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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록빛 저주의 공녀님-40화 (40/130)

40화

“그렇긴 하지만 지금 귀족들이 워낙 강경하게 피 검사를 밀어붙이고 있어서요.”

발레린은 곰곰이 생각하다가 말했다.

“만약 그 방법대로 한다면 결국 왕자님은 귀족들에게 휘둘리는 거겠지.”

그 말에 루네스가 놀라며 말했다.

“그러고 보면 배도스 공작이 강력히 주장하고 있긴 해요. 결국은 권력 싸움이네요.”

어느새 루네스의 눈빛이 초롱초롱해졌다. 이 상황이 꽤 흥미로운 듯했다.

발레린은 내심 제르딘이 걱정되었다. 물론 제르딘은 여태껏 역사책에서 본 사람들과 달리 무척이나 영리하게 행동하긴 했지만 귀족들이 이렇게 밀어붙인다면 어쩔 수 없을 것 같기는 했다.

‘그렇다고 내 피를 줄 수도 없고.’

문득 발레린은 어떤 개인이 지은 역사책에서 본 사례를 떠올렸다. 보통 왕실에서 하는 피 검사는 마법으로 이루어진다. 은 대야에 왕족이 피 한 방울을 떨어뜨리면 그 핏방울이 곧바로 금색으로 변한다. 하지만 왕족의 피가 아니라면 검은색으로 변한다.

그런데 책에서는 돼지 피를 은 대야에 떨어뜨리자 왕족의 피처럼 금색으로 변했다고 적혀 있었다. 물론 개인이 쓴 책이라서 검증이 필요하지만 그래도 한 번쯤 생각해 볼 만했다.

만약 제르딘이 정말로 위험하다면 어쩔 수 없이 그래야 할지도 모른다.

발레린이 내심 마음속으로 다짐하고 있을 때 문득 루네스가 물었다.

“왕자비님, 오늘 해인저 모녀의 처벌이 집행된다면 보러 가실 건가요?”

발레린은 망설이지 않고 고개를 끄덕였다. 15년 전부터 해인저 모녀가 죗값을 받기를 간절히 원했다. 그 결과를 이제야 보는데 빠질 수는 없었다.

“그리고 어제부터 왕자비님의 친척이라고 주장하면서 무척이나 많은 방문 신청이 왔어요.”

루네스는 기다란 종이를 내밀었다. 발레린은 종이에 적힌 이름을 확인했다. 모두 아버지 쪽 친척이었다. 그럼에도 발레린의 얼굴은 그다지 좋지 않았다.

‘어머니 장례식에서 날 무시했던 사람들이잖아.’

어릴 때 발레린은 똑똑히 기억했다. 그들은 하인처럼 자신을 무시하고 못되게 굴었다. 거기다 발레린이 어머니를 죽였다고 하면서 그녀가 하는 말은 전혀 믿어 주지 않았던 사람들이기도 했다.

발레린은 어머니의 장례식을 생각하다가 이내 고개를 들었다.

“그런데 이 사람들은 갑자기 왜 방문을 하려고 해?”

“아마 왕자비님께 축하하러 오시는 게 아닐까요? 결혼식 피로연은 정식으로 초대된 대귀족만 올 수 있으니까요.”

실상 발레린은 자신의 친척은 모두 초대하지 않았다. 친하지도 않을뿐더러 그다지 보고 싶다는 생각도 들지 않아서였다.

하지만 이제 발레린은 궁금했다.

‘이곳에 오면 어떤 말을 할까.’

발레린은 곰곰이 생각하다가 이내 미소를 짓고는 루네스에게 말했다.

“이분들의 방문을 모두 받아들인다고 해.”

루네스의 눈이 한껏 커졌다.

“괜찮으시겠어요? 꽤 많은데.”

“전에도 많은 사람이랑 이야기를 했지만 오히려 지치지 않고 재미있었어. 물론 지금은 친척의 방문이긴 하지만.”

