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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록빛 저주의 공녀님-43화 (43/130)

43화

옆에서 그로프가 울었다.

“개꿀개꿀.”

하인들은 말은 하지 못하고 굳은 얼굴로 물러났다. 발레린은 밝은 얼굴로 책을 펼쳤다. 안 그래도 황금 마검에 대한 책을 찾아야 했는데 이렇게 하인들이 손수 나서 주니 고맙기까지 했다.

발레린은 아예 자리를 잡아서 책을 읽기 시작했다. 하인들이 난처한 눈빛으로 쳐다봐도 신경 쓰지 않았다.

발레린이 그렇게 책을 훑고 있을 때였다. 꽤 빠른 발소리가 들렸다. 발레린이 문득 고개를 들자 제르딘이 서 있었다. 그의 얼굴은 잔뜩 굳어 있었다.

발레린은 서둘러 일어나 그를 맞이했다.

“왕자님!”

“배도스 공작이 내 허락 없이 책을 뺀다는 말을 들었는데.”

하인들 중 하나가 잽싸게 고개를 숙였다.

“저희는 배도스 공작님의 명령을 받은 것뿐입니다.”

“귀족 회의를 열더니 내게 보고도 안 하고 저들끼리 결정을 해?”

제르딘이 날카롭게 말하자 주변에 있던 하인들은 더욱 고개를 숙였다. 발레린은 그나마 제르딘에게 좋은 소식을 전해 줬다.

“그래도 하인들이 직접 황금 마검에 대한 책을 선별해 줘서 책을 찾는 시간은 절약했어요!”

제르딘은 모아 놓은 책들을 보았다. 생각이 많아 보이는 얼굴이었다. 발레린은 잽싸게 말했다.

“제가 다 알아볼 테니 왕자님은 걱정하실 필요 없어요! 어차피 제겐 시간도 많고…….”

“괜찮으시겠습니까?”

“뭐가요?”

“이렇게 찾아도 공녀가 원하는 결과는 나오지 않을지도 모릅니다.”

“그래도 아예 안 하는 것보다는 낫잖아요. 전 왕자님이 왕이 되고 이 왕국을 잘 다스려 주셨으면 좋겠어요. 배도스 공작 같은 사람이 다스리는 게 아니라요.”

옆에서 그로프가 울었다.

“개꿀개꿀.”

제르딘은 그로프까지 잠시 보다가 이내 하인들에게 고개를 돌렸다.

“밖으로 가져온 책은 발레린이 읽을 수 있도록 정리하고 이에 대해 내게 보고하지 않은 사람들은 조사받도록.”

그리고 제르딘은 문지기를 보았다. 그의 눈빛이 날카로워졌다.

“앞으로 발레린을 기억해라. 왕자비이니.”

낮게 떨어지는 목소리는 침착하면서도 부드러웠다. 문지기는 서둘러 발레린에게 고개를 숙였다.

발레린은 활짝 미소를 지으며 제르딘을 쳐다봤다. 제르딘에게서 자신의 이름까지 나오니 기분이 날아갈 듯 기뻤다. 발레린이 웃으며 보고 있을 때 문득 제르딘이 돌아봤다.

그는 잠시 발레린의 눈동자를 보다가 잠시 멈칫했다. 그러나 이내 차분히 말했다.

“앞으로 무슨 일이 생기면, 지금처럼 제게 바로 말하면 됩니다. 그리고 만약 제가 없다면 제 이름을 이용해도 되고요.”

발레린은 빠르게 고개를 끄덕였다.

“공녀에게 도와줄 건 최대한 도와주겠습니다.”

차분한 목소리였다. 딱히 튀는 어조도 없었고. 그럼에도 발레린은 그 소리에 심장이 뛰었다. 그때 제르딘 옆에 있던 보좌관이 제르딘에게 무언가 속삭였다. 제르딘은 고개를 끄덕이고는 발레린에게 말했다.

“그럼 전 먼저 가 보겠습니다.”

