가 보겠습니다.”

발레린은 서둘러 입을 열었다.

“혹시 저를 걱정해서 여기까지 오신 건가요?”

“걱정이요?”

“네, 방금 저에게 헬릭스 님은 위험하다고 말씀하셔서요.”

“그게 걱정이라면 걱정이긴 합니다. 헬릭스는 배도스 공작의 아들이고 좋은 사람은 아니니까요.”

“좋은 사람은 아니긴 하지만 오늘은 배도스 공작에 대해서 말해 줬어요. 이상한 의도가 있긴 했지만.”

“이상한 의도요?”

제르딘의 눈빛이 짙어졌다. 발레린은 괜히 제르딘에게 걱정을 끼쳐 주긴 싫어서 서둘러 말했다.

“딱히 염려하실 필요 없어요. 헬릭스 님이 원래 그런 분이라고 했으니까요.”

제르딘은 쉽사리 대답하지 않고 발레린을 쳐다봤다. 발레린은 그 시선이 왠지 모르게 부끄러워 눈을 살짝 내렸다.

“어쨌든 헬릭스는 가까이하지 마세요. 가까이해서 좋을 게 없으니.”

“네, 명심할게요!”

발레린이 눈을 빛내며 말하자 제르딘은 인사를 하곤 물러났다. 발레린은 멍하니 제르딘의 뒷모습을 보았다. 이럴 때 그는 한없이 단호하고 냉정해 보였다. 그럼에도 발레린은 희망을 가지며 그로프에게 속삭였다.

“그나저나 왕자님이 정말 날 걱정해서 온 건 맞나 봐.”

“그렇긴 한 것 같습니다. 아까 왕자의 표정도 전에 보던 얼굴과 달랐으니까요.”

“정말 달랐어?”

“네, 아까는 웃지도 않았습니까?”

발레린은 활짝 웃으며 다시 제르딘의 뒤를 쫓았다. 하지만 제르딘은 이제 보이지 않았다. 발레리은 작게 실망하며 문을 닫았다. 하지만 실망도 잠시였다. 아까 확인한 바로는 백합에 한숨을 쉬어도 백합이 시들지 않았다.

“그로프, 내 한숨에는 이제 독기가 흐르지 않는 걸까?”

“아까 시들지 않은 백합을 보면 그런 것 같습니다.”

발레린은 뛰는 심장을 그대로 간직한 채 빠르게 걸었다. 계단을 빠르게 내려가고 어느덧 왕궁 밖이었다. 발레린은 서둘러 정원을 걸으면서 주변을 둘러봤다. 노란 장미가 가득한 정원을 지나치니 왕궁 뒤쪽의 후미진 곳이 나왔다.

“이런 곳도 있었나?”

왕궁 앞의 정원과 다르게 이 주변은 어두운 분위기였다. 햇빛이 왕궁 때문에 가려져 잘 들어오지 않아서 더 어두웠다. 그러다 발레린은 정원수가 모인 곳에 잡풀이 요란하게 난 자리를 찾았다. 그나마 관리가 잘 되고 있긴 하지만 아직 풀을 제거하지 않은 구석진 곳이 보이기도 했다.

발레린은 곧바로 풀이 많은 구석진 곳으로 걸어갔다. 막 잡풀을 잡으려던 참이었다.

“그러니까 왕정 회의에 발레린 공녀를 불러서 망신을 주라는 말입니까?”

“그러네. 원로원 귀족들은 아무리 왕자비라도 정무 상식이 없는 사람을 싫어하니, 그에 관한 것만 계속 물어보면 원로원 귀족들도 이제 발레린 공녀에 대해 안 좋게 생각하겠지.”

“그런데 그분들은 왜 갑자기 발레린 공녀를 좋게 봐준 겁니까?”

“세드릭스 부인이 발레린 공녀에게 많은 감명을 받은 것 같더군. 탑 안에 15년간 있었던 멍청하고 저주받은 공녀를 왜 좋게 봐준 건지.”

“그래 봤자 저주에 걸려서 이제 내쫓길 공녀 아닙니까?”

“그렇지. 아무리 주변 사람들에게 좋은 평가를 받아도 배도스 공작님이 있으니 조만간 내쫓기겠지.”

