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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록빛 저주의 공녀님-44화 (44/130)

44화

그로프가 굳은 얼굴로 보자 제르딘이 천천히 말을 이었다.

“해인저 모녀의 재판 결과가 일찍 나온 것도, 발레린이 죄가 없다는 게 밝혀진 것도 모두 내가 그만큼 신경 써 줬던 거지.”

“하지만 원래 그렇게 나와야 했던 결과였습니다.”

제르딘이 웃었다. 그는 그로프를 물끄러미 보다가 말했다.

“왕궁은 생각보다 선(善)으로 움직이지 않아. 만약 내가 신경 쓰지 않았다면 해인저 모녀는 사르티아 공작의 가족이기 때문에 귀족들이 하나같이 나서서 보호해 줬을 테지. 심지어 사르티아 공작도 내가 서쪽 지역을 주지 않는다고 한다면 발레린 옆에 서지도 않았을 거고.”

그로프는 할 말을 잃은 채 제르딘을 쳐다봤다. 제르딘은 발레린이 썼던 종이를 가져와서 이리저리 훑어보았다. 옆얼굴만 보이는데도 그의 미모는 완벽할 정도였다.

제르딘의 얼굴에 옅은 미소가 그려졌다. 그는 이내 발레린을 쳐다봤다. 발레린은 방독면을 쓴 채 고개를 숙이고 있었다. 제르딘은 천천히 발레린의 머리 뒤로 손을 가져갔다. 그로프가 눈을 동그랗게 뜨며 입을 벌리려고 하자 제르딘이 눈짓했다.

단호하고 위엄이 돋보이는 눈빛이었다. 그로프는 입을 다문 채 제르딘을 관찰했다. 그는 능숙하게 발레린의 방독면을 풀어 주었다. 그러자 방독면에 가려져 있던 구불거리는 머리카락이 한순간에 어깨 위로 늘어졌다. 하얀 얼굴이 유난히 돋보였다. 제르딘은 방독면을 책상에 두고는 발레린을 물끄러미 쳐다봤다.

“뭐 하는 겁니까?”

그로프가 급히 묻자 제르딘은 여전히 발레린을 보며 말했다.

“아무리 봐도 발레린은 특이한 것 같아서.”

“대체…….”

“이런 사람은 처음 봤거든. 저주에 걸려도 희망을 갖지를 않나, 거기다 지금도 전혀 말도 안 되는 것에 기대를 걸고 있기도 하고.”

“…….”

“왕궁에는 이런 사람이 없었어. 보지도 못했고.”

“그런데 방독면은 왜 벗긴 겁니까?”

그로프는 그게 제일 이해가 가지 않았다. 그저 잡종 피라 자신이 안전하다는 것을 다시 확인이라도 하려는 건지.

“답답해 보여서. 이렇게 조는데도 방독면을 써야 하는 것 자체가 이상하잖아.”

그로프는 아무 대답을 하지 못했다. 어떻게 보면 발레린을 생각하는 사람은 제르딘뿐인 것 같기도 했다. 그것도 독이 퍼질지도 모르는 상황에 위험을 무릅쓰고 이렇게 행동하다니.

“제정신입니까?”

그로프가 묻자 제르딘이 천천히 시선을 돌렸다. 그는 웃지 않고 그저 눈썹을 찌푸렸다. 그는 이윽고 헛웃음을 지었다.

“제정신은 아니지.”

그로프는 오히려 그런 대답이 이상해서 제르딘을 뚫어지게 쳐다봤다. 제르딘은 발레린을 잠시 보다가 주변에 있는 책을 훑었다. 제르딘이 발레린을 깨우지 않고 제 할 일만 하자 그로프는 괜히 발레린 옆에서 크게 울었다.

“개꿀개꿀.”

하지만 발레린은 그 소리에도 깨지 않았다. 결국 그로프는 발레린의 손에 올라가 아까보다 더 크게 울었다.

“개꿀개꿀!”

