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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록빛 저주의 공녀님-46화 (46/130)

46화

그로프가 옆에서 개꿀개꿀 울었다.

“그로프, 혹시 일찍 깼었어?”

“네.”

“그럼 날 깨워 주지. 왕자님은 일찍 가셨지?”

“네.”

발레린의 어깨는 저절로 처졌다.

“그로프, 그럼 왕자님이 깨는 것도 봤겠네.”

그로프가 고개를 끄덕였다. 발레린은 시무룩한 얼굴로 중얼거렸다.

“어쩐지 자면서 편하긴 했어. 감사 인사라도 해야 하는데.”

“그런데 제르딘은 주인님을 깨우지 말라고 했습니다.”

“왜?”

“주인님께서 밤새 책을 본다고 고생하셨다고 하면서요.”

발레린은 마음이 뭉클해졌다. 여태껏 자신에게 그렇게까지 관심을 기울이고 신경 쓴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그나마 루네스와 옆에 있는 독 개구리 그로프만이 발레린을 위했을 뿐이었다. 발레린은 순간 눈물이 나오려던 것을 꾹 참고 중얼거렸다.

“왕자님도 나 못지않게 많이 바빴을 텐데.”

그때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울렸다. 발레린은 깜짝 놀라며 협탁에 있는 방독면을 썼다. 그때 문이 열리더니 루네스가 들어섰다.

“왕자비님, 잘 주무셨어요?”

발레린은 고개를 끄덕이며 침대에 힘없이 앉았다. 루네스는 주변에 있는 커튼을 모두 젖히면서 발레린에게 말했다.

“왕자비님, 예전에 말한 친척분들이 오늘 방문하신대요.”

“오늘?”

“네, 아침 식사를 하시고 곧바로 응접실로 가시면 될 거예요.”

“그런데 오늘 아침도 왕자님은 식사 안 하셔?”

루네스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요즘에는 왕자님께서 많이 바쁘신 것 같더라고요. 식사도 안 챙기시고 그저 물만 드신대요.”

“그러면 안 되는데…….”

아무리 늑대 수인의 피가 섞여 있어도 물로만 배를 채우면 몸에 안 좋을 것은 분명했다.

‘그래도 따로 드시겠지?’

어쨌든 제르딘 음식의 독을 감별한 이후로 왕궁에선 독살이 거의 일어나지 않았다. 그것만으로도 다행이었지만 요즘 들어 제르딘은 발레린과 음식을 같이 먹지 않았다.

그나마 제르딘과 음식을 먹으면서 얼굴을 보는 것이 발레린의 유일한 낙이었다. 하지만 요즘은 발레린 혼자 음식을 먹는 날이 잦았다.

발레린은 시무룩한 얼굴로 앞을 멍하니 바라봤다. 그때 루네스가 다가와 발레린을 불렀다.

“왕자비님?”

발레린이 고개를 들자 루네스가 친절히 말을 이었다.

“음식은 이곳으로 가져올까요?”

발레린은 고개를 끄덕였다. 제르딘과 같이 식사하지 않는다고 해서 아예 안 먹을 수는 없었다. 루네스는 인사를 하곤 물러났다. 잠시 뒤 루네스는 꽤 푸짐한 음식을 들고 왔다. 왕궁에서 나오는 음식은 전부 맛있고 신기했다.

아침인데도 화려한 장식의 닭고기와 함께 따뜻하고 고소한 냄새가 나는 게살 수프에 토마토 샐러드, 하얀 빵과 갓 만든 것 같은 싱싱한 잼 등 유난히 정성이 깃든 음식이었다. 발레린이 음식을 멍하게 보고 있자 루네스가 차분히 말했다.

“왕자비님, 다 드시고 불러 주세요.”

발레린은 고개를 끄덕인 뒤 포크를 들었다. 마침 옆에는 그로프가 자리를 잡아 귀뚜라미를 잡을 준비를 하고 있었다. 발레린은 먼저 토마토 샐러드를 먹었다. 상큼하고 아삭한 식감이 입 안을 가득 채웠다.

