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2화
그로프도 잔뜩 기대하는 눈빛으로 앞을 쳐다봤다. 곧 붉은 옷을 입은 사람이 나무 단 위로 올라왔다. 붉은 옷을 보아하니 왕궁에서 일하는 사람이었다. 그는 기다란 종이를 들고 있었다.
그가 하인에게 눈짓하자 해인저 모녀가 질질 끌리며 나무로 된 단으로 올라왔다. 구경하던 사람들이 소리를 질러 댔다. 발레린은 침을 삼키며 해인저 모녀를 보았다.
모녀의 몰골은 엉망이었다. 머리가 이리저리 풀리고 드레스는 다 해져서 예전의 말끔하던 모습은 어디에서도 찾을 수 없었다. 발레린은 그다지 불쌍하다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그저 그들이 저지른 대로 죗값을 받는 것뿐이었다.
그때 그들이 멈춰 서서 앞을 바라봤다. 돌을 던지는 사람도 있었고 말린 채소를 던지는 사람까지 있었다. 해인저 모녀는 눈썹을 찌푸리며 고개를 숙였다. 그때 붉은 옷을 입은 사람이 한 손을 높이 들었다.
해인저 모녀를 욕하던 사람들의 소리가 잠시 수그러들었다. 그 틈에 그는 기다란 종이에 적힌 것을 읽기 시작했다.
“죄인 타니안 해인저와 르네윈 해인저는 발레린 공녀에게 15년간 독을 먹인 것과 동시에 사르티아 부인을 독으로 살해한 죄와, 덧붙여서 15년간 아무런 반성도 없이 오히려 발레린 공녀에게 죄를 뒤집어씌우며 발뺌한 죄를 더해서 참형에 처한다.”
그 말과 동시에 집행자가 나와서 해인저 모녀의 목에 칼을 댔다. 해인저 모녀는 무릎을 꿇으며 집행자의 바짓가랑이를 붙잡았다. 하지만 집행자는 대번에 칼을 높이 들었다.
휙 바람을 가르며 칼이 굽이쳤다. 그와 동시에 붉은 피가 낭자하게 튀었다. 구경하던 사람들의 목소리가 무척이나 컸다. 서로 욕을 해 대며 돌을 던지는 사람까지 있었다.
발레린은 멍하니 그들을 바라봤다. 어쩌면 그동안 발레린이 기다려 왔던 결과였다.
‘결국 어머니 말이 맞았어.’
기다리면 되는 것이다. 그들이 죗값을 받을 때까지. 대신 할 일은 꾸준히 하면서 말이다.
발레린은 홀가분한 마음으로 자리에서 일어났다. 해인저 모녀의 죽음은 발레린이 여태껏 살아왔던 방식이 틀리지 않았다는 것을 증명하는 셈이었다.
발레린이 나서자 기사들은 길을 내주기 시작했다. 발레린은 그곳을 천천히 벗어났다. 기다리고 있던 마차에 타는 순간 발레린은 마음속이 상쾌해지는 기분에 휩싸였다.
“그로프, 혹시 너도 마음이 시원하니?”
“전 해인저 모녀의 피가 튈 때부터 상쾌했습니다. 주인님의 눈에 눈물이 흐르게 하고 15년 만에 죗값을 받았으니까요.”
발레린은 기분 좋은 미소를 지은 채 고개를 끄덕였다.
“이제야 어머니가 편하게 눈을 감으실 수 있겠어.”
“그리고 주인님도 편하게 잘 수 있겠습니다.”
발레린은 고개를 끄덕이며 마차 중간 문을 열었다.
“사르티아 가문 묘지로 가 줄래?”
마부는 곧바로 고개를 끄덕이곤 마차를 몰았다. 발레린은 마차 창밖을 바라봤다. 여전히 많은 인파가 모여 있었다.
마차는 사람들을 지나쳐 어느덧 넓은 도로로 나왔다. 발레린이 멍하니 밖을 보고 있을 때 그로프가 물었다.
