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초록빛 저주의 공녀님-48화 (48/130)

48화

의외의 사실에 발레린은 쉽사리 말이 나가지 않았다.

“그리고 공녀님, 제르딘은 생각보다 사람을 잘 이용합니다. 무서운 사람이니 가까이하지 마세요.”

“무서운 사람이요?”

“제르딘에게 반기를 든 사람들은 하나같이 모두 죽거나 멀리 떠나야 했습니다.”

발레린은 문득 제르딘이 한 말이 생각났다. 그의 주변에 있던 사람은 모두 배도스 공작이 독살로 죽여서 남아 있는 사람이 몇 없다는 말이었다. 그래서 발레린이 이곳에 온 것이었다.

발레린은 그 사실을 생각하며 입을 열었다.

“하지만 제가 알기론 왕자님 옆에 있던 사람들이 모두 독살로 죽었다고 하던데요?”

“그렇긴 하지만 그 사람들은 왕자에게 반기를 들었던 이들입니다.”

발레린은 그 말을 쉽사리 믿을 수 없었다. 헬릭스는 결국 배도스 공작의 아들이었다. 발레린은 고개를 돌려서 옆에 있는 노란 장미를 보았다. 헬릭스는 발레린 곁에 서서 얌전히 말했다.

“노란 장미는 노란 물을 주어서 노랗게 물들이는 거 아십니까?”

“노란 물을 줘서 노란 장미가 된다고요?”

“네, 그러니 이런 이상한 장미가 탄생했겠죠.”

“원래 이런 품종 아닌가요?”

발레린은 여태껏 그런 말을 들은 적 없기에 당황스럽기까지 했다. 그때 헬릭스가 발레린에게 물었다.

“빨간 장미도 빨간 물을 줘서 빨간 장미가 되는 것 아닙니까?”

“아니요. 그런 말은 처음 들어요. 제가 알기론 원래 이런 품종일 거예요.”

헬릭스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전 여태껏 노란 물을 줘서 노란 장미가 되는 줄 알았는데.”

헬릭스는 그저 웃었다. 발레린은 생각보다 헬릭스의 머리가 순수하다고 깨달았다. 지금까지 사람을 많이 만나 보지는 않았지만 그래도 이렇게 기본적인 상식을 벗어나는 사람은 처음이었다.

발레린이 신기한 듯 쳐다보자 헬릭스가 웃으며 말했다.

“공녀님은 탑 안에 15년 동안 갇혀 있었다고 들었는데 어떻게 이렇게 잘 아는 겁니까?”

“여러 책을 읽어서요.”

“역시 책을 읽어야 하는군요.”

헬릭스는 한숨을 내쉬었다. 발레린이 물끄러미 보자 그는 노란 장미를 멍하니 보며 말했다.

“전 어렸을 때부터 책 읽는 건 물론 앉아서 공부하는 걸 좋아하지 않았습니다. 재미없기도 하고 제 취향도 아니었고요.”

그러면서 헬릭스는 발레린을 돌아보며 입꼬리를 올렸다.

“세상에는 공부보다 더 재미있는 게 많더군요.”

“그렇긴 해요. 생각보다 세상은 넓으니까요. 물론 저는 책 읽는 게 가장 재미있긴 하지만요.”

헬릭스는 그저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발레린은 문득 헬릭스가 여기까지 온 이유를 생각해 보다가 말했다.

“그나저나 할 말이라는 게 왕자님에 대한 말이었나요?”

“아, 그렇기도 했지만, 이번에 제 아버지가 공녀님에게 왕정 회의에 참석하라고 요청할 겁니다.”

“왕정 회의요?”

“네, 원래는 작위 계승권이 있는 사람만 참석하는 자리지만 이번에는 아버지가 공녀님을 참석하게 만들 겁니다.”

뜻밖의 사실에 발레린은 눈썹을 찌푸렸다.

“배도스 공작님이 저를 왕정 회의에 왜 참석시키려는 건가요?”

헬릭스는 생각하지도 않고 곧바로 말했다.

