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초록빛 저주의 공녀님-39화 (39/130)

39화

제르딘은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돌렸다. 그는 근처에 있는 창문을 바라봤다. 어느새 창문 밖에는 완전한 어둠이 내려앉아 반달이 유난히 눈에 띄었다.

“실제로 보면 다를 겁니다. 그리고 저는 다른 사람이 제 몸에 닿는 걸 싫어하는 편입니다.”

“죄송해요. 제가 괜한 말을 했네요.”

“아닙니다. 공녀가 미안해할 필요는 없습니다. 제가 진작 말했어야 했는데.”

발레린의 얼굴은 붉게 변했다. 같이 있으면 있을수록 제르딘은 꽤 까다로운 사람 같았다. 하지만 왕궁이 워낙 살얼음판이기에 발레린은 충분히 이해하며 근처에 있는 침대에 앉았다. 몸이 닿자마자 부드럽게 감싸 주는 듯해 발레린이 감탄하며 침대를 둘러보던 중이었다.

“그나저나 아까 헬릭스와 꽤 길게 대화를 나누시던데. 언제 친해지셨습니까?”

제르딘이 돌아봤다. 발레린은 잠시 생각하다가 말했다.

“예전에 방독면을 벗기 전에 잠깐 이야기해 본 게 다예요. 그다지 친하지는 않고요.”

“하지만 헬릭스는 공녀를 친한 친구 이상으로 보는 것 같았습니다.”

발레린은 그때의 헬릭스를 생각해 보았다. 주변의 물 잔이 밑으로 떨어지든지 말든지 신경을 안 쓰면서 자신을 보는 것 같긴 했지만 친구 이상을 보는 눈빛은 아니었다.

발레린은 웃으며 고개를 내저었다.

“처음 만났을 때도 헬릭스 님은 저를 그렇게 보셨는걸요.”

“처음 만날 때요?”

제르딘의 목소리가 유난히 낮게 느껴졌다. 발레린은 개의치 않고 고개를 끄덕였다.

“그때도 그렇게 보셨어요. 그냥 제가 신기해서 그런 것 같아요. 저같이 방독면을 쓴 사람은 흔하지 않으니까요.”

“…….”

제르딘은 한참 동안 대답이 없었다. 그때 그로프가 침대 주변을 뛰어다녔다.

“주인님, 이 침대는 여태껏 뛰어다닌 침대 중에서 가장 신기합니다.”

그로프가 뛰자 침대가 살짝 울렁거렸다. 그때 제르딘이 대답했다.

“특별한 마법으로 만든 침대입니다.”

“특별한 마법이요?”

제르딘은 고개를 끄덕이며 제복을 벗기 시작했다. 발레린은 눈을 떼지 못한 채 제르딘을 바라봤다. 그는 발레린을 의식하지 않고 셔츠를 벗으려다 문득 고개를 돌렸다. 눈이 정면으로 마주쳤다.

순간 발레린은 아무 말도 나오지 않았다. 마치 못 볼 것을 훔쳐본 사람처럼 마음속이 떨렸다.

발레린이 뭐라고 말해야 할지 입도 못 떼는 사이 제르딘이 가운을 입었다.

“이곳 욕실은 두 개이니 마음에 드는 욕실을 사용하면 됩니다.”

“…….”

발레린이 멍하니 있자 제르딘은 눈썹을 살짝 찌푸렸다.

“괜찮으십니까?”

“네?”

발레린이 눈에 띄게 놀라자 제르딘이 다가왔다. 한순간 그가 가까워지자 발레린은 놀라며 침대 뒤로 물러났다.

제르딘의 표정이 묘하게 굳었다. 발레린은 혹시나 그가 오해할까 싶어서 빠르게 말했다.

“전 괜찮아요!”

그 말을 하면서도 발레린은 심장이 쿵쿵 뛰었다. 누군가 심장 박동 수를 세면 심장에 문제가 있나 의심할 정도였다. 제르딘은 표정 변화 없이 발레린을 물끄러미 바라봤다. 특히 그가 눈을 맞춘 곳은 방독면의 아래쪽이었다.

