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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록빛 저주의 공녀님-45화 (45/130)

45화

08. 희망의 숨결

아침부터 귀족 회의가 열리는 대회의실은 시끄럽기 그지없었다.

“이게 말이 되는 겁니까? 왕자님께서 배도스 공작님의 말을 무시하다니요!”

배도스 공작 옆에 앉아 있던 루티스 백작이 소리쳤다. 배도스 공작은 입을 다문 채 제 일 아니라는 듯 가만히 있었고 주변에 있던 원로원 귀족들이 한 마디씩 했다.

“배도스 공작이 일을 잘못 처리한 겁니다. 아무래 그래도 왕실 서고의 책을 함부로 불태운다는 게 말이 됩니까?”

루티스 백작은 아까보다 더 새된 목소리로 말했다.

“황금 마검에 대한 이상한 소문이 적혀 있는 책이었습니다. 안 그래도 배도스 공작님께서 잘못된 소문으로 고충을 겪고 계시는데…….”

“루티스 백작, 황금 마검에 대한 소문을 굳이 없애려는 이유를 모르겠습니다. 그리고 단지 배도스 공작의 안위 때문에 멀쩡한 왕실 서고의 책을 태운다는 건 도저히 납득할 수 없습니다.”

주변에 있던 원로원 귀족들도 고개를 끄덕였다. 루티스 백작은 눈을 동그랗게 뜨며 말했다.

“하지만 이전 귀족 회의에서 황금 마검에 대한 이상한 소문을 다스려야 한다고 하지 않았습니까?”

“그건 터무니없는 소문일 때입니다. 예를 들어 황금 마검은 마력이 전혀 없어서 왕족의 보위를 맡길 수 없다는 그런 소문 말입니다.”

배도스 공작이 큼큼 기침을 했다. 루티스 백작은 재빨리 말했다.

“그러면 더더욱 황금 마검에 관련된 책을 불태워 버려야 하지 않겠습니까? 왕실 서고에는 그런 소문이 적힌 책도 많습니다.”

“그렇다고 해도 왕실 서고에 함부로 손을 대는 것은 용납할 수 없습니다. 그건 곧 왕권에 대한 도전입니다.”

그 말에 주변에 있던 귀족들이 서로 눈치를 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맞습니다. 제가 어제 배도스 공작의 말에 동의를 해 준 것은 그저 황금 마검에 대한 터무니없는 소문을 잠식시키려는 의도였지 왕실 서고에 손을 대라는 말은 아니었습니다.”

그때 사르티아 공작이 끼어들었다.

“저도 같은 생각입니다. 그리고 어떻게 왕자님의 동의도 얻지 않고 일을 진행할 수 있습니까? 아무리 선대왕과 혈연관계라고 해도 말입니다.”

배도스 공작이 날카롭게 사르티아 공작을 쳐다봤다. 모두들 헛기침을 하면서도 사르티아 공작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배도스 공작의 눈동자가 살짝 흔들렸다.

그때 원로원 귀족 중 발언권이 센 세드릭스 공작이 말했다.

“배도스 공작, 이번에는 공작의 뜻에 동의할 수 없습니다. 그리고 어제 일은 저희 귀족 전체의 의견을 멋대로 조작하는 것이니 이에 대해선 책임을 지셔야 할 겁니다.”

루티스 백작과 몇몇 귀족을 제외하곤 모두 맞는 말이라고 대답했다. 배도스 공작은 여전히 대답이 없었다. 세드릭스 공작은 배도스 공작을 잠시 보다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우리 원로원 귀족들이 힘을 실어 주었던 이유는 왕자가 미령하여 그나마 저희들이 도와주기 위해서였지 이렇게 막무가내로 행하라는 말은 아니었습니다.”

배도스 공작은 말없이 책상을 바라봤다. 세드릭스 공작은 차분히 말을 이었다.