발레린이 화들짝 놀라며 고개를 들었다. 순간 그로프는 발레린과 눈이 마주쳤다. 발레린은 서둘러 주변을 둘러봤다.

“왕자님?”

제르딘이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그러다 발레린은 눈썹을 살짝 찌푸리며 자신의 얼굴을 더듬댔다. 맨살이 만져지자 발레린은 황급히 책상에 있는 방독면을 썼다.

“죄송해요. 왕자님, 제가 방독면을 벗고 있었네요.”

발레린은 방독면을 벗은 기억은 없었지만 잠결에 벗었나 싶었다. 제르딘은 차분하게 발레린을 보며 대답했다.

“제가 벗겼습니다. 많이 답답하신 것 같아서.”

“하지만 제 독기 때문에 위험할 수 있잖아요. 거기다 여긴 왕실 도서관인데 혹시라도 제 독기가 닿아서 종이가 녹기라도 한다면…….”

“이곳에는 보호 마법이 가동되기 때문에 단순한 공녀의 독기로 책이 녹지는 않을 겁니다.”

새롭게 안 사실에 발레린은 놀라며 고개를 끄덕였다. 여태껏 본 책에는 그런 사실이 전혀 적혀 있지 않았다.

“그런 보호 마법은 언제부터 발동되었나요?”

“제가 그렇게 하도록 시켰습니다. 책을 읽는데 자꾸 몇 쪽이 찢어지고 내용이 없어지는 걸 보니까 보호 마법이라도 발동해서 이곳에 있는 책을 지켜야겠다는 생각이 들어서요.”

발레린은 활짝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역시 왕자님은 책에 대해서도 생각이 남다르시네요!”

발레린은 제르딘의 생각에 백번 동의했다. 심지어 책을 이렇게 아껴 주니 고맙기까지 했다. 발레린이 웃으며 제르딘을 보는 사이 제르딘은 주변에 있는 책을 보며 물었다.

“여기에 있는 책을 다 볼 생각이십니까?”

“네! 안 그래도 루네스가 가끔 도와주기도 해요.”

“만약 필요하면 하인을 더 붙여 주겠습니다.”

“감사하지만 굳이 저 때문에 그렇게 하지 않으셔도 돼요. 어차피 제겐 시간이 많으니까요.”

“만약 제가 난처할까 봐 걱정이 되는 거라면 괜찮습니다. 어차피 제대로 일하지 않는 하인들이 많으니까요.”

하지만 발레린은 혼자 있는 것도 나쁘지 않았다. 예전부터 탑 안에서 혼자 오랜 시간을 보내서 그런지. 거기다 발레린은 책을 빨리 읽는 편이라 가끔 루네스가 도와주는 것만으로도 충분했다.

그리고 발레린은 한 가지가 더 걱정되기도 했다.

“이건 제가 너무나 걱정이 많아서 드리는 말씀일 수도 있는데 이렇게 황금 마검에 대해서 많이 알려지면 안 될 것 같아요. 물론 왕자님께서 부리시는 하인들은 모두 믿음직스럽지만 그래도 혹시 모르잖아요. 이렇게 저를 도와주시다가 배도스 공작의 귀에 들어가면 아무래도 난감하니까요.”

제르딘은 굳은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긴 합니다. 이미 배도스 공작이 황금 마검에 대해 적힌 책을 모두 소각하라고까지 했으니까요.”

“그래서 이 작업을 하는 사람들은 최소로 하는 게 나을 것 같아요. 시간이 조금 걸리더라도 조심하는 게 낫겠죠.”

제르딘은 고개를 끄덕였다. 이내 그는 자리에서 일어나서 발레린을 내려다봤다.

“그나저나 피곤하지 않으십니까? 책은 이쯤에서…….”

“아니요, 저는 더 보고 갈게요.”

“시간이 늦었습니다.”

“늦긴 해도 아직 볼 게 있어서요.”

그로프가 옆에서 울었다.

“개꿀개꿀.”

제르딘은 그로프를 보다가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저는 먼저 가겠습니다.”