루네스는 활기찬 발레린의 말에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의 눈에도 그때의 발레린은 전혀 지친 기색이 없었다. 모두 매시드 왕국에서 내로라하는 귀족들임에도 발레린은 주눅조차 들지 않고 밝게 말했었다.

“그럼 이분들의 방문을 모두 승인할게요. 더 필요한 건 없으신가요?”

발레린은 고개를 내저었다. 그러면서 시계를 확인하니 아침 먹을 시간이 다가오고 있었다. 발레린은 다소 서두르며 루네스에게 말했다.

“루네스, 나는 정찬실로 갈게.”

“벌써 가시게요?”

“미리 가서 왕자님이 먹는 음식에 독이 있는지 감별하려고.”

여태껏 발레린은 일찍 가서 독 감별을 했었다. 독이 발견된 적은 없긴 하지만 그래도 상황이 어떻게 될지 모르니 철저히 해야 했다.

발레린은 잔뜩 기대하는 마음으로 정찬실로 내려갔다. 그 옆을 루네스가 따라왔다. 여전히 루네스의 손에는 수첩이 있었다.

“왕자비님, 해인저 모녀의 재판은 아침 먹고 바로 가시면 볼 수 있을 거예요.”

꽤 이른 집행에 발레린은 더욱 기분이 좋아졌다. 그로프도 그 소식에 기분이 좋은지 개꿀개꿀 울었다.

막 정찬실에 도착하자 제르딘이 먼저 와 있었다. 발레린은 서둘러 자리에 앉았다.

“혹시 오래 기다리셨나요?”

물 잔을 들고 있던 제르딘이 발레린을 쳐다봤다. 그는 고개를 내저었다.

“아니요. 저도 방금 왔습니다.”

그때 보좌관이 제르딘의 눈치를 봤다. 그는 할 말이 꽤 있어 보였지만 제르딘이 별말 없이 가만히 있자 물러나는 듯했다. 발레린은 아무래도 제르딘이 일찍 온 이유가 궁금해서 물었다.

“그런데 오늘 바쁜 일이 있으신가요? 원래 이렇게 일찍 오지 않으셨잖아요.”

“처리할 일이 많아서요.”

“혹시 배도스 공작 관련된 일인가요?”

“어떻게 아셨습니까?”

“어제 축사에서도 왕족의 권위를 위해서 고결한 피를 검사해야 한다는 식으로 말하지 않았나요?”

제르딘은 물 잔을 놓았다.

“맞습니다.”

“그럼 그 말은…….”

“이제 제가 공녀와 정말 결혼을 했으니 노골적으로 저를 방해하려는 수작입니다.”

“그럼 결국 배도스 공작이 왕자님께서 피 검사를 받도록 유도한다는 거네요.”

“그렇게 해도 제가 피 검사를 하는 일은 없을 겁니다.”

제르딘은 무척이나 단호한 태도였다. 그래도 발레린은 걱정이 되어 물었다.

“하지만 배도스 공작이 그렇게까지 하면 왕자님 평판은 괜찮을까요?”

“어차피 지금도 저에 대한 소문이 돌고 있습니다. 그전에 저는 꼭 황금 마검을 찾아야 하고요.”

발레린은 역사책에서 본 황금 마검을 떠올렸다. 말 그대로 마력으로 만들어진 황금색 검이었다. 무척 화려해서 어릴 때 발레린의 시선을 끈 검이기도 했다.

“그런데 그 황금 마검은 어디에 있는 건가요?”

“배도스 공작이 숨기고 있을 겁니다. 제가 죽기 전까지, 아니면 스스로 왕자 자리에서 물러날 때까지 돌려주지 않을 속셈이죠.”

“그럼 얼른 찾아야 하지 않나요?”

“부지런히 찾고 있는데 지금은 실마리조차 보이지 않습니다.”