제르딘은 간단히 인사를 하고 몸을 돌렸다. 발레린은 그저 멍하니 제르딘을 바라봤다. 새삼 제르딘과 한 발자국 가까워진 기분이었다. 이렇게나마 제르딘이 자신을 존중해 주어서 좋았다. 발레린은 멍하니 제르딘의 뒷모습을 좇으며 미소를 지었다.

그때 옆에 있던 루네스가 조심스레 말했다.

“왕자비님?”

발레린이 돌아보자 루네스가 말을 이었다.

“이제 안으로 들어가시면 될 것 같아요. 마침 하인들이 책을 다 옮긴 것 같거든요.”

발레린은 고개를 끄덕이며 왕실 도서관 안으로 들어갔다. 도서관은 무척이나 고풍스럽고 고급스러운 분위기였다. 나무 벽으로 장식되어 있었는데 책 냄새가 유난히 발레린의 코를 자극했다.

발레린은 빙긋 웃으며 종이 냄새를 맡았다. 예전에 탑 안에 있을 때도 책을 보며 맡던 냄새였다. 거기다 탑 안에서 보던 책보다 훨씬 많은 책이 빽빽이 있자 발레린의 얼굴은 절로 빛났다.

그때 루네스가 발레린에게 말했다.

“왕자비님, 하인들이 황금 마검에 관련된 책은 모두 이곳에 옮겨 놓았어요. 여기 있는 책을 보며 찾으시면 될 것 같아요.”

발레린이 고개를 돌리자 넓은 책상 위에 책이 가득 쌓여 있었다.

“다 보려면 일주일 넘게 걸릴 것 같은데.”

발레린이 중얼거리자 루네스가 조심스레 말했다.

“왕자비님께서 괜찮으면 저도 도울게요!”

이미 루네스가 도와주려는 의지를 보였기에 발레린은 기쁘게 말했다.

“고마워, 그럼 책을 보면서 황금 마검에 대한 내용이 적혀 있으면 모두 기록해 줘. 책 제목과 쪽수와 함께 말이야.”

루네스는 기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마침 책상 위에는 여러 종이와 함께 깃털 펜이 있었다. 발레린은 환한 얼굴로 책 한 권을 집고는 책상 앞에 앉았다. 그로프도 발레린 옆에 앉아서 혹시나 발레린이 놓치는 내용이 없나 확인했다.

그렇게 종이를 넘기는 소리만 가득하던 때였다.

그로프는 내심 발레린의 눈치를 보았다. 그로프가 계속 쳐다보자 발레린은 그로프와 눈을 맞추었다.

“그로프, 나한테 할 말 있어?”

그로프는 고개를 푹 숙였다가 천천히 시선을 들었다.

“주인님, 그런데 만약 이렇게 해서 황금 마검을 찾는다면 배도스 공작이 몰락하는 것은 시간문제이지 않겠습니까?”

“그렇긴 해. 우선 황금 마검을 찾으면 왕자님이 왕위를 이을 거고 배도스 공작이 이렇게까지 권력을 휘두르는 일은 줄어들겠지.”

“그래서 전 주인님이 걱정됩니다. 만약 황금 마검을 찾아서 왕자에게 갖다 주면 제르딘은 왕이 되지만 주인님은 어떻게 되실지…….”

“하지만 아직 모르잖아.”

“그렇긴 하지만…….”

“그로프, 너무 걱정하지 마. 왕자님은 나를 그렇게 버릴 분은 아니시잖아. 그래도 나를 사람처럼 대하는 유일한 분이시고.”

그렇게 말해도 그로프의 얼굴이 펴지지 않았다. 결국 발레린은 그로프와 눈을 맞추며 미소를 지었다.

“그리고 만약 왕자님이 나를 버려도 그로프 네가 있잖아. 그러니 난 괜찮을 거야.”

그로프는 그제야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그로프는 차마 다음 말은 하지 못했다.

주인님이 너무 실망할까 봐 걱정된다고.

