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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록빛 저주의 공녀님-41화 (41/130)

41화

그럼에도 발레린은 지지 않으며 말했다.

“그래도 저는 왕자님을 위해서 최선을 다할 거예요. 제가 계약한 서류에 그렇게 적혀 있기도 하고요.”

제르딘이 마음을 주지 못할지라도 발레린은 늘 꿈꿔 왔던 사랑을 하고 싶었다. 비록 상대방은 그 사랑을 알아주지 않더라도 말이다.

“그럼 공녀에겐 남는 게 없을 수도 있습니다. 그렇게 애써도 결국 난 공녀에게 원하는 존재가 될 수 없을 테니까요.”

“하지만 제 머릿속에는 기억이 남잖아요. 비록 상대방은 모르더라도 말이에요.”

그때 그로프가 발레린의 손에 기댔다. 발레린은 미소를 지으며 그로프를 쳐다봤다. 가끔 그로프가 이렇게 가까이 와서 몸을 기댈 때면 묘하게 자신감이 생겼다. 혼자라고 생각해도 그로프가 옆에 있으면 발레린은 그다지 두렵지 않았다.

제르딘은 여전히 발레린을 바라봤다. 발레린은 그의 시선을 온전히 받는다는 것이 부끄럽긴 했지만 개의치 않고 그와 눈을 맞췄다. 하늘빛 눈동자가 이채를 띠었다. 그는 바로 앞에 있는 물 잔을 들어 마셨다.

“확실히 공녀는 여태껏 보던 사람과는 다릅니다.”

“다르다는 건 어떤 의미인가요?”

제르딘이 손이 멈칫했다. 그는 물 잔을 대번에 내려놓았다. 그는 곧바로 고개를 들어 발레린과 눈을 맞췄다.

“그저 호기심입니다. 왕궁에는 공녀 같은 사람이 거의 없으니까요.”

“그럼…….”

발레린이 잔뜩 기대하며 말을 다 하기도 전에 제르딘이 말했다.

“황금 마검에 대해서 필요한 자료가 있으면 말씀하세요. 도와주겠습니다. 그리고 오늘 해인저 모녀의 재판이 열리고 형벌이 집행될 겁니다. 그동안 독살에 대한 확실한 증거도 있고 집요하게 괴롭힌 정황도 있어 형벌이 꽤 무거울 겁니다.”

발레린은 아까 듣지 못한 대답이 거슬리긴 했지만 희망을 품고 미소를 지었다.

“안 그래도 해인저 모녀의 형벌이 집행되는 걸 보려고요.”

제르딘의 눈썹이 살짝 일그러졌다.

“형벌이 무척 잔인할 텐데, 괜찮으시겠습니까?”

“어차피 이전에 형벌에 대한 책을 읽기도 했고 실제로 어떻게 벌어지는지 궁금하기도 해요.”

어느새 발레린의 눈에서는 반짝반짝 빛이 났다. 제르딘은 발레린을 한참 동안 바라보다가 미소를 지었다. 그는 이내 고개를 끄덕이고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저는 참석하지 않을 거지만 보좌관에게 말해서 마차를 준비하라고 하겠습니다.”

“고맙습니다. 왕자님.”

제르딘은 간단히 고개를 끄덕이고는 몸을 돌렸다. 발레린은 제르딘이 앉아 있던 곳을 바라봤다. 식탁 위 음식은 전혀 줄어들지 않았다. 발레린은 제르딘이 나가기 전 급하게 외쳤다.

“왕자님!”

제르딘이 천천히 돌아봤다.

“그러고 보면 음식을 전혀 드시지 않는 것 같아서요. 거기다 제가 특별히 독 감별을 해도 드시지 않는데 혹시 미리 먹고 오시는 건가요?”

제르딘의 표정이 잠시 굳었다. 하지만 그는 곧 표정을 풀고는 말했다.

“아니요.”