“왕궁이 어떤 곳인지 누구보다 잘 아시는 분이니 제 말을 잘 이해하고 계실 거라고 생각합니다.”

그는 고개를 숙이곤 대회의실을 나갔다. 그의 뒤를 이어서 다른 원로원 귀족들도 모두 나갔다. 사르티아 공작까지 나가자 누군가 대회의실로 들어섰다. 설렁설렁 걷는 모양새에 배도스 공작이 날카롭게 쳐다보자 헬릭스가 한숨을 내쉬며 빈자리에 앉았다.

“아버지, 오늘 제가 유난히 아팠던 건 아시잖습니까?”

“어젯밤까지만 해도 네가 술을 먹었다는 걸 알고 있다.”

“하, 술이라니. 제가 어제…….”

그때 루티스 백작이 애써 웃으며 말했다.

“헬릭스 공자님, 어제 많이 고생하셨다고 들었습니다. 일이 제대로 안 풀리니 술 생각도 나셨겠죠.”

헬릭스가 더 말을 하려 했지만 루티스 백작은 빠르게 고개를 내저었다. 헬릭스는 자신의 아버지를 쳐다봤다.

“또 뭐 때문에 그러시는 겁니까?”

배도스 공작은 헬릭스를 보며 버럭 외쳤다.

“뭐 때문이냐니. 네가 늘 귀족 회의에 늦고 제멋대로 행동하니까 이러는 것 아니냐!”

헬릭스는 눈을 찌푸리며 루티스 백작에게 눈짓했다. 루티스 백작은 배도스 공작에게 조심스레 말했다.

“공자님이 몸이 자주 안 좋아서 아예 빠지는 날도 있지 않습니까? 그래도 오늘은 늦게나마 온 것이 다행입니다. 더구나 어젠 몸도 안 좋았다고 들었는데.”

배도스 공작은 깊은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돌렸다. 주변에 앉은 귀족들도 얼굴이 안 좋기는 마찬가지였다. 그때 루티스 백작 옆에 있던 귀족이 입을 열었다.

“아무래도 다짜고짜 왕실 서고에서 책을 빼온 건 무리한 게 아닌가 싶습니다.”

배도스 공작은 책상을 손으로 내려쳤다.

“발레린 공녀만 아니었다면 완벽했을 거다. 하필이면 그때 발레린 공녀를 마주쳐서는!”

그가 손을 부들부들 떨며 주먹을 움켜쥐고 있을 때 헬릭스가 눈을 빛냈다.

“발레린이 왕실 서고에 갔었습니까?”

“그래.”

헬릭스는 활짝 웃으며 중얼거렸다.

“이럴 줄 알았으면 왕실 서고로 바로 가는 건데.”

배도스 공작이 눈썹을 찌푸리며 헬릭스를 쳐다봤다.

“무슨 말을 하는 것이냐! 네가 거길 왜 가?”

“결혼 피로연 때는 제대로 인사도 못 하고 돌아가야 했습니다. 그땐 제르딘도 이상하게 화가 나 보이기도 했고.”

그 말에 배도스 공작이 피식 웃었다.

“그나마 내 경고가 통한 모양이구나.”

배도스 공작의 얼굴이 풀어지자 루티스 백작이 급히 말했다.

“역시 배도스 공작님이십니다. 그럼 이제 왕실 서고는 못 건드린다 쳐도 피 검사 쪽으로 더 몰아붙여야 하지 않겠습니까?”

“확실히 그게 더 낫겠습니다. 그럼 원로원 귀족들도 저희 의견을 들어 주겠죠.”

“맞습니다. 안 그래도 원로원 귀족들은 강력한 왕족을 원하니 피 검사는 그렇게까지 까다롭게 굴지 않을 겁니다. 이미 저희가 피 검사를 하여 귀족임을 다시 증명한다고 했을 때 반응도 제법 괜찮았고요.”

긍정적인 말이 이어지자 루티스 백작이 고개를 끄덕이며 배도스 공작에게 말했다.