그로프는 말하는 대신 발레린을 쳐다보다가 이내 고개를 푹 숙였다.

발레린은 빠르게 책을 훑으며 황금 마검에 관련된 것을 정리했다. 배도스 공작이 이렇게까지 제르딘을 무시할 줄은 몰랐다.

‘왕족의 허가도 받지 않고 제멋대로 명령을 내리다니.’

그런 사람이 왕이 된다면 왕국을 어떻게 다스릴지 눈에 선했다. 이미 『천년 왕국사』에서 숱하게 봐서 그런지 배도스 공작 같은 사람은 절대 왕이 되어선 안 된다.

그러니 발레린은 어떻게 해서든 제르딘이 왕이 되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어느새 주변은 캄캄해졌다. 왕실 도서관을 관리하는 하인들이 주변에 등을 밝혔다. 그사이 루네스는 뒤늦게 처리할 일이 생겨 도서관을 나갔고 발레린과 그로프만 남게 되었다.

열심히 책만 봐서 그런지 발레린은 슬슬 졸리기 시작했다. 거기다 아까 제르딘이 오지 않아 음식을 멍하니 먹기만 해서인지 더 졸음이 쏟아졌다.

서서히 발레린의 고개가 불규칙적으로 아래로 쏠릴 때였다. 도서관 문이 천천히 열리는 소리가 들리더니 차분한 걸음소리가 주변을 울렸다.

그로프는 곧바로 고개를 들어서 주위를 살폈다. 제르딘이 오고 있었다. 그로프는 제르딘을 유심히 바라봤다. 그의 눈길은 발레린에게 쏠려 있었다. 피곤한 기색 없이 멀끔한 얼굴이었지만 하늘빛 눈동자에는 묘한 권태가 묻어 있었다.

그가 완전히 멈춰 섰다. 이제 발레린은 아예 고개를 숙인 채 눈을 감고 있었다. 옅은 숨소리가 울리는 가운데 그로프는 제르딘에게 눈을 떼지 못했다. 무엇보다 제르딘은 발레린을 쳐다보고 있었다. 그것도 눈길을 떼지 않고 집요하게.

그로프는 그 시선을 이해하지 못한 채 제르딘을 쳐다봤다. 그때 제르딘이 고개를 들어 주변을 살폈다. 순간 그로프는 제르딘과 눈이 마주쳤다.

“황금 마검을 찾고 배도스 공작이 권력을 잃으면 주인님을 버리실 겁니까?”

제르딘이 눈썹을 찌푸리며 고개를 살짝 기울였다.

“버리다니. 말이 심한데?”

“그럼 주인님께 잘 대해 주십시오. 주인님은 왕자님밖에 없습니다.”

제르딘이 차분히 발레린 옆에 앉았다. 그는 한쪽 뺨에 손을 댄 채 발레린을 보며 말했다.

“나도 발레린밖에 없는 건 마찬가지인데.”

그로프는 고개를 기울였다.

“무슨 말입니까? 왕자님은…….”

그제야 제르딘이 그로프에게 시선을 주었다. 하늘빛 눈동자가 묘하게 번뜩였다.

“그동안 독 감별사로 내 곁에 있던 사람도 없어지고, 이제 사르티아 공작도 단단히 내 편을 들어 주고 있으니 발레린 공녀야말로 내겐 없으면 안 되는 존재이지.”

“결국 주인님을 이용하고 있다는 말로 들립니다.”

제르딘이 한쪽 눈썹을 찌푸렸다.

“이용은 한쪽이 일방적으로 당하고 있을 때 하는 말 아닌가?”

“그래도 결국 왕자님은 주인님을 이용해서 그 자리를 보전하는 것 아닙니까?”

“아니, 이용보다는 서로 이해관계가 맞은 것뿐이지. 발레린은 그 탑에서 벗어나서 억울하게 뒤집어쓴 죄를 벗어야 했고 해인저 모녀가 벌을 받게 만들어야 했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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