발레린은 혹시나 방독면이 잘못되었나 싶어서 입술 부근을 더듬어 보았다. 그때 제르딘이 말했다.

“방독면은 벗고 자도 됩니다.”

뜻밖의 말에 발레린은 황급히 물었다.

“괜찮으시겠어요?”

“어차피 입술을 맞춰도 괜찮은데 더 걱정할 필요가 있겠습니까?”

“…….”

발레린이 말없이 멍하게 있자 제르딘은 뒤로 물러나며 고개를 숙였다.

“그럼 전 씻고 오겠습니다.”

그 말이 끝나자마자 발레린의 얼굴은 벌겋게 달아올랐다.

‘별거 아닌 말인데.’

발레린은 한동안 멍하니 있다가 빠르게 잠옷 드레스로 갈아입었다. 그러곤 곧바로 주변에 있는 불을 다 끄고서 침대 안으로 들어갔다. 그로프가 발레린의 곁으로 다가왔다.

“주인님, 안 씻어도 되겠습니까?”

발레린은 이불을 꽁꽁 싸매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로프는 발레린 곁에 차분히 몸을 안착했다. 발레린은 아까 일을 생각하며 중얼거렸다.

“그로프, 별거 아닌 말에 왜 이렇게 얼굴이 벌겋게 변할까?”

“이상한 상상을 하는 것 아닙니까?”

“이상한 상상?”

“네.”

그로프의 말은 너무나 짧고 간단했지만 발레린의 머릿속은 더욱 복잡해졌다.

“상상을 하는 건 아닌데, 아니, 상상을 하는 건가?”

발레린은 스스로도 납득 못 할 상황에 얼굴이 또 빨갛게 달아올랐다. 그때 차분한 걸음소리가 들렸다. 발레린은 움찔거리며 눈을 꾹 감았다.

걸음소리가 점점 가까워지면서 은은한 비누 향이 났다. 발레린은 그나마 자기가 누운 주변의 불을 꺼서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그러지 않았다면 지금 제르딘은 괴상한 모습을 보고 있을 것이다.

눈을 감고 있는데 얼굴이 벌겋게 달아오른 것 말이다. 발레린은 그렇게 한참 동안 눈을 감고 있었다. 신기하게도 귀가 예민해졌는데 더는 걸음소리가 들리지 않았다. 심지어 이불 소리도.

하지만 여전히 비누 향은 났다. 이전에는 한 번도 맡아 보지 못한 냄새였다. 묘한 물기가 섞인 냄새였는데 은근히 코를 자극했다. 그 냄새를 맡으니 이상하게도 발레린의 심장이 쿵쿵 뛰었다.

발레린은 겨우 숨을 내쉬며 최대한 머릿속에 있는 잡념을 몰아내려 했다. 그때 부스럭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주변에 은근히 있던 빛도 사라진 듯 거슬리는 빛이 완전히 없어졌다.

발레린은 눈을 살짝 떠서 옆을 바라봤다. 창문 사이 달빛이 들어와서 그런지 제르딘의 침대는 무척이나 잘 보였다. 그리고 제르딘도 마침 발레린이 누운 곳을 보고 있었다.

눈이 마주치자 발레린은 깜짝 놀라 저도 모르게 말했다.

“괜찮으세요?”

“뭐가요?”

제르딘의 목소리는 무척이나 차분했다. 발레린은 자신과 다르게 여유로운 제르딘에 부끄러움을 느끼며 머리를 굴렸다. 아까는 아무 말이나 했지만 이제는 말이 되는 이야기를 해야 했다.

그때 발레린의 주변으로 바람이 살랑살랑 들어왔다. 발레린은 고개를 돌려 창문을 바라봤다. 창문은 활짝 열려 있어서 환기에는 문제없어 보였다.

그때 제르딘이 말했다.

“제 걱정은 하지 마세요. 쉽게 죽을 피는 아니니까요.”