“사르티아 가문의 묘지라면 주인님의 어머니 묘지로 가는 겁니까?”
“응, 어머니에게 말해 주려고. 이제 편하게 잠들 수 있겠다고.”
발레린은 눈물이 나오려던 것을 겨우 참았다. 해인저 부인이 결혼할 때 다짐했었다. 더는 울지 않겠다고.
하지만 어느덧 발레린의 눈에 눈물이 고이기 시작했다. 발레린은 주머니에서 손수건을 꺼내서 눈 밑을 닦았다. 그로프가 발레린을 위로하며 울었다.
“개꿀개꿀.”
발레린은 왠지 그 울음소리에 순간 웃음이 터졌다. 거저 얻은 개꿀이 이 상황에 무척 어울렸다. 물론 거저 얻지는 않았지만 그래도 달콤한 것은 마찬가지였다.
“주인님, 괜찮으십니까?”
발레린은 손수건으로 남은 눈물을 닦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이제 눈물이 고이지 않았다. 발레린이 손수건을 주머니에 넣자 그로프는 기쁜 듯 발레린의 어깨 위로 올라왔다.
어느덧 마차는 조용한 숲에 멈춰 섰다. 발레린이 내리자 기사들이 나왔다. 발레린은 당황스럽긴 했으나 어쩔 수 없는 일이니 조용히 묘지로 걸어갔다.
사르티아 부인의 묘지는 다행히 잘 관리되어 있었다. 발레린은 딱딱한 묘지를 보며 어머니에게 해인저 모녀의 일과 제르딘과 결혼한 사실을 모두 털어놓았다. 모든 것을 말하니 발레린은 다소 마음이 가벼워지는 듯했다.
그렇게 발레린은 그곳에 한동안 있다가 마차를 타고 왕궁으로 돌아왔다. 돌아오는 길은 이상하게 가깝게만 느껴졌다. 거기다 이젠 마음이 은근히 가볍기까지 했다.
저 멀리 왕궁이 보였다. 높이 솟은 깃발이 바람에 이리저리 펄럭였다. 저곳에 제르딘이 있다고 생각하니 심장이 빠르게 뛰었다. 이제 해인저 모녀의 사건도 해결되었으니 발레린은 누구보다 제르딘에게 도움이 되고 싶었다.
발레린은 마음을 다지며 그로프에게 말했다.
“그로프, 우리 황금 마검을 찾아야 해.”
“왕자가 간절히 찾고 있는 것 말입니까?”
“맞아, 분명 한 자루가 더 있을 거야.”
“하지만 그건 장담하지 못하는 것 아닙니까?”
“그래도 아예 없다고도 장담 못 해. 지금까지 발견되지 않은 것뿐이니까.”
“정말 있을까요?”
“내가 본 책에서는 분명 두 자루로 만들어졌다고 했어. 그리고 소문을 모아 놓은 책에서도 두 자루라고 말했고. 만약에 정말 황금 마검이 하나라면 그렇게까지 소문이 나지 않았을 것 같아.”
“그렇지만 사람들의 염원이 담겨 있어서 그렇게까지 소문이 난 것 아닐까요?”
“그럴 수도 있겠지만 그래도 혹시 모르니까. 그리고 아예 없다고 장담하지도 못해. 그것도 따지고 보면 증거가 없으니까.”
그로프는 고개를 끄덕였다. 발레린은 밝은 얼굴로 마차 창밖에 보이는 왕궁을 바라봤다.
“분명 있을 거야.”
발레린은 그 희망을 잃지 않았다.
발레린은 제르딘의 왕궁에 도착하자마자 바쁘게 움직였다. 루네스가 뒤늦게 따라오며 발레린에게 말했다.
“왕자비님, 왕실 도서관은 왜 가시는 건가요?”
“황금 마검에 대해 찾아볼 게 있어서.”
“황금 마검이요?”
발레린은 고개를 끄덕였다. 루네스는 영 이해하지 못하는 듯 물었다.
