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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록빛 저주의 공녀님-47화 (47/130)

47화

그 말을 하자마자 옆에 있던 다른 친척들이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맞아요. 잘 버텨 주시니 제가 다 고맙기도 하고요.”

발레린은 그저 고개를 끄덕였다. 역시 웃음을 잃지 않으니 그들은 더욱 발레린을 대단하게 보았다.

발레린은 새삼 어머니가 자신에게 남겨 준 말이 고마웠다. 울어 봤자 제 편은 없는 게 맞았다. 그땐 아무도 발레린에게 신경 쓰지 않고 내버려 뒀으니까 말이다.

친척들은 그렇게 발레린의 눈치를 보며 연신 미안하다고 말하면서 차를 호로록 마셨다. 이내 차가 다 비워지자 발레린은 천천히 일어났다.

“그럼 저는 이만 가 볼게요. 혹시 더 할 말 있으신가요?”

소비드 백작은 어색하게 웃으며 고개를 내저었다. 옆에 있던 친척도 그저 미소를 지었지만 입꼬리가 무척이나 떨렸다. 발레린은 예법에 맞게 인사를 하곤 응접실을 나갔다.

루네스가 뒤늦게 발레린의 뒤를 따랐다.

“왕자비님, 제가 아까 왕자비님이 가시고 난 뒤에 그 사람들이 하는 말을 들었는데요.”

“무슨 말?”

발레린이 가볍게 묻자 루네스가 빠르게 대답했다.

“왕자비님께 뭔가 함부로 대할 수 없는 기운이 있다고 했어요. 거기다 웃고 계셔서 쉽사리 말도 못 하겠다고 하더라고요.”

이곳에서까지 그런 말을 하는 것을 보니 친척들이 제대로 작정을 하고 온 것 같았다. 하지만 그들은 그다지 깊은 말을 꺼내지 않았다.

발레린은 그나마 더 생각할 거리가 없어서 다행이었다. 만약 그들이 무언가 부탁을 해도 발레린은 빠르게 거절할 테지만. 발레린은 활짝 웃는 얼굴로 왕실 도서관으로 향했다.

도서관에 거의 도착할 때쯤이었다. 누군가 문 앞에 기대서 있었다. 그는 고개를 내린 채 있었는데 어딘가 익숙했다.

발레린이 천천히 다가갈 때쯤 옆에서 그로프가 울었다.

“개꿀개꿀.”

그 사람은 깜짝 놀라 고개를 들었다.

“헬릭스 님?”

헬릭스의 입꼬리가 올라갔다.

“여기서 만나네요.”

“그러게요. 그나저나 여긴 웬일이세요?”

“길 가다가 힘들어서 잠시 쉬고 있었습니다.”

발레린은 쉽사리 헬릭스의 말을 이해하기 어려웠다. 발레린이 눈썹을 살짝 찌푸리자 헬릭스가 푸하하 웃더니 밝은 얼굴로 말했다.

“사실 할 이야기가 있어서 왔습니다.”

“이야기요?”

헬릭스가 고개를 끄덕였다.

“잠깐 저와 산책 좀 하시겠습니까?”

헬릭스가 복도를 가리켰다. 발레린은 잠시 고민하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헬릭스가 무슨 말을 할지 궁금하기도 했다. 그는 배도스 공작의 아들이었으니까.

발레린이 궁금해하며 쳐다보자 헬릭스는 마냥 웃으며 발레린과 눈을 맞췄다. 헬릭스가 제르딘과 친척이라고 해도 확실히 성격은 다른 듯했다.

‘왕자님도 이렇게 웃어 주신다면 좋을 텐데.’

발레린은 작게 희망하며 헬릭스를 쳐다봤다. 헬릭스는 잠시 뜸을 들였다가 말했다.

“왕궁이 답답하지 않습니까?”

“전혀요. 늘 새로운 일이 일어나고 사람들도 만나고 지루할 틈이 없어요.”

거기다 요즘에는 황금 마검을 찾기 위해 책을 뒤적거리고 있으니 답답하다고 생각할 겨를은 없었다.

