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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록빛 저주의 공녀님-37화 (37/130)

37화

이내 그가 옆에 있던 신관에게 눈짓하자 신관이 빠르게 다른 종이를 내밀었다. 대신관은 근엄하게 기침을 하고는 말했다.

“이렇듯 위대한 매시드 왕국에 끊어지지 않을 연이 맺어졌습니다. 우리 왕국에서는 위대한 신의 신성한 영향력 아래…….”

발레린은 대신관의 말이 이제 완전히 들리지 않았다. 입술에는 여전히 부드럽게 닿은 촉감이 느껴질 정도였다.

‘꿈인가.’

발레린은 자신의 팔을 살짝 꼬집어 보았다. 생생한 아픔이 느껴졌다.

‘꿈은 아닌데.’

발레린은 쉽사리 생각을 이어 갈 수 없었다. 생각지도 못한 입맞춤이었다. 아니, 생각조차 할 수 없었던 입맞춤이었다.

발레린은 살짝 제르딘을 엿보았다. 그는 고개를 들어 올린 채 대신관을 보고 있었다. 그의 모습은 근엄하고 자신감에 차 보였다. 영락없는 일국의 왕자였다. 발레린은 난데없이 걱정이 되었다.

‘내 독이 치명적인 건 알 텐데.’

비록 발레린은 입을 벌리지 않았지만 그래도 혹시 모르는 일이었다. 발레린이 걱정되어서 제르딘을 계속 보고 있자 제르딘이 돌아봤다. 여전히 그는 아까와 같았다. 쓰러지지도 않았고 멀끔한 얼굴이었고 얼굴빛도 푸릇하지 않고 생기가 있었다.

그래도 발레린은 걱정되었다.

“괜찮으세요?”

발레린이 작게 속삭이자 제르딘이 입꼬리를 살짝 올렸다. 그 모습을 보며 발레린이 멍하게 있는 사이 제르딘이 말했다.

“괜찮습니다.”

“개꿀개꿀.”

그로프의 소리에 발레린은 서둘러 정신을 차리고는 말했다.

“하지만 제 독은…….”

그때 제르딘이 고개를 살짝 숙여 속삭였다.

“어차피 저는 잡종 피라서 평범한 인간이랑 다릅니다.”

나직이 떨어지는 목소리는 유난히 귓가를 간질였다. 그때 대신관이 외쳤다.

“신께 영원함이 있기를, 왕국에 영원한 영광이 있기를.”

그 말이 떨어지자마자 앉아 있던 귀족들이 일어났다. 제르딘은 아까와 다르게 차분히 고개를 숙여 대신관에게 인사를 했다. 발레린도 제르딘을 따라서 고개를 숙였다.

대신관이 고개를 끄덕이며 미소를 지었다. 특히 그의 시선은 발레린에게 있었다.

“결혼 축하드립니다. 왕자비님.”

발레린은 고개를 끄덕이며 미소를 지었다. 그걸 지켜보던 제르딘의 표정은 그다지 좋지 않았다. 그의 눈빛은 평소보다 냉정하고 차가워 보였다.

결혼식 피로연은 제르딘의 왕궁 정원에서 열렸다. 그 탓에 발레린은 정신없이 마차를 타고 왕궁으로 왔다. 그리고 도착하니 제르딘의 옆이었다. 그때까지만 해도 발레린은 머릿속에는 오로지 한 생각밖에 없었다.

‘왕자님이 내게 입을 맞추다니.’

발레린은 감히 입술을 더듬거리지도 못했다. 여전히 부드러운 입술의 여운이 남아 있었다. 발레린이 멍하니 앞을 보고 있을 때였다.

“주인님, 괜찮으십니까?”

“…….”

“주인님?”

“…….”

“개꿀개꿀.”

발레린은 서둘러 고개를 내렸다. 그로프가 탁자 위에서 발레린을 쳐다보고 있었다.

“그로프, 언제 여기로 내려왔어?”

“아까 전입니다. 그나저나 주인님 괜찮으십니까?”