“그러니까 차라리 피 검사로 왕자를 더 몰아붙이는 게 어떻겠습니까? 어차피 공작님께서 만든 ‘늑대 수인과 섞인 잡종 피’라는 소문도 잘 퍼져 나가고 있고 피 검사에 대해선 원로원 귀족들도 긍정적이니, 이번에야말로 왕자의 진실을 철저히 밝힐 수 있는 기회라고 생각합니다.”

배도스 공작은 아까보다 나은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반면 헬릭스는 한숨을 내쉬며 볼에 한쪽 손을 받쳐서 멍하게 앞을 바라봤다. 그의 머릿속에는 발레린밖에 없었다.

그런 사람은 처음 봤으니까. 거기다 저주에 걸렸다고 하니 오히려 헬릭스는 짜릿하기까지 했다.

“헬릭스, 이제는 네가 나서야겠다.”

“…….”

“헬릭스!”

배도스 공작이 책상까지 치며 말하자 헬릭스가 돌아봤다.

“어디에 정신을 팔아먹고 있는 거냐!”

“아버지, 전 미래를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미래?”

“네.”

배도스 공작은 내키지 않는 듯했지만 입을 열었다.

“그렇게 네 미래를 생각한다면 네가 나서서 발레린 공녀의 목숨을 끊는 수밖에 없다.”

헬릭스는 대번에 몸을 바로 하며 배도스 공작을 쳐다봤다.

“목숨이라니요!”

“그럼 내가 순순히 왕자의 편이 늘어가는 걸 보고 있을 줄 알았느냐?”

“하지만 발레린 공녀를 죽이는 것은…….”

“네 손에 피를 묻히지는 않을 테니 그저 내가 시키는 대로만 하거라.”

“아버지!”

“너야말로 정신을 차려라! 평생 놀고먹으면서 아무 욕심 없이 살 테냐?”

“그래도 발레린 공녀를 죽이는 건 너무합니다.”

배도스 공작의 입꼬리가 간사하게 올라갔다.

“그럼 죽이지 말고 내쫓는 건 어떻겠느냐? 그러고 보면 그 방법이 더 확실할 것 같구나.”

“대체 무슨 말입니까?”

“발레린 공녀를 왕정 회의에 참석하게 하면 재미있을 거다. 발레린 공녀는 탑 안에만 갇혀 있었으니 사실상 국정에 대해서 아무것도 모르겠지. 주변 망신만 당할 테니 원로원 귀족들에게 안 좋은 시선을 심어 주면서 결국엔 이 왕궁에서 내쫓길 테지.”

“아버지, 그건…….”

“만약 네가 내 말을 따르지 않는다면 나도 이젠 너를 곱게 보지 않을 거다. 그동안 내 권력으로 살아왔으면 아들 노릇도 해야지.”

헬릭스는 말없이 배도스 공작을 쳐다봤다.

“네가 할 일은 간단하다. 그저 발레린 공녀에게 왕정 회의에 꼭 참석해야 한다고 바람만 넣어 주면 된다.”

배도스 공작이 잔인하게 웃었다.

발레린은 번쩍 눈을 떴다. 빠르게 시간을 확인하자 어제보단 늦은 시간이었다. 생각지도 못한 늦잠에 발레린은 서둘러 침대에서 일어났다.

몸을 일으키자마자 발레린은 머릿속이 멍했다.

“어제 분명히 도서관에서 잠들었던 것 같은데.”

옆에 있던 그로프가 말했다.

“제르딘이 와서 주인님을 이곳으로 데려왔습니다.”

발레린은 눈을 동그랗게 뜬 채 그로프를 쳐다봤다.

“왕자님이 나를 여기로 데려왔다고?”

“네.”

“어떻게?”

“주인님을 들어서요.”

“그럼 안아서?”

그로프가 고개를 끄덕였다. 순간 발레린의 얼굴이 붉게 물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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