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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록빛 저주의 공녀님-38화 (38/130)

38화

모두의 시선이 빈틈없이 쏟아지자 배도스 공작이 표정을 굳히며 입을 열었다.

“왕자님의 결혼을 축하드립니다.”

배도스 공작이 고개를 숙였다. 제르딘은 무감한 눈빛으로 그를 내려다봤다. 배도스 공작은 천천히 고개를 들고서 말했다.

“그럼 이만 가 보겠습니다. 축사를 다 하기에는 몸이 좋지 않아서요.”

“몸이 좋지 않다니. 어제까지만 해도 다른 귀족들에게 큰소리를 칠 정도로 멀쩡하지 않았나?”

배도스 공작의 눈이 묘하게 굳었으나 이내 그는 아무렇지 않은 척 말했다.

“하지만 저도 나이가 있는지라 체력의 한계를 느끼곤 합니다.”

그러곤 그는 주머니를 뒤져서 헬릭스에게 종이를 주었다.

“네가 읽거라.”

“예? 이건…….”

헬릭스가 대답을 이어 가기도 전에 배도스 공작이 말했다.

“제 아들이 제가 쓴 축사를 읽을 겁니다. 그럼 저는 이만 가 보겠습니다.”

배도스 공작은 곧바로 몸을 돌리곤 사람들을 지나쳤다. 헬릭스는 뒤늦게 배도스 공작을 잡으려 했지만 그러지 못했다. 이제 시선은 헬릭스에게 쏠렸다.

헬릭스는 작게 헛기침을 하고는 몸을 바로 세웠다. 제르딘은 헛웃음을 지으며 자리에 앉았다. 그는 꽤 여유로워 보였는데 헬릭스가 어떻게 나올지 기대하는 얼굴이기도 했다.

발레린은 침착하게 헬릭스를 쳐다봤다. 헬릭스는 식탁의 중앙으로 나와서 고개를 숙인 뒤 종이를 들었다.

“흠, 그럼 축하 말씀을 시작하겠습니다. 요즘 왕궁에서 독살로 인해 왕자님에 대한 휴웅한 소문이…….”

그때 제르딘이 말을 막고는 말했다.

“흉흉한 소문 아닌가?”

헬릭스는 눈을 찌푸리다가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네, 흉흉한 소문이 도는 가운데 왕자님의 결혼 소식은 왕궁에 새로운 바람을 불러일으키는 경사입니다. 이에 저는 여러 귀족을 대표해서 왕자님의 결혼을 축하드리며, 앞으로 왕궁에 더는 요…….”

헬릭스는 눈썹을 모으곤 종이를 뚫어지게 쳐다봤다. 제르딘은 옅은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요사스러운.”

헬릭스가 깜짝 놀라며 제르딘을 쳐다봤다.

“어떻게 잘 아십니까?”

“내가 배도스 공작의 말을 한두 번 들어 보는가? 늘 쓰는 말이 정해져 있는데.”

헬릭스는 눈을 깜빡이며 제르딘을 쳐다보다가 이내 종이에 시선을 돌렸다.

“……요사스러운 일이 일어나지 않도록 힘쓰겠습니다.”

제르딘은 이미 들을 걸 다 들었다는 듯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때 헬릭스가 다시 말을 이었다.

“덧붙여서 왕족의 권위를 위해 저희 귀족들도 모두 고결한 피가 흐르는지 다시 한번 확인할 것이며 왕자님께서도 저희를 많이 도와주시기를 바랍니다.”

헬릭스는 한숨을 내쉬며 종이를 내렸다. 반면 제르딘의 얼굴은 차갑게 굳었다. 발레린은 혹시나 자신의 입술 때문에 뒤늦게 중독이 온 것 아닌가 하며 걱정스레 물었다.

“왕자님, 괜찮으세요?”

제르딘이 시선을 내렸다. 처음 보는 가라앉은 시선에 발레린은 살짝 놀라며 눈을 깜빡였다.

“괜찮습니다. 이제 일어나시죠.”

“네?”

발레린이 당황하며 말하자 제르딘이 주변을 둘러보며 외쳤다.