“결국에는 공녀님을 내쫓으려는 겁니다.”

“저를 왜요?”

“어쨌든 제르딘 옆에 있으니 영 거슬리는 모양입니다. 그러니 무슨 일이 있어도 왕정 회의에는 나가지 마세요. 아버지가 단단히 벼르고 있으니까요.”

발레린은 깊은 한숨을 뱉으려다가 겨우 참았다. 배도스 공작이 이렇게까지 할 줄은 몰랐던 것이다. 그저 제르딘과 연관된 사람이라면 아예 궁에 발길도 하지 못하도록 하는 것 같았다. 그 사실에 발레린은 화가 났지만 가까스로 참으며 헬릭스에게 물었다.

“그런데 이런 사실을 제게 다 알려 줘도 괜찮은가요?”

“어차피 저는 아버지가 그다지 기대하는 사람도 아니고, 오히려 공녀님을 보호하고 싶습니다.”

“왜요?”

헬릭스는 발레린을 보며 빙긋 웃었다.

“공녀님을 보고 한눈에 반했으니까요.”

발레린은 놀란 얼굴로 헬릭스를 쳐다봤다.

“진심이세요?”

“진심이 아니면 왜 이렇게까지 공녀님에게 말을 하겠습니까?”

“하지만 전 결혼했는데요.”

“다들 그렇게 알지만 저는 다르게 알고 있습니다.”

“뭐를요?”

“어차피 공녀님과 제르딘은 서로 사랑해서 결혼한 건 아니지 않습니까?”

발레린은 그저 숨만 내쉬었다. 남들이 그런 사실을 알고 있다고 생각하자 마음속이 새까맣게 타들어 가는 기분이었다.

“그나마 요즘 제르딘이 공녀님과 한방을 쓴다고 해서 그 소문은 약간 사라졌지만 그래도 여전히 왕궁에선 제르딘이 공녀님을 진지하게 생각한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발레린은 차마 말을 하지 못하고 멍하니 앞만 바라봤다. 헬릭스가 천천히 말을 이었다.

“예전부터 제르딘은 그런 사람이었으니까요.”

제르딘은 사랑을 기대하지 말라고 했지만 다른 사람에게 그런 말을 들으니 발레린은 기분이 그다지 좋지 않았다. 마치 쓰던 일기장을 남에게 보인 것 같은 기분이었다.

발레린은 울컥했으나 가까스로 물었다.

“어떤 사람이요?”

“아까도 말했다시피…….”

“하지만 왕자님은 제게 유일하게 관심을 쏟으신 분이었어요. 여태껏 왕자님처럼 절 신경 쓴 사람도 없었고…….”

발레린은 서둘러 몸을 돌렸다. 어느새 눈에는 눈물이 새어 나오고 있었다. 발레린은 헬릭스에게 간단히 말했다.

“몸이 안 좋아서 이만 가 볼게요.”

그러곤 빠르게 걸었다. 뒤에서 헬릭스가 이름을 부르며 쫓아왔지만 그는 차마 따라잡지 못했다. 발레린의 걸음이 더 빨랐던 것이다.

그렇게 발레린은 방에 들어오자마자 방독면을 벗고 주머니에 있는 손수건으로 눈물을 닦았다. 그로프가 옆에서 개꿀개꿀 울었다.

“주인님, 괘념치 마세요. 어차피 헬릭스는 배도스 공작의 아들 아닙니까?”

“그렇긴 하지만 자꾸 왕자님을 그렇게 말하니까 너무 슬퍼. 왕자님은 그런 분이 아니신데.”

심지어 자꾸 제르딘을 나쁜 사람으로 몰면서 말하니까 발레린은 마음속이 너무나 울렁거렸다. 그리고 발레린이 내심 떠올리고 싶지 않은 제르딘의 마음까지 말하니 발레린은 가슴속이 후벼 파지는 심정이었다.

발레린은 훌쩍거리며 손수건에 코를 풀었다.

“헬릭스 님이야말로 왕자님을 제대로 모르는 사람이야. 어떻게 그런 말을 할 수 있어?”