“뭘?”

“아까부터 다른 곳에 정신이 팔린 것 같아서요.”

“내가?”

“네. 혹시 충격을 받으신 겁니까?”

발레린은 깜짝 놀라며 제르딘을 쳐다봤다. 하지만 그는 옆에 앉아 있는 귀족과 진지한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다행히 제르딘이 듣지 못한 것 같았다. 발레린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고는 그로프에게 작게 속삭였다.

“충격을 받았다기보다는 너무 좋아서 그래.”

“하지만 주인님은 아까부터 웃음을 잃으셨지 않습니까? 표정도 좋지 않았고요.”

발레린은 고개를 내저었다.

“이런 일이 처음이라 놀라워서. 왕자님이 그렇게 행동할 줄은 몰랐거든.”

“저도 놀랍긴 마찬가지였습니다. 결혼식에서 흔히 하는 일이라고 해도 주인님에게 그렇게 할 줄은 몰랐습니다.”

발레린도 고개를 끄덕였다. 숨결만 닿아도 맹독에 중독될 수 있는데 제르딘은 아예 상관하지 않았다. 거기다 잡종 피라서 멀쩡하다고 하다니.

발레린은 힐끗 제르딘을 보았다. 그는 이제 미소를 짓고 있었다. 재미있는 말이라도 들은 모양이었다. 발레린은 저도 모르게 미소를 지었다. 그의 웃음은 너무나 완벽해서 눈을 뗄 수 없었다.

그때 낮게 울리는 목소리가 발레린의 귓가에 닿았다.

“공녀님.”

낯선 목소리에 발레린이 고개를 돌리자마자 익숙한 얼굴이 보였다.

“헬릭스 님?”

“맞습니다. 기억하고 계셨군요.”

헬릭스는 웃으며 발레린 옆에 앉았다. 분명 그녀의 옆에는 어떤 귀족이 앉아 있었는데 어디 간 건지 보이지 않았다. 발레린이 의아하게 생각하던 찰나 헬릭스와 눈이 마주쳤다. 그는 웃으며 발레린을 쳐다봤다. 발레린은 그가 괜찮아 보이긴 했지만 그래도 예의상 물었다.

“몸은 괜찮으세요?”

“덕분에 괜찮습니다. 공녀님께서 제게 약초를 빨리 먹여서 그나마 제가 살 수 있었다고 하더군요.”

“뭘요, 제가 당연히 해야 했던 일인걸요.”

헬릭스는 발레린을 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헬릭스는 시선을 발레린에게 고정하면서 손은 근처에 있는 물 잔을 만지작거렸다. 물 잔은 넘어갈 듯 말 듯 위태로워 보였다. 발레린이 물 잔을 유심히 보고 있을 때였다.

“그때 제가 공녀님을 제대로 알지 못했던 점 사과드립니다. 저 때문에 공녀님께서 힘드셨다고 들었습니다.”

“왕자님께서 해결해 주셔서 많이 힘들지는 않았어요.”

헬릭스는 얼굴이 약간 굳긴 했지만 고개를 끄덕였다. 발레린이 유심히 쳐다보자 헬릭스가 웃었다. 발레린도 그를 보며 미소를 지었다. 그렇게 어색하게 시간이 흐를 때였다. 헬릭스는 시선을 돌려서 주변을 둘러보다가 그로프와 눈을 마주쳤다.

“그나저나 이 개구리는 뭡니까?”

헬릭스가 만지려 하자 발레린은 재빨리 헬릭스의 팔을 잡았다.

“그로프라는 개구리인데요, 독 개구리예요. 잘못 만지면 손에 독이 옮을 거예요.”

헬릭스는 어색하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죄송합니다.”

“아니에요. 제가 미리 그로프를 소개하지 못한 탓인데요.”

발레린은 미소를 지으며 그로프를 소개했다. 헬릭스는 관심 있는 듯 고개를 끄덕이다가 아예 발레린 쪽을 보며 몸을 돌린 채 한 팔로 머리를 기댔다. 그러자 근처에 있던 물 잔이 밑으로 와장창 깨졌다. 헬릭스는 눈썹을 찌푸리며 탁자에서 몸을 뗐다.