제르딘은 고개를 숙여 인사를 하곤 도서관을 나갔다. 발레린은 바쁘게 다른 책을 앞으로 가져왔다. 그로프는 조심스레 발레린에게 말했다.

“주인님, 아무래도 제르딘은 이상한 사람 같습니다.”

“왜?”

“방금 잠깐 제르딘과 대화를 해 봤는데 어떤 생각을 가지고 있는지 쉽게 짐작이 가지 않았습니다.”

“무슨 대화를 했는데?”

발레린은 무척이나 궁금한 듯 눈을 빛냈다. 그로프는 잠시 고민하다가 말했다.

“제가 제르딘에게 주인님을 이용하는 것 같다고 말하자 오히려 주인님과 제르딘은 상호 협력 관계라고 하면서 내심 이용한다는 말을 부정했습니다.”

“어쨌든 왕자님이 나를 탑 안에서 꺼내 준 건 맞으니까.”

“그래도 왠지 이 상황은 주인님이 더 불리한 것 같습니다. 그리고 아까 제가 제르딘에게 제정신이냐고 물었는데 제르딘은 제정신이 아니라고 말하기도 했고요.”

“왕자님이 제정신이 아니라고 말했다고?”

“네.”

“정말 그런 말을 했어?”

그로프는 고개를 끄덕이며 아까보다 힘주어 말했다.

“네.”

“희한하네. 왕자님께선 그래도 그런 말은 안 하실 줄 알았는데.”

“그러고 보면 은근히 거센 말을 자주 하지 않았습니까?”

발레린은 곰곰이 생각해 보았다. 그로프의 말대로 제르딘은 좋은 말만 하지는 않았다. 배도스 공작을 욕하는 것도 처음에는 거칠었으니까.

발레린의 얼굴이 천천히 굳었다.

“왕자님이 스스로 제정신이 아니라고 했다니 아무래도 문제가 있는 것 같은데.”

“저도 그렇게 생각합니다.”

발레린은 16번이나 완독한 역사책을 떠올렸다. 그러고 보면 제르딘 같은 사람은 한둘이 아니었다.

“그런데 잘 생각해 보면 왕자님께서 그렇게 말한 게 이해가 가기도 해.”

그로프가 고개를 기울이며 발레린을 쳐다봤다. 발레린은 천천히 말을 이었다.

“처음 왕자님이 이 왕궁을 보면서 질린 듯 말하기도 했잖아. 거기다 나와 결혼하기 전에는 왕자님의 편은 하나도 없었으니, 배도스 공작을 중심으로 귀족들은 왕자님이 하는 말마다 트집을 잡았을 것 같아. 그러면 솔직히 온전하게 정신을 유지하기도 힘들 것 같고.”

그로프는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역시 주인님은 천재입니다.”

하지만 발레린의 표정은 그다지 나아지지 않았다. 여전히 발레린은 제르딘이 스스로 제정신이 아니라고 말한 게 마음에 걸렸다. 발레린이 굳은 얼굴로 있자 그로프가 말했다.

“그래도 그 말에 너무 신경 쓰지 마십시오. 이미 주인님께선 제르딘에게 힘을 실어 주었으니까요.”

그나마 발레린은 고개를 끄덕이며 그로프를 보았다. 발레린은 그로프와 눈이 마주치자 빙긋 웃었다.

“그렇긴 해.”

그러면서 발레린은 더욱 바쁘게 손을 움직였다. 그로프가 물끄러미 보자 발레린은 책을 보며 말했다.

“그래도 나는 왕자님께 더 힘을 실어 주고 싶어. 언젠가는 원로원 귀족까지 모두 왕자님 편으로 만들고 황금 마검을 찾아서 왕자님이 왕이 되는 걸 꼭 볼 거야.”

발레린의 목소리는 그 어느 때보다 확신에 차 있었다. 그로프는 그런 발레린의 곁에 영원히 있겠다는 뜻으로 개꿀개꿀 울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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