“이제 축하 인사는 다 들었으니 모두 돌아가도록.”

귀족들이 모두 일어나서 고개를 숙였다. 제르딘은 굳이 돌아보지 않고 발레린에게 말했다.

“가시죠.”

발레린은 어색하게 일어나 제르딘을 따라나섰다. 제르딘의 걸음은 무척이나 빨랐다. 발레린은 거의 뛰다시피 그를 따라갔다.

왕궁의 문에 도착할 때쯤이었다. 제르딘이 문득 멈춰서 뒤를 돌아봤다.

발레린은 늦지 않기 위해 뛰어갔다. 제르딘은 발레린과 눈이 마주치자마자 빠르게 다가왔다. 발레린은 뛰어다가다 문득 멈춰 섰다. 어느새 제르딘이 앞에 서 있었다.

“죄송합니다. 제가 공녀를 생각지 못하고 걸었습니다.”

“아니에요.”

발레린은 그 말을 하면서도 제르딘이 말한 공녀가 거슬렸다. 이제 결혼을 했으니 ‘당신’ 정도는 불러야 하지 않나 싶다가도, 그에게 너무 많이 바라는 것 같아 아예 생각을 접었다. 발레린은 애써 미소를 지었다.

마침 문지기가 문을 열어 주었다. 제르딘은 먼저 발레린을 안내했다. 발레린은 고개를 숙인 뒤 왕궁으로 들어갔다.

왕궁 안은 조용했다. 하인들 대다수가 피로연에 있는지 근처에 지키는 하인들도 얼마 없었다.

제르딘은 그다지 말이 없었다. 발레린도 딱히 할 말이 떠오르지 않았다. 그래도 입맞춤에 대해선 다시 묻고 싶었지만 발레린은 가까스로 참았다.

제르딘은 같은 말을 반복하는 것을 좋아하지 않았다. 처음 만났을 때 그가 했던 말이었다. 발레린은 괜히 제르딘이 싫어하는 일을 하고 싶지 않았다.

그렇게 발레린이 묻고 싶은 것을 꾹 참고 있을 때였다. 문득 제르딘이 발레린을 보며 말했다.

“보좌관 말로는 대신관과 오랫동안 이야기를 나누었다고 하던데 무슨 이야기를 나눈 겁니까?”

“『신의 대답』이라는 책에 대해서 이야기를 나눴어요. 확실히 대신관님이라서 대화의 깊이가 남다르더라고요.”

제르딘이 헛웃음을 지었다.

“대신관이 그렇게 길게 이야기를 했습니까?”

“네.”

“오래 살고 볼 일이군요.”

뜻밖의 말에 발레린은 제르딘을 올려다봤다.

“원래 그런 분은 아니신가요?”

“대신관은 저와 가까운 사람과는 그렇게까지 오래 있지도 않을뿐더러, 남을 무시하는 데 일가견이 있는 분입니다.”

“처음에는 그렇긴 했지만 나중에 제가 나갈 땐 다시 신전에 방문하라고까지 말씀하셨어요. 거기다 결혼을 축하한다고 하셨고요.”

“웃기는 노인네군요.”

발레린은 깜짝 놀라며 제르딘을 쳐다봤다. 대신관과 만났을 때도 제르딘은 대신관에게 좋은 감정은 없어 보였다. 하지만 생각보다 직설적인 말에 발레린은 조심스레 물었다.

“대신관님이 마음에 들지 않으시는 거죠?”

“단 1초도 같이 있기 싫은 사람입니다.”

제르딘은 계단을 올라갔다. 발레린은 그를 따라가며 물었다.

“혹시 대신관님이 실수한 것이라도 있나요?”

“실수라기보단 저를 처음부터 노골적으로 싫어했습니다. 제가 태어났을 때 대신관은 제게 정화수를 직접 뿌리지 않았다고 하더군요.”

“…….”

“이미 알고 있겠죠. 제 어머니가 어떤 사람의 아이를 낳았는지.”