농담인지 진담인지 쉽사리 구분되지 않는 말이었다. 발레린이 멀뚱히 보고 있을 때 제르딘은 돌아누웠다. 발레린은 제르딘을 힐끗 쳐다봤다. 그는 정면으로 누운 채 눈을 감고 있었다. 발레린은 창문이 열려 있는 것을 다시 확인하곤 방독면을 조심스럽게 벗었다.

한순간 시원한 공기가 얼굴을 감쌌다. 발레린은 천천히 공기를 들이마셨다. 그러다 제르딘 쪽을 쳐다봤다. 그는 아까 그 자세 그대로였다. 발레린은 한참 동안 그를 보다가 어느새 스르륵 잠들었다.

07. 축하의 말씀

발레린이 깨어났을 땐 이른 아침이었다. 발레린은 곧바로 옆 침대를 확인했다. 제르딘이 누운 자리는 말끔하게 치워져 있었다. 옆에서 그로프가 말했다.

“왕자는 아침 일찍 일어나는 사람인가 봅니다.”

“그러게. 나도 꽤 일찍 일어나는 편인데.”

발레린은 괜히 아쉬워하며 천천히 침대에서 일어났다. 협탁을 보니 노란 튤립이 모두 옮겨져 있었다. 어제는 제대로 보지 못했지만 발레린이 방에서 썼던 물건은 그대로 있었다.

발레린은 옷장에서 보라색 드레스를 꺼내서 침대가 있는 벽에 걸어 놓았다. 그나마 보랏빛을 보니 조금은 기분이 나아지는 듯했다.

그렇게 발레린이 아침 운동을 하며 시간을 보내고 있을 때였다.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울렸다. 발레린이 들어오라고 말하자 문이 활짝 열리면서 루네스가 들어왔다.

“왕자비님, 잘 주무셨나요?”

루네스는 무척이나 밝은 얼굴이었다. 발레린은 왕자비라는 말에 잠시 얼떨떨했으나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오늘은 해인저 모녀의 재판 결과가 나오는 날이에요.”

“해인저 모녀?”

“네, 원래 귀족이 엮인 사건은 재판이 지지부진하게 되는 경우가 많은데, 왕자비님이 직접적으로 얽힌 사건이고 독살과 연관되어 있어서 결과가 일찍 나온대요.”

“그럼 오늘 재판 결과가 나오면 곧바로 집행되는 거지?”

루네스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나저나 왕자비님, 어제 헬릭스 공자님의 축사 때문에 주변이 시끄러워요.”

“왜?”

“조만간 배도스 공작님이 왕자님께 피 검사를 밀어붙이는 게 아닌가 할 정도로 주변 분위기도 심상치 않고요.”

발레린은 쉽사리 말이 나오지 않았다. 제르딘이 피 검사를 받는다면 모든 사실이 밝혀질 것이고 왕자 자리에서 내려와야 할지도 모른다.

발레린이 굳은 얼굴로 있을 때 루네스가 말을 이었다.

“그러고 보면 오늘부터 귀족들도 저마다 본래 가문 출신인지 피 검사를 한다고 하더라고요. 모두 다 형식적인 것에 불과하지만 그래도 귀족들 의견은 괜찮은가 봐요.”

그때 가만히 있던 그로프가 말했다.

“저들끼리 단합이라도 되는가 봅니다.”

그로프의 말은 틀린 게 없었다.

“이렇게 가다간 정말 왕자님이 피 검사를 할 수도 있을 것 같은데…….”

“차라리 왕자님께서 검사를 하시는 게 낫지 않을까요? 그러면 쓸데없는 소문도 없어질 거고 왕의 자리에 곧바로 올라가실 수 있잖아요.”

“하지만 왕자님은 이전에 왕위를 오르던 전통을 벗어나시고 싶지 않나 봐. 선대왕의 위업을 이으려고 그러시는 거겠지. 그리고 피 검사를 해서 올라온 왕들은 이상하게 왕위를 조금밖에 누리지 못하기도 했고.”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