헬릭스는 의외인 듯 놀란 얼굴이었다. 그는 이내 고개를 주억거리다가 문득 발레린을 보며 물었다.

“제르딘의 성격을 버티기 힘들 텐데 괜찮습니까?”

“왕자님의 성격이요?”

의외의 말에 발레린이 놀라며 묻자 헬릭스는 대수롭지 않은 목소리로 말했다.

“제르딘은 옛날부터 유명했습니다. 사실 제르딘을 뼛속까지 자세히 알고 있는 사람은 거의 없을 겁니다. 제르딘은 감정을 티 내지 않는, 그저 돌 같은 사람이니까요.”

“돌이요?”

헬릭스가 고개를 끄덕이며 발레린을 유심히 쳐다봤다. 아까부터 꽤 노골적인 시선에 발레린은 방독면을 만지작거렸다.

“왜요? 혹시 제 방독면에 뭐가 묻었나요?”

헬릭스가 피식 웃었다.

“아니요.”

헬릭스는 고개를 돌렸으나 발레린은 제르딘에 관한 게 궁금해서 더 물었다.

“그런데 왕자님에 대해 주변 사람들도 잘 모른다는 말은 왕자님이 그만큼 남들에게 티를 내지 않았다는 말이죠?”

“그러기도 했고, 제르딘은 겉으로는 차분한 사람처럼 보이지만 실제론 잔인한 사람입니다.”

뜻밖의 사실에 발레린의 목소리는 절로 커졌다.

“잔인하다고요?”

“몰랐습니까? 전 공녀가 그 사실을 아는 줄 알았는데.”

“무슨 사실이요?”

헬릭스가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군데군데 지키는 기사만 있을 뿐 하인들은 돌아다니지 않았다. 마침 왕궁을 나가는 문 앞이었다. 문은 활짝 열려 있었고 기사들이 그 옆으로 서 있었다.

헬릭스는 발레린에게 바짝 다가와 고개를 숙였다.

“보름달이 뜨는 밤마다 사람들이 없어지는 거요.”

발레린의 눈은 절로 커졌다. 헬릭스는 살짝 물러나며 나직이 말했다.

“그것도 제르딘의 방으로 들어가던 하인들이 그렇다고 하더군요.”

“…….”

발레린이 대답도 하지 않고 멍하게 있자 헬릭스가 눈썹을 찌푸렸다.

“정말 모르셨나 보네.”

그제야 발레린은 헬릭스에게 고개를 돌렸다.

“하지만 확실한 건가요? 처음 왔을 때부터 느꼈지만 가끔 확실치 않은 소문이 돌고 있기도 해서요.”

“확실합니다. 저를 보필하던 하인이 직접 보고 들었거든요.”

“뭘요?”

“보름달이 뜰 때마다 가끔 궁에서 이상한 소리가 들리고 제르딘의 방에는 피 냄새가 가득하다고 하더군요.”

발레린은 쉽사리 대답할 수 없었다. 그로프도 발레린의 어깨에서 가만히 헬릭스를 지켜보기만 했다. 완전한 늑대 수인이 되지 못한 사람의 부작용은 대개 보름달이 뜨는 날에 더 심해진다고 했다.

발레린이 굳은 얼굴로 있을 때 헬릭스가 저 멀리 하늘을 보며 말했다.

“그러고 보니 보름달이 뜨는 날이 다가오는군요.”

그 말에 발레린은 괜히 걱정되었다. 물론 자신에 대한 걱정은 아니었고 제르딘이 괜찮을지 신경이 쓰였다. 같은 방을 쓰고 있어서 제르딘은 무척이나 거슬릴 것 같기도 했다. 더구나 발레린의 평판을 위해서 제르딘이 그렇게까지 배려해 주니 발레린은 속이 찝찝했다.

발레린이 고개를 숙이며 걷자 헬릭스가 대뜸 말했다.

“원래 제르딘이 그렇습니다. 어렸을 때부터 똑똑해서 잘난 체를 많이 하기도 했고, 절대 가까운 사람에게도 속을 보여 주지 않는 사람이니 실망할 만합니다.”