“그러게 말입니다.”

“왕자님이 어머니의 장례식 때 울지 않았더라도 나름대로 이유가 있었겠지. 나조차도 막상 어머니 장례식 때 눈물이 그렇게까지 많이 나오지 않았는걸. 물론 그 호수에서 울긴 했지만.”

발레린은 옛 생각을 떠올리며 손수건으로 눈물을 닦았다.

“어차피 헬릭스는 멍청한 인간입니다. 노란 장미가 노란 물로 만들어진다고 말하는 걸 보면 무식하기 짝이 없는 인간인 건 분명합니다.”

발레린은 눈물을 닦으며 한숨을 내쉬었다. 그러면서 앞에 있는 백합을 멍하니 바라봤다. 노란 튤립과 함께 있는 백합은 싱싱했다. 얼마 전에 꽃을 딴 것 같았다.

그렇게 발레린이 멍하니 꽃을 보고 있던 때였다. 순간 발레린은 눈썹을 찌푸렸다.

“그로프, 아까 내가 한숨 쉬지 않았어?”

“네, 한숨을 쉬긴 했습니다.”

“그런데 왜 백합이 멀쩡하지?”

어차피 노란 튤립은 발레린이 어렸을 때부터 입김을 불어도 멀쩡했다. 하지만 백합이 시들지 않은 것은 처음 있는 일이었다.

발레린은 다시 백합에 입김을 불어넣었다. 하지만 백합은 여전히 시들지 않고 이전과 똑같이 싱싱했다. 발레린은 눈을 동그랗게 떴다.

“그로프, 내가 꿈꾸는 거 아니지?”

“저도 분명 봤습니다.”

그로프도 약간 흥분을 했는지 말소리가 급했다. 발레린은 다시 백합에 숨을 불어넣었다. 하지만 백합은 약간만 흔들릴 뿐 그대로였다.

발레린은 빠르게 그로프에게 고개를 돌렸다.

“설마…….”

“저주가 풀린 것 아닙니까?”

발레린은 서둘러 거울 앞으로 달려갔다. 하지만 입술색은 여전히 초록빛이었다. 발레린은 굳은 얼굴로 그로프를 돌아봤다.

“만약 저주가 풀리면 입술부터 제대로 색이 돌아야 하지 않겠어?”

“그렇긴 하지만 분명 주인님께서 숨을 불어넣어도 백합이 시들지는 않았잖습니까?”

“여기에 보호 마법이라도 건 것 아닐까?”

“며칠 뒤면 시들 꽃에 굳이 왜 보호 마법을 걸겠습니까?”

“그렇긴 한데 아무래도 이상해.”

발레린은 그로프에게 오며 방독면을 썼다.

“그로프, 우리 정원에 다시 나가 보자.”

그로프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발레린은 활기차게 그로프에게 설명했다.

“정원에 있는 잡풀로 시험해 보는 거야. 정말로 내 입김에 생물이 죽지 않는지 말이야.”

이곳에는 실험할 만한 생물이 없었다. 이미 백합은 멀쩡했고 노란 튤립은 원래부터 발레린의 입김에 시들지 않는 꽃이었다.

그로프는 대번에 고개를 끄덕이며 발레린의 손에 올라탔다. 발레린은 자신의 어깨에 그로프를 내려 주고는 문 쪽으로 달려갔다.

막 발레린이 문을 열려고 할 때였다. 문이 벌컥 열리더니 뜻밖의 사람과 눈이 마주쳤다. 연한 하늘빛 눈동자가 번뜩였다.

“왕자님?”

“아까 헬릭스와 같이 있는 걸 봤습니다.”

그 말에 발레린은 대수롭지 않게 설명했다.

“헬릭스 님이 할 말이 있다고 해서 그냥 들어 준 것뿐이에요. 그리고 배도스 공작이…….”

“두 사람이 서로 웃으면서 마주 봤던 것 같은데 제가 잘못 본 겁니까?”

제르딘의 목소리는 여느 때보다 차가웠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