“만약 여기에 있는 음식이 맞지 않으시면 원래 드시던 음식을 드셔도 돼요. 괜히 저와 맞춰 준다고 이런 음식을 먹지 않으셔도…….”

“공녀, 그건 제가 알아서 하겠습니다.”

단호히 떨어지는 말에 발레린은 더 말을 덧붙이지 않았다. 제르딘은 간단히 고개를 숙이곤 정찬실을 나갔다. 발레린은 제르딘이 나간 문을 멍하니 바라봤다.

그때 옆에 있던 그로프가 말했다.

“왕자는 무슨 생각인지 모르겠습니다. 저렇게 하나도 먹지 않는 걸 보면 분명 어디선가 뭔가를 먹고 오는 것 같은데 신경 쓰지 말라고 하니.”

발레린이 대답하지 않고 멍하니 있자 그로프가 발레린을 보며 말했다.

“주인님, 너무 신경 쓰지 마십시오. 어차피 독 감별도 그저 형식적인 것에 불과한 듯 보입니다. 주변에서 왕자의 독 감별 때문에 자꾸 죽어 가니 더 죽음을 보고 싶지 않아 주인님을 임명한 것 같기도 하고요.”

“…….”

“그리고 왕자는 독에 그다지 취약한 인물도 아니지 않습니까? 그러니 저렇게 죽음에 당당한 것 같습니다.”

발레린은 여전히 대답은 하지 않고 문을 바라봤다. 그로프는 개의치 않고 말을 이었다.

“그러니 주인님은 이제 왕자의 안위에 대해선 그다지 걱정하지 않으셔도 될 것 같습니다.”

발레린은 고개를 돌려 자신 앞에 있는 음식을 바라봤다. 발레린도 제대로 먹지 않아서 아직 음식은 그대로였다. 결국 발레린은 포크를 들며 입을 열었다.

“그런 것 같긴 해. 나와 입을 맞췄는데도 왕자님은 멀쩡하잖아.”

“그러니까요. 확실히 왕자가 말하는 그런 피가 맞는 것 같습니다. 보통 인간들이라면 쓰러졌을 상황인데도 멀쩡하니까요.”

“그런데 내가 입을 열지 않긴 했어. 그래서 멀쩡한지도 모르지.”

그로프는 대답하지 않고 발레린을 올려다봤다. 발레린은 미소를 지으며 그로프와 눈을 맞췄다.

“그나저나 그로프, 귀뚜라미는 많이 먹었어?”

“저는 이미 배부르게 먹었긴 하지만 괜찮으십니까?”

“뭐가?”

“주인님께서 많이 실망한 것 같아서요.”

“난 괜찮아. 어차피 짝사랑이잖아. 그래도 여전히 내 마음속에는 희망이 있어.”

발레린의 눈은 다시 반짝반짝 빛이 났다. 그로프는 호기심 넘치는 눈빛으로 쳐다봤다.

“무슨 희망 말입니까?”

“언젠가는 왕자님이 나를 사랑하는 거 말이야.”

“하지만 왕자는 아예 사랑을 하지 못한다고 못 박은 거 아닙니까?”

“그래도 혹시 몰라. 나처럼 어느 순간 반할지도 모른다고.”

발레린은 절로 미소가 나왔다. 처음 제르딘을 본 순간은 정말이지 황홀한 경험이었다. 어머니의 말씀대로 제르딘 주변에 별이 반짝여서 감히 눈을 뗄 수 없는 광경이었다.

발레린은 그로프를 쳐다보며 눈에 힘을 주며 말했다.

“그리고 아까 듣지 않았어?”

“뭘 말입니까?”

“내가 다른 사람과 다르다고 했잖아! 그리고 내게 호기심을 갖기도 하고.”

발레린은 아까 제르딘이 한 말을 생각하며 빙긋 미소를 지었다.

“하지만 그저 호기심뿐이지 않습니까?”

“그렇지만 그게 어떻게 변할지 몰라. 호기심이 커 가면 관심이 될 거고 그 관심이 커 가면 사랑이 되지 않겠어?”