문득 발레린은 민간에서 떠도는 이야기를 적은 책을 떠올렸다. 황금 마검이 하나가 아니라 두 자루로 만들어졌다는 이야기였다. 발레린은 혹시 몰라서 제르딘에게 물었다.

“그런데 황금 마검이 두 자루일 수 있나요?”

“확률은 희박합니다.”

“그래도 두 자루일 확률은 있다는 말씀이죠?”

“검증되지 않은 역사이고 현재까지 발견되지 않았으니 거의 없다는 게 맞을 겁니다.”

하지만 발레린은 쉽사리 희망을 잃고 싶지 않았다.

“그래도 일말의 가능성은 있지 않을까요?”

제르딘은 대답 없이 발레린을 바라봤다. 그 시선이 너무 노골적이라 발레린은 혹시나 실수라도 한 것이 아닌가 걱정이 되었다.

“왕자님, 혹시 제가 못할 말이라도…….”

제르딘은 고개를 살짝 기울인 채 묘한 눈빛으로 바라봤다. 발레린이 주의 깊게 쳐다보자 그가 말했다.

“아무리 생각해도 이상합니다.”

“뭐가요?”

“분명 예전에는 이런 말을 들으면 터무니없다고 헛웃음이 나왔을 텐데 지금은 오히려 공녀가 하는 말을 믿고 싶다는 생각이 들어서요.”

그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발레린은 활짝 웃었다. 아까와 다르게 마음속이 너무나 벅차서 목소리가 되는대로 나갔다.

“그럼 제 말을 믿으세요! 제가 어떻게든 황금 마검을 찾아 드릴게요!”

“개꿀개꿀.”

그로프도 옆에서 크게 울었다. 하지만 제르딘의 표정은 그다지 좋지 않았다. 그는 웃지도 않은 채 그저 굳은 얼굴이었다.

“왜요? 혹시 제가 너무 무례했나요?”

“아닙니다.”

“그럼…….”

“공녀의 일도 아닌데 이렇게 적극적인 게 새로워서요.”

“제 일이 아니긴 하지만 왕자님에겐 가장 중요한 일이잖아요. 그리고 저는 왕자님을 누구보다 좋아하고 있으니까요.”

제르딘은 말이 없었다. 발레린은 얼굴이 붉어지는 것 같아도 꿋꿋하게 말을 이었다.

“저는 최선을 다해서 왕자님을 도와 드릴 거예요. 왕자님은 저를 탑에서 꺼내 주신 분이기도 하니까요.”

“…….”

“그때까지 어느 누구도 저에게 관심을 주지 않았거든요. 아버지조차도 아예 저한테 찾아오지 않았고요. 그리고 해인저 모녀가 이렇게 죗값을 받는 것도 모두 왕자님 덕분이고요.”

발레린은 제르딘의 얼굴을 살폈다. 그가 내심 기뻐하기를 바랐다. 자신의 말을 듣고 힘을 얻었으면 했다. 이 궁에선 도저히 제르딘의 편이 많아 보이지 않았으니까.

제르딘은 그저 고개를 끄덕였다. 발레린이 예상한 반응은 아니었지만 그래도 부정하지 않아서 다행이었다. 발레린은 그제야 미소를 지었다. 그때 제르딘이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하지만 이 관계는 배도스 공작이 몰락하면 사라질 관계입니다.”

순간 발레린의 마음속은 차가운 물이 끼얹힌 것처럼 가라앉았다. 하지만 발레린은 내색하지 않으며 미소를 지었다. 그사이 제르딘이 말을 이었다.

“그러니까 공녀도 그렇게까지 신경 쓰지 않았으면 합니다.”

“하지만 잘못하다간 배도스 공작이 왕자님을 끌어내릴 수 있잖아요.”

“그렇게까진 못 할 겁니다. 제가 죽지 않는 이상.”

다시 벽이 느껴지는 무감한 얼굴이었다. 어제는 예상치 못한 입맞춤으로 가까워졌나 싶었는데 다시 그에게선 넘어설 수 없을 것 같은 단호함이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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