“그런데 황금 마검은 왜요?”
“내 생각에는 두 자루로 만들어진 것 같아서.”
“두 자루로요?”
루네스는 너무나 놀란 나머지 목소리가 꽤 컸다. 주변에 지나치던 하인들이 발레린과 루네스를 힐끗 쳐다봤다.
발레린은 개의치 않고 고개를 끄덕였다.
“그게 가능한가요?”
“내가 예전에 책에서 봤을 땐 그런 사실도 있었어. 그리고 따지고 보면 황금 마검이 한 자루라는 것도 명확한 증거가 없으니까.”
루네스는 멍한 얼굴로 발레린을 따라오다가 무언가 생각났는지 빠르게 말했다.
“그러고 보면 왕자님께서 지금 황금 마검을 찾고 계시지 않나요?”
“맞아, 그래서 왕자님을 도와 드리려고.”
“역시 왕자비님이세요. 저도 도와 드릴게요!”
루네스가 의지를 다지며 말하자 발레린은 빙긋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왕실 도서관으로 향하는 발레린의 걸음은 여느 때보다 빨랐다. 발레린은 문득 탑 안에서 보던 책을 떠올렸다. 모두 오래된 책이었다.
그때 그로프가 말했다.
“왕실 도서관의 책은 탑 안에 있던 책보다 더 많겠죠?”
“왕실 도서관에 있는 책이 더 양질일 거고 양도 많을 테니 황금 마검에 대한 정보를 다양하게 찾을 수 있을 거야.”
발레린은 내심 설레기도 했다. 그동안 오래된 책만 보다가 더 다양한 책을 볼 수 있다고 생각하니 마음이 두근거렸다.
그렇게 발레린이 잔뜩 기대하며 왕실 도서관에 도착했을 때였다. 도서관 문 앞은 매섭게 생긴 문지기가 지키고 서 있었다. 발레린은 개의치 않고 문을 향해 걸어갔다.
하지만 그들은 문을 열어 주지 않았다. 급기야 루네스가 나서서 문지기에게 말했다.
“왕자비님이십니다.”
하지만 문지기는 앞을 보며 말했다.
“배도스 공작님께서 당분간 누구도 들이지 말라 하셨습니다.”
그 말에 발레린이 물었다.
“왜?”
“지금 안에서 내부 작업을 하고 있습니다.”
“내부 작업?”
그때 문이 열리더니 붉은 옷을 입은 하인들이 몰려나왔다. 그들의 손에는 책이 한가득 있었다. 루네스가 다가가며 물었다.
“무슨 작업을 하는 거예요?”
“배도스 공작님께서 지시하셨습니다. 황금 마검에 대해 적힌 책은 모두 소각하라고요.”
발레린은 재빨리 그들을 막았다.
“하지만 여긴 왕실 소유 아니야?”
“맞긴 하지만 배도스 공작님이 지시하셔서…….”
“왕자님은 이 사실을 아셔?”
“그건 저희도 모릅니다.”
발레린은 역사책을 떠올렸다. 예로부터 왕실 도서관은 왕실의 소유로 아무리 왕실과 가까운 사람이라도 함부로 들어가는 곳이 아니었다.
발레린은 책을 가져가려는 사람들을 완전히 막았다.
“왕자님의 명령도 아니고 친척인 귀족의 명령으로 책을 무참히 소각하는 건 말이 안 돼.”
하인들이 눈치를 보았다. 발레린은 재빨리 루네스에게 지시했다.
“지금 당장 왕자님에게 이 사실을 고해. 여긴 내가 지키고 있을 테니까.”
루네스는 고개를 끄덕이곤 반대쪽 복도로 달려갔다. 결국 하인들은 서로 눈치를 보며 책을 바닥에 내려놓았다. 발레린은 하인이 내려놓은 책을 한 권 들었다. 하인이 뭐라고 반박하려 했지만 발레린은 침착하게 말했다.
“난 이제 왕실의 일원이잖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