그로프는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역시 주인님은 천재입니다.”

발레린은 싱긋 웃으며 나머지 음식을 먹었다. 아까는 제대로 맛이 느껴지지 않던 음식이 이제는 꿀맛처럼 달콤했다. 발레린은 음식을 먹는 내내 환한 미소를 지었다.

발레린은 활기찬 아침 식사를 마치고 15년간 기다려 왔던 결과를 보려 마차를 탔다. 마침 제르딘이 미리 말해 놓아서 마차는 평소보다 깨끗하고 거대했다.

해인저 모녀의 형벌이 집행되는 곳은 왕궁 근처의 광장이었다. 주로 반역을 저지른 1급 범죄자나 입에 담기도 무서운 죄를 저지른 흉악한 범죄자를 벌하는 곳으로 유명했다.

그곳에서 만인에게 형벌을 집행하는 과정을 보여 줌으로써 누군가에겐 통쾌함을 누군가에겐 두려움을 주었다.

발레린은 난생처음 보는 집행식에 마음이 두근거릴 정도였다. 그도 그럴 것이 15년 동안 가장 간절히 바라던 일이었다. 해인저 모녀가 죗값을 받는 것이다.

“그로프, 오늘은 어쩌면 내겐 가장 역사적인 날이야.”

“맞습니다. 그동안 해인저 모녀가 얼마나 주인님께 모질게 대했습니까? 물론 해인저 모녀가 주는 독은 오히려 맛있는 애피타이저가 되긴 했지만.”

발레린은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곳에 가면 해인저 모녀가 지은 죄를 모두 말하겠지?”

“그럴 겁니다. 워낙 지은 죄가 많으니 시간이 꽤 걸릴 것 같습니다.”

그로프는 그 말을 한 뒤 개꿀개꿀 울었다. 발레린은 잔뜩 기대하는 마음으로 마차 창밖을 바라봤다. 어느새 광장이 보였다. 마차가 서서히 멈춰 섰다.

마차가 완전히 멈추자 조심스레 마차 문이 열렸다. 잘 차려입은 사람이 발레린을 보자마자 고개를 숙이며 인사를 했다.

“왕자비님을 뵙습니다.”

발레린은 예법에 맞게 인사를 한 뒤 마차에서 내렸다. 주변에는 이미 기사들이 와 있어서 발레린 주변으로 길이 완성되었다. 발레린은 놀란 얼굴로 주변을 둘러봤다.

“이렇게 경호를 받는 건 처음이야.”

그로프도 눈을 동그랗게 뜬 채 중얼거렸다.

“확실히 왕족의 위엄이 대단한 것 같습니다.”

발레린은 동의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서 역사책에선 그렇게 잔인하게 굴었던 것 같다. 서로 왕이 되려고 말이다.

발레린은 자신의 주위로 서 있는 기사를 지나쳐 편하게 어느 높은 단상 위로 올라갔다. 광장의 한쪽에 설치되어 있었는데, 가끔 이곳에서 경기를 하는 것을 구경하기 위해 만든 곳 같았다.

지금은 일반 사람들은 오지 못하도록 철저하게 통제되어 있었다. 그곳에 있는 사람들도 발레린이 결혼식 피로연에서 언뜻 마주친 사람이 대부분이었다.

발레린이 안내받은 자리로 올라가자 주변에 있던 귀족들은 일어나 인사를 했다. 발레린은 그들에게 예법에 맞게 인사했다. 귀족들은 다소 놀란 눈치였다. 발레린은 개의치 않고 늘 하던 것처럼 밝은 얼굴로 그들을 지나쳤다.

발레린이 안내받은 자리에 앉자 둥둥 커다란 북소리가 울렸다. 발레린의 심장도 북소리처럼 쿵쿵 뛰기 시작했다. 발레린은 손에 땀이 차는 것을 무시하며 그로프에게 속삭였다.

“그로프, 이제 시작되나 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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