발레린은 우적우적 씹으면서 말했다.

“그로프, 확실히 탑을 나오니 좋긴 좋아. 이런 음식을 언제 먹어 보겠어?”

“맞습니다. 매일 이렇게 통통한 귀뚜라미를 먹는 것도 어려운 일인데 말입니다.”

발레린은 고개를 끄덕였다. 왕궁의 삶이 이런 면을 봤을 땐 편하고 좋았다. 물론 제르딘이 있어서 더 좋긴 했지만.

새삼스럽게 든 제르딘 생각에 발레린은 미소를 지으며 행복하게 음식을 먹었다.

그렇게 아침 식사를 마치자 루네스가 방으로 들어왔다. 발레린은 간단히 운동을 한 뒤 루네스의 안내에 따라 응접실로 갔다.

“그분들께서 이미 기다리고 계세요.”

“벌써?”

“네, 아까 왕자비님이 음식을 드시고 계실 때 오셨다고 들었어요.”

발레린은 귀족들이 모두 일찍 오는 것이 유행인지 순간 궁금했다. 그래도 미리 와 있다고 하니 기다리지 않아서 좋긴 했다. 그들이 무슨 말을 할지 궁금한 가운데 발레린은 발랄한 걸음으로 응접실로 들어갔다.

왕궁의 응접실은 꽤 넓고 화려했다. 예전에 손님이 왔을 때도 온 곳이긴 하지만 그래도 올 때마다 발레린은 화려한 웅장함에 압도되곤 했다. 마침 응접실에는 발레린의 친척인 소비드 백작과 그의 아내, 그리고 장례식 때 언뜻 본 낯익은 얼굴이 그들 옆에 있었다.

발레린이 미소를 지으며 다가가자 그들은 어색하게 웃었다. 여전히 발레린이 방독면을 쓰고 있어서 그들의 얼굴에는 당황스러움이 은근히 배어 있었다.

발레린은 개의치 않고 그들 앞에 앉았다. 그리고 밝은 얼굴로 그들을 쳐다봤다. 발레린의 어깨 위에서는 늘 그렇듯 그로프가 예리한 시선으로 그들을 훑었다.

“개꿀개꿀.”

그들은 화들짝 놀라며 발레린을 쳐다봤다. 발레린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늘 제 옆에 있는 그로프예요. 만지지만 않으면 안전하니 안심하셔도 되고요.”

그 말에 한결 마음이 놓였는지 소비드 백작이 티 나게 입꼬리를 올렸다. 하지만 그들은 먼저 말을 꺼내지 않았다. 그저 어색하게 웃거나 서로 눈을 마주칠 뿐이었다. 발레린은 어제 다 보지 못한 황금 마검 책을 봐야 했기에 직설적으로 물었다.

“무슨 일로 오셨나요?”

소비드 백작이 작게 기침을 하며 찻잔을 놓았다. 그는 입가를 닦고는 차분히 말했다.

“우선 왕자님과의 결혼을 축하드립니다.”

그 말을 하자마자 옆에 있던 발레린의 친척들이 하나둘씩 말을 늘어놓았다.

“정말 축하드려요.”

“우리 가문의 영광이에요. 그렇지 않나요?”

발레린은 그들의 얼굴을 늘 기억하고 있었다. 어머니의 죽음이 자신과 연관되어 있다고 말하기도 했었고, 발레린의 말은 조금도 들어 주지 않았다. 거기다 저주에 걸렸다며 가까이 않고 피하기도 일쑤였다.

발레린은 어릴 때를 생각하며 빙긋 웃었다.

“감사해요. 저는 친척분들이 이렇게 오실 줄은 몰랐어요. 제가 어릴 때만 해도 다들 저를 보고 저주에 걸렸다고 하면서 하인보다 더 무시를 했었고, 제가 하는 말은 들어 주지 않았잖아요.”