발레린은 서둘러 주변을 둘러봤다. 다행히 주변에는 사람이 없었다. 제르딘은 발레린을 보고는 웃었다.

“여긴 제 궁이라서 그렇게 조심할 필요는 없습니다.”

“하지만 역사책을 보면 항상 근처에 있던 사람이 일을 일으키더라고요. 특히 12대 왕께서 특별히 아낀 레스타드 백작이 배신을 하는 바람에 전쟁까지 났으니까요.”

제르딘은 그저 고개를 끄덕였다. 발레린은 괜히 걱정이 되어서 제르딘에게 가까이 다가가 작게 속삭였다.

“그런데 대신관님이 그 사실을 알고 있다면…….”

그때 문득 제르딘이 멈춰 섰다. 발레린은 말을 하다 말고 고개를 들어 제르딘을 쳐다봤다. 그는 발레린을 보고 있었는데 조금은 당황한 얼굴이었다. 그에게서 처음 보는 얼굴에 발레린은 서둘러 말했다.

“괜찮으신가요?”

그 말에 제르딘이 고개를 돌렸다. 그에게 그다지 나쁜 기색은 보이지 않았다. 제르딘은 다시 걸으면서 말했다.

“제가 대신관의 비리를 말하지 않는 이상 대신관은 가만히 있을 겁니다. 저도 굳이 먼저 밝힐 이유도 없고요.”

“그럼 대신전에서는 그저 경고만 하신 건가요?”

“맞습니다.”

그 말을 하면서 제르딘이 앞서서 걸었다. 발레린은 재빨리 따라갔다. 따라가다 보니 어느새 커다란 문 앞이었다.

발레린은 멍하니 문을 보며 말했다.

“이 방이…….”

“앞으로 저와 함께 쓸 방입니다.”

제르딘은 앞에 있는 문지기에게 눈짓했다. 문지기는 착실히 문을 열어 주었다.

“들어가시죠.”

발레린은 순간 심장이 빠르게 뛰었으나 내색하지 않고 방으로 발을 내디뎠다. 방 안은 무척이나 포근하고 따뜻해 보였다. 특히 화려한 궁의 내부만 보다가 나무로 된 벽장식을 보니 새롭기까지 했다.

하지만 발레린은 이상하게도 이곳이 낯설지 않았다. 꼭 어렸을 때 자신이 썼던 방이 생각났다. 그리고 어머니의 방도.

발레린이 눈을 동그랗게 뜨며 주변을 둘러보자 제르딘이 옆에 서서 말했다.

“사르티아 공작에게 어릴 때 어떤 방을 썼는지 물었습니다. 그리고 어머니 방도요.”

“어쩐지 낯설지 않더라니.”

발레린은 벅찬 마음마저 들었다. 그때 어깨 위에 있던 그로프가 울었다.

“개꿀개꿀.”

제르딘은 그로프를 쳐다봤다. 그로프를 보는 시선은 왠지 모르게 딱딱해 보였다. 발레린은 혹시나 실수한 것이 있나 싶어 제르딘에게 급히 물었다.

“왜요?”

그제야 제르딘이 그로프에게 시선을 뗐다.

“아닙니다.”

발레린은 싱거운 제르딘의 태도에 의아해했지만 신경 쓰지 않았다. 무엇보다도 이 방이 무척이나 마음에 들었다. 그러나 침대는 두 개였다. 발레린은 다소 시무룩한 목소리로 말했다.

“침대는 두 개네요.”

“아무래도 공녀가 불편할 것 같아서요.”

발레린은 작게 중얼거렸다.

“조금도 안 불편한데.”

“불편하지 않다고 말씀하셨습니까?”

너무나 명쾌하게 듣는 제르딘에 발레린은 놀라서 고개를 들었다.

“네?”

발레린의 목소리가 절로 커졌다. 제르딘은 피식 웃고는 차분히 말했다.

“침대가 하나만 있으면 공녀는 불편할 겁니다.”

“왜요?”

“제가 가끔 병이 와서요.”

“하지만 전 정말 괜찮아요!”

발레린은 눈을 빛내며 제르딘을 쳐다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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