“…….”

“그리고 공녀는 저주까지 받았으니 제르딘이 자기 안위만 생각하고 결혼하자고 했겠죠.”

그 말에 발레린은 고개를 들었다.

“하지만 왕자님은 저를 많이 생각해 주시는걸요.”

헬릭스는 고개를 내저었다.

“겉으로 보기엔 그렇지만 제르딘은 아주 잔인하고 냉철한 사람입니다. 그리고 생각보다 제르딘은…….”

헬릭스는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마침 주변을 지키는 기사들은 없었다. 있는 것이라곤 노랗게 핀 장미뿐이었다. 발레린은 노란 장미를 멍하니 바라봤다. 옆에서 헬릭스가 속삭이듯 말을 이었다.

“그렇게 꼬장꼬장한 원로원 귀족들과 저희 아버지 같은 날카로운 귀족들의 등쌀에도 지금까지 살아남은 제르딘입니다.”

발레린은 그 말을 들으면서도 제르딘이 대단하다는 생각밖에 들지 않았다. 발레린이 눈만 깜빡이며 듣고 있자 헬릭스가 말했다.

“그러니 제르딘을 너무 믿지 말라는 겁니다. 제 친척이고 가까이 있긴 했지만 제르딘은 속을 알 수 없으면서도 잔인한 사람이니까요.”

“하지만 왕자님은 사람을 죽이지 않았잖아요.”

헬릭스가 고개를 내저었다.

“제르딘이 어렸을 땐 주위에 있던 하인들이 하루가 다르게 없어졌습니다. 그리고 여태껏 심신이 미약하다는 소문이 사라지지 않은 걸 보면 모르겠습니까?”

여태껏 발레린은 제르딘 옆에 있으면서 그가 약하다는 것은 느끼지 못했다. 오히려 그는 단단한 사람이었다.

“왕자님의 심신이 미약하다는 건 터무니없는 소문 아닌가요?”

헬릭스가 웃었다.

“제르딘이 어렸을 때부터 있었던 소문입니다. 아버지가 일찍 죽고 어머니가 이상한 남자랑 있다가 병에 들고 그러면서 제르딘의 성격도 이상해졌습니다. 그전에는 그렇게까지 사람이 무심하지 않았거든요.”

“그럼 어머니가 병들고 나서부터 왕자님이 그렇게 무심해졌다고요?”

“네, 저도 어릴 때 아버지 따라서 왕궁에 자주 왔는데 선대왕께서 멀쩡하실 땐 제르딘이 그렇게까지 돌 같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장난이 심해서 여러 귀족들에게 한 소리를 많이 들었죠.”

의외의 사실에 발레린은 그저 신기했다.

‘왕자님이 장난이 심했다니.’

어떤 모습일지 상상도 되지 않았다. 지금의 제르딘과 너무나 동떨어진 것 같아서 더 그랬다. 발레린이 멍하게 있는 사이 헬릭스가 말을 이었다.

“그러던 제르딘이 열다섯 살 이후로 조금 많이 바뀌었습니다. 그때 자주 아팠던 것 같기도 하고요.”

“그럼 그때가 선대왕께서 안 좋아지셨던 때인가요?”

“네, 그때 이후로 왕궁에 제르딘에 대한 괴상한 소문도 돌기 시작했고 선대왕께서도 몸이 많이 안 좋아지셨죠.”

그렇다면 제르딘은 열다섯 살 이후로 늑대 수인의 부작용이 본격적으로 발현되었는지 모른다. 그러고 보면 그런 부작용은 곧바로 나타나지 않고 일정한 나이가 지나면 나타난다고 했다.

‘생각보다 왕자님은 정말 고생을 많이 했구나.’

발레린이 제르딘에게 마음을 더 쓰는 와중에 헬릭스가 힘을 주어 말했다.

“심지어 어머니가 돌아가셨을 때도 제르딘은 울지 않았습니다. 다른 귀족들은 모두 쓰러질 것처럼 울었는데도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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