“그러고 보면 왕자도 갈 때까지 간 건가 봅니다.”

발레린은 그 소리를 듣고 고개를 살짝 들어 정원수 너머를 바라봤다. 옷을 멀끔하게 입은 귀족 두 명이 서로 얼굴을 마주 보며 소곤거리고 있었다. 발레린은 언뜻 그들을 본 것도 같았다. 예전에 복도에서 마주쳤을 때 배도스 공작 옆에 있던 사람들이었다. 발레린은 그들의 얼굴을 잊지 않으려고 뚫어지게 쳐다봤다.

그때 그 사람들이 낄낄거리며 말했다.

“그러니까 피 검사를 받고 왕이 되면 될 텐데. 저렇게 고집을 부리고 있으니까 아직도 왕이 되지 못하는 거지.”

“그러게 말입니다. 배도스 공작에게 고개를 조아리고 공작님이 시키는 대로 하면 그나마 배도스 공작님이 넓은 아량으로 왕자에게 권력을 나눠 줄 텐데 말입니다.”

“그렇지. 괜한 고집으로 저렇게 있는 걸 보면 정말로 자기가 왕이 될 거라고 생각하는 건지.”

“그런 생각이 아니라면 지금까지 꽁꽁 숨겨 둔 황금 마검을 찾는다는 소리를 하지 못할 겁니다.”

“그나저나 황금 마검이 두 자루라는 건 정말 소문뿐인가?”

“저도 그건 잘 모르겠습니다. 왕실 서고도 이젠 저희가 함부로 들어가지 못하니.”

“그런데 딱 봐도 헛된 소문 아니겠는가? 황금 마검이 두 자루라니! 왕자같이 덜떨어진 고집쟁이들이 헛된 희망을 품고 퍼뜨린 거겠지.”

그 말에 옆에 있던 귀족이 낄낄 웃었다.

“맞습니다. 왕세자 수여식도 치르지 못한 왕자인 주제에 뭘 제대로 할 수는 있겠습니까?”

“그러니 말일세. 그나마 왕자도 왕의 보위를 이을 수 있다는 법만 아니었다면 제르딘은 이미 나락으로 갔을 걸세.”

발레린은 들을수록 속에서 화가 솟구치는 듯했다. 제르딘을 무시하는 것도 모자라 왕족을 무시하고 있었다. 하지만 지금 나서 봤자 좋을 게 없었다. 어쨌든 적의 내부 상황을 들어야 어떻게 해야 할지 판단이 서니 어쩔 수 없었다.

발레린은 가까스로 참으며 귀를 쫑긋 세웠다.

“내 말이 그거네. 아무리 적장자라도 피 검사도 제대로 못 하는 마당에 왕이 되려고 하니 웃기지 않을 수가 없지.”

“그런데 정말 제르딘이 늑대 수인의 피가 섞인 건 맞는 겁니까? 저는 제르딘이 지금까지 배도스 공작님과 같은 귀족파를 누르기 위해서 일부러 피 검사를 거부한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런 것도 있겠지만 아무래도 그 소문은 무시 못 하네.”

그때 그 말을 하던 귀족이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발레린은 급하게 몸을 숙였다. 다행히 그는 못 봤는지 말을 이었다.

“이전 왕이 만나던 남자가 늑대 수인이라는 말도 있었지. 늑대 수인이니 아무래도 이곳 생활에 적응할 수 없어서 도망쳤다는 말도 있어.”

“하지만 이전에 정식으로 결혼한 남자와 아이가 있지 않았습니까?”

“그건 헛소문이야. 처음부터 왕은 정식 결혼한 남자와 사이가 안 좋아서 아이도 없었어.”

“그럼 그 소문은 뭡니까?”

“그 남자가 왕을 배신하고 다른 여자를 통해서 낳은 아이지.”

발레린은 순간 입을 막았다. 역사책에서도 보지 못한 내용이었다. 거기다 사람의 말로 들으니 더 생생하게 느껴져 귀를 뗄 수 없었다.

옆에 있던 귀족도 놀랐는지 말이 빨랐다.

“그럼 그 아이는 왕이 죽인 겁니까?”

“그래, 왕이 그 남자와 함께 아이도 죽였지.”

잠시 주변에는 말이 없었다. 발레린도 머릿속이 멍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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