주변에 있던 사람들이 모두 돌아봤다.

“헬릭스.”

낮게 울리는 목소리였다. 발레린이 고개를 돌리자 제르딘이 차가운 눈빛으로 보고 있었다.

“아, 왕자님, 결혼 축하드립니다.”

헬릭스는 아무렇지 않은 척 일어나서 고개를 숙였다.

“이제 몸은 아프지 않은가?”

헬릭스가 입꼬리를 올리며 웃었다.

“예, 공녀님께서 애써 주신 덕분에 이제 아프지 않습니다.”

그의 시선은 발레린에게 있었다.

“이제 나와 결혼했으니 공녀보다는 왕자비라고 불러야 하는 걸 모르는 건 아닐 테고, 아니면 진짜 몰랐던 건가?”

헬릭스의 얼굴이 대번에 굳었다.

“왕자님, 제가 그것도 모르는 사람으로 보입니까?”

“그렇지 않다면야 굳이 공녀라고 말할 필요가 없지 않나.”

“이전에 제가 말하던 말버릇이 붙은 것뿐입니다. 저를 아직도 무식쟁이라고 생각하시는 것이라면…….”

그때 배도스 공작이 다가왔다.

“왕자님, 이렇게 좋은 날에 날을 세울 필요가 있습니까?”

“날을 세우다니?”

“제 아들에게 되도 않는 말로 날을 세우지 않으셨습니까?”

제르딘이 피식 웃었다.

“사실을 말한 것뿐이네.”

배도스 공작의 얼굴이 한순간에 굳었다. 발레린은 갑자기 벌어진 상황이 당황스러우면서도 그들의 대화가 흥미로워 관심 있게 지켜봤다. 그로프도 어느새 발레린의 어깨에 올라와서 인간들의 얼굴을 구경하고 있었다.

“왕자님, 말씀이 너무 심하십니다. 제 아들을 이렇게 무시하는 것은…….”

“축하한다는 말을 하러 온 것이라면 감사히 받겠네.”

제르딘은 간단히 말하고는 미소를 지었다. 배도스 공작은 입을 다문 채 제르딘을 날카롭게 쳐다봤다. 가만히 지켜보던 헬릭스가 배도스 공작의 팔을 잡으며 속삭였다.

“아버지, 정말 왕자님께 축하하러 오신 겁니까?”

주변에 있던 귀족들이 관심 있게 쳐다봤다. 마침 제르딘이 차분히 말했다.

“그러고 보니 이제 배도스 공작이 축하 인사를 건넬 차례 아닌가?”

배도스 공작의 얼굴이 더욱 굳었다. 그때 근처에 앉아 있던 대신관이 말했다.

“왕자비께서 기다리고 계시니 얼른 말하게.”

“개꿀개꿀.”

그로프까지 울자 배도스 공작이 화들짝 놀라며 주변을 둘러봤다. 그는 발레린의 어깨 위에 있는 빨간 독 개구리를 보자마자 얼굴이 더욱 일그러졌다.

그때 제르딘이 말했다.

“뭐 하는가? 설마 내 결혼을 축하하지 않는 건가?”

주변에 있던 귀족들이 말을 꺼냈다.

“원로원은 물론 대신전에서 이 결혼을 인정하지 않았나? 그러니 아무리 배도스 공작이라도 이 결혼을 반대한다면 보기가 좋지 않을 텐데.”

“그렇게까지 하겠나? 심지어 대신전에서도 인정한 결혼인데. 반대를 한다면 신전과 척을 지는 것은 물론 왕실을 무시하는 처사인데.”

그들은 작은 목소리로 말하는 듯했지만 발레린이 있는 곳까지 무척이나 잘 들렸다.

제르딘은 여전히 배도스 공작을 쳐다보고 있었다. 그가 말을 할 때까지 기다리는 듯 여유로워 보이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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