“큼, 그건…….”

“거기다 제가 어머니의 장례식에 간 것도 안 좋게 보기도 했고요.”

소비드 백작이 어색하게 웃었다. 친척들은 모두 발레린의 눈을 묘하게 피했다. 그들도 자신의 행동을 기억하고 있는지 당당하지는 않았다.

발레린은 싱긋 웃으며 말을 이었다.

“그래도 전과 달리 이렇게 직접 제게 오셔서 반가워요!”

그 말에 소비드 백작이 당황하며 고개를 숙였다.

“제가 더 반갑습니다. 왕자비님.”

백작과 같이 온 친척들도 서둘러 고개를 숙였다. 발레린은 새삼 그들의 달라진 태도가 별스러우면서도 흥미로웠다. 그리고 그들에게도 제르딘의 업적을 이야기하기 위해 말을 이었다.

“그리고 누구보다 제가 이곳에 있을 수 있도록 가장 크게 도와준 분은 왕자님이세요. 왕자님이 저를 찾아오셔서 제가 억울하게 뒤집어쓴 죄를 다 벗겨 주기도 했고요.”

“그렇긴 합니다. 왕자님이 아니었다면 이렇게 왕자비님을 만날 수도 없었겠죠.”

발레린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그러니 모두들 왕자님께 더 고마워했으면 좋겠어요.”

“그럼요! 왕자님이야말로 매시드 왕국의 위대한 왕이 될 분 아니겠습니까?”

소비드 백작이 크게 말하자 옆에 있던 친척들도 웃으며 말했다.

“맞습니다! 왕자님이 가장 훌륭하신 분이죠!”

발레린은 만족스러운 얼굴로 미소를 지었다. 그들은 그렇게 한참 제르딘을 찬양하다가 이내 입을 닫고 서로 눈치를 보았다.

발레린은 대체 그들이 왜 찾아왔는지 궁금해 다시 물었다.

“축하 인사만 하려고 여기까지 찾아오진 않았을 것 같은데 제게 부탁할 일이라도 있는 건가요?”

소비드 백작이 지나치게 손을 내저었다.

“부탁이라니요. 그저 저희는 예전에 왕자비님께 했던 일에 용서를 구하고…….”

“그런 일이라면 제게 오지 않아도 되었어요. 지난 일은 세세하게 기억하고 있지만 이젠 그다지 마음을 쓰지 않거든요.”

“죄송합니다. 왕자비님이 어렸을 때 저희가 더 잘 돌봐 드려야 했는데.”

발레린은 그 말을 들어도 그다지 감흥이 없었다. 이제야 이렇게 말하는 의도가 뭔지 궁금할 뿐이었다. 발레린이 가만히 지켜보고 있자 소비드 백작이 발레린의 눈치를 보며 조심스레 말했다.

“어쨌든 그동안 왕자비님께 소홀히 한 것에 죄송합니다. 저희도 너무나 한 생각에 빠져서 왕자비님을 잘못 본 것 같기도 하고요.”

옆에 있던 귀족들도 고개를 끄덕였다. 발레린은 그런 말을 쉽사리 믿을 수는 없었다. 만약 지금 발레린이 잘못된다면 그들이 도와줄지 확신이 서지 않아서 더 그랬다.

‘내가 왕자님과 결혼하지 않았다면 이렇게 찾아오지도 않았겠지.’

여태껏 조용하다가 제르딘과 결혼하니 찾아온 것만 해도 그들의 의도가 좋게 보일 수는 없었다. 하지만 발레린은 그저 미소를 지었다. 굳은 얼굴로 있어 봤자 스스로의 기분만 더 망칠 뿐이었다.

소비드 백작은 내심 발레린의 눈치를 계속 봤다. 발레린이 그대로 눈을 맞춰 보자 황급히 말했다.

“그나저나 이렇게 밝은 모습을 보니 확실히 왕자비님은 그동안 잘 버텨 내신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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